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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그라나다
낯선 도시의 새벽 공기.
깊은 밤 잠을 깨우는 낯선 방문자, 혹은 이방인.

그 정체와 상관없이 그가 흔히 호스텔을 찾는 여행객들과 다른 낯선 사람이라는 것 만으로 그 방문이 희주에겐 묘한 설레임이었을거야.
늘 반복되는 일상의 시간을 깨워 비로소 아주 오랜만에 새로운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이건 또한 희주뿐만 아니라 유진우에게도 큰 의미가 되는 만남이지.
물론 당시로선 알지 못했겠지만...
두 사람 다에게 이 첫만남은 모든 것의 시작인거지.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들의 첫만남 씬은 다 중요하겠으나
보는 이의 기억에 남을 만한 건 드물어서 떠올려보면 기억에 남는 장면은 손가락으로 꼽는다고 봐.
당연히 알함도 그 중 하나이고.

내가 생각하는 기억에 남는 첫만남이란,
영상이 이쁘거나 아니면 이제까지 한번도 본적 없는 특이한 만남이란 설정, 혹은 만나자마자 한눈에 반하는 전개 말고
그래 상호작용이지.
그 만남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절대 이전의 나로는 돌아가지 못할 절대적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
그 우연성과 절대성에 스스로 놀라게 되는.
본인들은 그때 그 순간에는 절대 알지 못한다는 것의 무지함에 대해서도.

그래서 시간이 지나서 되돌아보면 그 만남이 단순히
둘이 사랑에 빠지는 것에 그치는게 아니라 서로의 인생 자체가 그 만남을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음을
알게 될때, 그 첫만남을 본 나에게도 결정적인 순간으로
각인되고 기억되는 거지.

더구나 이건 유진우의 나레이션으로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지.
유진우란 남자의 신기한 경험담이자 회고록 혹은 유언이었을지 모를.
그렇기에 그의 일생에서 이 만남이 얼마나 커다란 의미인지
알 수 있어.
왜냐면 단편적이지만 희주와 만나기 전의 그의 과거도 회상하기 때문에.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건 일이었을거야.
부모가 일찍 돌아가신 환경과 그럼에도 너무 뛰어난 두뇌가 그를 그렇게 만든거지.
그 과정 속에서 첫번째 부인은 떠나가고...
그런데 그 이별은 너무 큰 상흔을 남긴거지(정말 그러는건 아니지. 아무리 진우가 일에 바빠 가정에 소홀했다 하더라도 헤어지고 만나던지, 아니면 헤어지기도 전에 만나고 있었다면 너무 늦기전에 진우에게 얘기했어야지.
두사람이 어떤 친구사이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 관계를
그렇게 깨트리는 짓도 이해안가지만 끝까지 말 안해서 진우 바보 만들고 뒤통수 쳐놓고 찾아온 전남편 앞에서 사과 한마디 없이 가증스레 쳐울기나 하는 그 뻔뻔스러움이라니...)
그 뒤로 홧김에 한 두번째 결혼까지 인간관계에 대해
남은건 환멸뿐이라 더더욱 일에만 집착하게 됐을거야.

그런데 일로 찾아간 그라나다의 낡은 호스텔에서 만난
정희주란 여자는 그런 진우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 수도 있음을 알게 해주지.
일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음을.
사랑하는 사람, 가족,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들.
빨리 처리해야할 일로 시간에 쫓기는 삶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시간의 주인이 되는 삶.

그렇게 유진우에게 기적같은 기회였을지도 모를 그 만남은
그러나......점점 악몽으로 변해가.

진우는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지.
제정신으로 그리고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서.
그래서 나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실낱같은 희망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능성이 희박해도 아닐거야, 다 제자리로 돌아갈수 있어.
유진우가 누군데,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서 해결하고 원래의 자신만만한 그치만 시련을 겪고 더 성숙하고 멋진 남자가 되서 정희주에게로,
그리고 제이원 홀딩스의 대표자리로 돌아갈거라고.

아무튼 끝이 어떻든 유진우와 정희주의 저 첫만남 장면은 두고 두고 잊지 못할, 앞으로도 다시 보기 어렵지 않을까하는 의미깊은 장면이지 싶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두사람 인생의 항로 자체를 송두리째 바꿔버린 결정적인 한순간.

인생에 있어 어느날 갑자기 누군가를 만나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기를 누구나 꿈꾸기에 우린 지금도 극장에 가고 티비를 틀어 드라마를 보는 거겠지.
한동안 나를 깊게 꿈꾸게 해주었던 이 드라마를 손에 만져지는(블레라던가 블레라던가) 무언가로 간직할 수 있게 되길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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