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함에서의 배우들 연기는 이미 다들 칭찬한 부분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감탄한 지점은 추락 사고가 나기 전과 그 이후의 유진우란 남자의 변화를

배우가 너무 잘 표현한 부분이었어.

마치 빛과 어둠처럼 다리를 다치기 전과 후의 유진우는 전혀 다른 사람같거든.


초기의 밝고 활동적이며 늘 자신감에 차있던 유진우 대표와

자기 안으로 침잠하듯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의 고독한 남자.

그래서 모두들 초반의 유진우를 그리워하고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랄 정도였지.


그리고 밝음과 어두움 말고도

또 하나의 차이는 바로 강함과 연약함이라고 생각해.

이걸 잘 드러내보이는 의상부터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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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가 추락했을때 입고 있던 저 셔츠는 그에게 약간 커보이면서도 부드러운 선으로 된 옷이라서,

당시 상황에서의 그의 공격받기 쉬운 무방비함과 연약함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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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친 후에 진우가 입었던 옷들이래야 환자복 아니면 잠옷에 가운차림이니,

빗속에서 몸도 온전치 않은 사람의 저런 모습과 마르고 황폐해진 별장에서의 모습들을 곁에서

계속 지켜봤던 희주 마음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가.


활기차고 건강했던 사람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곁에 제대로 된 가족도 친구도 없는

그를 혼자 둘 수 없다는 마음.


그런데 그는 희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 곁을 영영 떠나버리지.

그리고 일년이란 긴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나타난 그의 모습이란 이런 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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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사진이야 백장이라도 첨부하고 싶지만 참기로 하고.

1년 만에 보는 그는 여전히 다리가 불편할지언정, 사고 당시의 곧 부서질 듯한 모습에서 회복되어

많이 단단해지고 차분해진 느낌이었어.


그가 입은 검은 정장과 성당에서 들었던 총은 현대의 느와르적인 느낌이 강했다면,

어두운 밤, 빗속에서 우산을 쓰고 케인을 짚고 나타난 그의 모습은 어느 나라 귀족같기도 하고,

뭔가 사연이 있는 어둡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도 있어서 그냥 서있기만 하는데도 시선을 뗄 수 없었지.

(시대와 장르를 초월한 분위기랄까. 도시적이고 세련되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고전적인 우아함이 있지)


그런데 여기서 의미를 두자면,

그가 입은 옷은 누군가의 장례식에 참석할 때 입는 상복이거든.

즉,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옷이란 거야.


난 진우가 희주를 충동적으로 찾아간 것이 최팀장의 사무실에서 엠마를 보고 그녀를 떠올려서기도 하지만,

그날 낮에 차형석의 추도식에 갔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생각해.

하루도 빠짐없이 죽은 차형석의 모습을 보고, 그를 위한 추도식까지 다녀온 후,

느닷없이 엠마를 보았을 때 그가 떠올린건 희주라는 사람에 대해 그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 아니었을까.

그녀가 가진 죽음과는 정반대의 삶의 이미지 말이야.

하루하루의 생을 최선을 다해 살고, 늘 밝고 긍정적인 모습이 그가 기억하는 희주일 테니까.

그래서 그가 늘 한 발을 딛고 선 지긋지긋한 죽음의 세계를 벗어나 생명이 충만한

변함없이 밝고 씩씩한 그녀의 모습을 멀리서라도 꼭 한번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기의 인생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지만, 여전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잘 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위로받고 싶어서.


그리고 또 다른 변화라면 말 수가 줄어든, 어딘가 고요하고 쓸쓸한 분위기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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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입은 긴 니트 가디건은 부드럽고 연약한 느낌을 주면서, 그가 처한 저 상황을 더욱더 안쓰럽게 보이도록 만들지.


난 진우가 초기의 활동적이고 외향적인 모습에서 이렇게 정적이고 내향적인 모습으로 변하면서

오히려 사람들이 그에게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고 생각해.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밝고 자신감에 가득 찬 유진우였더라도 그토록 그를 사랑하고 응원했을까.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의 겉모습을 넘어 그의 내면을 알아야, 그래서 그가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하는거 아니겠어.

우리가 초반에 말 많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그의 겉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면, 불편한 다리 때문에 움직임이

느려지고 말 수가 준 그를 통해 그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 거지.

그러면서 알게 된 거야.

컵 속에 떠다니던 알갱이들이 밑으로 가라앉고 나면, 안에 든 액체가 더 잘 보이듯이

그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두가 알게 된 거지.


그가 얼마나 포기를 모르는 강한 의지의 사람인지.

얼마나 책임감 있는 사람인지.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또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약한 면도 가지고 있는지.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스스로 다치고 상처입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남자란걸.


그리고 그가 얼마나 외로운 남자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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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기차역에서의 진우의 이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더라고.

저 옷들과 배낭, 한쪽에 세워진 케인까지.

저건 어딘가를 여행하는 사람이자, 정처없이 여기저기 떠도는 방랑자의 모습이거든.

그러고 보면 진우가 희주와 만났던 장소 중, 진우의 집이라고 부를 만한 곳은 없었지.

그에 반에 희주가 운영하던 호스텔, 그녀의 작업실, 새로 마련한 집 등 그녀는 늘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갖고 있었어.


그래서 진우에게 희주는 그가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가정, 가족을 의미하고 그가 돌아갈

마지막 장소, 집이었을 거야.


저게 내가 기억하고 싶은 마지막 그의 모습이야.

그가 긴 여행을 끝내고 결국 희주에게 돌아갔을지는 알 수 없지만,

추운 겨울날 서울 밤거리를 헤매던 모습보다는 차라리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저 모습이 낫거든.

아무리 쓸쓸하고 외로워 보일지라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