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라디오에서 이런 사연을 들은 적이 있어.
어느날 밤, 집 앞에서 여자친구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던 모습이 너무 예뻐서 안 잊혀진다고.
그래서 그 후로 여자친구랑 다투거나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그때 기억만 떠올리면 다 이해되고 아무렇지
않아 진다고 말이지.

그걸 듣고 나도 고개를 끄덕이게 됐어.
그래. 마음이 가는건 그 사람과 보내는 시간의 양과
비례하는건 아니지.
긴 시간을 같이 보내도 반하게 되는건 결국 어떤 순간,
찰나가 아닐까하고 말이지.

연인들에겐 누구나 그런 순간의 기억들이 있지 않을까.
그 사람에게 반하게 된 어떤 순간.
그 전까진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면 그때를 계기로
'아, 내가 이사람에게 완전히 빠졌구나' 하고 인정하게
되는 순간 말이야.

유진우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면,
아마도 그날 저녁 그라나다의 기차역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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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를 배회하던 시선 안으로
예고 없이 그녀의 모습이 들어선다.
항상 수수한 차림이던 그녀가 오늘은 생일이라고
고운 연보라빛 원피스를 예쁘게 차려입고서.
그렇게 잘못 날아든 나비처럼, 원피스 자락을
나풀거리며 그녀가 저만치서 뛰어온다.
나를 향해서, 떠나는 나를 만나려고.

젊고 구김살 하나 없이 밝은 그녀에게 난
어울리지 않아서.
나의 어둡고 황량한 세상을 벗어나
원래 그녀가 속한 세계로 돌아가라고
가서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라고
그렇게 차갑게 밀어냈는데,
기어이 그녀는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는
나를 찾아 생일파티 중간에 여기까지
것이다.

그녀는 알까?
사실은 잠에서 깨어 옆을 보면, 항상 거기 그녀가
있어 얼마나 안심이 됐는지.
다 큰 어른이면서 아이처럼 한참이나 어린 그녀에게
얼마나 기대고 싶었는지.
그녀만큼은 절대 다치지 않게 안전하게 지켜주고 싶은지.

그리고 지금 얼마나 뛰어내려 그녀를 안고 싶은지.
그녀를 잡고 싶은지.
그녀와 같이 있고 싶은지 그녀는 알까??

아마 내가 이렇게 그녀를 보고 있던 것조차
그녀는 알지 못하겠지.

창밖으로 점점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영영 그녀를 놓친 것은 아닌지,
뭔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만
같아서 마음은 점점 무겁게 가라앉는다.
언제 다시 그녀를 볼 수 있을까?
정세주를 찾을 수 있긴 한걸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아는데도 처음으로
그녀를 떠나온 것이 후회가 된다.
마치 나의 일부분을, 심장 한조각을 거기
남겨두고 온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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