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자, 양주동<면학의 서>, 두 시인의 거짓말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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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도 1 : 책을 읽는 청년; 특정 목표물을 찾아 훑어 나가는 스캔-스킴 독법을 보여주고 있다>

중고등학교 다니면서 읽었을 때에는 그저 잘 쓴 글이네 하고 넘어갔다. 그다지 깊이는 없었지만, 싸구려 감동 비슷한 것도 느끼고 지나쳤다. 다 자라서 학교를 다니다 문득 옛 생각이 나더라. 그나마 이정도 멋 있는 글도 없었던 듯 하더라.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영국의 시인 키이츠의 <채프먼의 호머를 처음 읽고> 라는 단시 번역을 원문과 대조했더니 다른 것이었다! 아니, 엉터리 번역이었다니! 나의 싸구려 감동이었을지언정, 그래도 가슴이 뭉클하며, 눈물이 한 방울 맺히려 했던 순수한 감동이 거짓에 근거하고 있었다니? 

문제는 시의 마지막 행 "말없이 다리엔의 한 봉우리를" (Silent, upon a peak in Darien) 이었다. 앞서 나온 동사와 목적어는 "응시하였다" (stared at) 과 "태평양을" (the Pacific) 이었지, "바라보았다" ((gazed) upon) 과 "다리엔의 한 봉우리를" (a peak in Darien) 은 아니었던 것이다. 양주동은 동사의 뜻도 틀리게 읽고 구동사 역시 잘 못 파악하였던 것이다. 아니, 면학을 권하는 글에서 이렇게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다니! 대체 자칭 국보급 인물이 이렇게 낮은 수준의 학술을 마치도 대단한 것인 양 뽐냈단 말인가!

키이츠의 <채프만의 호머를 읽고> 위키백과 : http://en.wikipedia.org/wiki/On_First_Looking_into_Chapman's_Ho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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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도2: 바스꼬 누녜스 데 발보아의 1513 년 9 월 태평양 탐사 길>

문제는 양주동에서 그치지 않는다. 번역의 대본인 키이츠의 시는 마치도 육교를 횡단하여 태평양을 발견한 것을 에르난 꼬르떼스인 듯 그리고 있지만, 실은 그가 아니고 1513 년 9 월 20 일에 파나마의 태평양 쪽에 도달한 바스꼬 누녜스 데 발보아였던 것이다. 

바스꼬 누녜스 데 발보아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바스코_누녜스_데_발보아
http://en.wikipedia.org/wiki/Vasco_Núñez_de_Balboa#.22Discovery.22_of_the_South_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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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도 3: 오늘의 파나마 공화국; 바스꼬 누녜스 데 발보아는 다리엔의 해안에서 파나마 만을 발견하고 남해라고 명명하였다. 태평양을 발견한 것이다.> 

에르난 꼬르떼스는 발보아의 하급자로서 1519 년 2월에 직위해제 명령에 불복하면서부터 1521년 8월 13 일까지 발보아와의 권력 다툼 및 멕시코 제국의 멸망에 힘을 쏟으며 주로 멕시코 동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리엔의 산봉우리에 올라 처음으로 태평양을 내려다 보았을 사람은 꼬르떼스가 아니고 발보아였고, 꼬르떼스는 발보아를 축출한 반란군대장으로 태평양 발견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에르난 꼬르떼스 위키백과 : http://en.wikipedia.org/wiki/Hernán_Cortés#Conquest_of_Mex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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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도 4 :  에르난 꼬르떼스의 멕시코 정복 길; 1519년 2월~1521년 8월>

꼬르떼스는 1521년의 멕시코 정복 후 1524년까지 멕시코를 통치하다 스페인으로 귀국한다. 한편 키이츠의 거짓말과 양주동의 오역이 감동을 주어 청년 독자들을 진정한 독서와 면학의 길로 이끌었다면, 공과 죄 중 어느 것이 크다 말해야 할까? 만약 공과가 죄과보다 크다면, 플라톤은 관념에 이끌려 현실을 보지 못 한 장님이었다 말해도 가하겠다. 공화국에서 추방되어야 할 이들은 유능한 거짓말쟁이들이 아니라, 무능한 철학자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님들은 어찌 생각들 하시나? 하하하하하!

면학의 서
글쓴이 : 양주동

독서(讀書)의 즐거움! 이에 대해서는 이미 동서(東西) 전배(前輩)들의 무수(無數)한 언급(言及)이 있으니, 다시 무엇을 덧붙이랴. 좀 과장(課長)하여 말한다면, 그야말로 맹자(孟子)의 인생 삼락(人生三樂)에 무름지기 '독서(讀書), 면학(勉學)'의 제 4일락(第四一樂)을 추가(追加)할 것이다. 진부(陳腐)한 인문(引文)이나 만인(萬人) 주지(周知)의 평범(平凡)한 일화(逸話) 따위는 일체 그만두고, 단적(端的)으로 나의 실감(實感) 하나를 피력(披瀝)하기로 하자. 

열 살 전후 때에 논어(論語)를 처음 보고, 그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운운(云云)이 대성현(大聖賢)의 글의 모두(冒頭)로 너무나 평범한 데 놀랐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편집자 헌차사자 주: 

"때로" 는 자주, 항상이라는 뜻이다. 흔히 가르치듯, "이따금, 가끔씩, 기분 내키면", 의 뜻이 아니라, "수시로, 시도 때도 없이, 무시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 해석은 학습(學習)의 습(習)자의 자석으로부터도 지지된다. 습이란 깃 우(羽)를 따르는데, 본뜻은 새가 날개를 부지런히 쳐서 비로소 날아오른다는 뜻이다. 이토록 부지런히 익혀야 비로소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매우 평범한 명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가롭고 여유로이 배짱 부리는 학습 태도라는 것은 마치도 여름철에 베짱이가 베 짜는 여인의 수고를 조롱이나 하듯 노래나 부르고 춤 추며 허송세월하다가 메마른 겨울이 닥치매 굶주리다 얼어 죽는 것을 방불한다. 이 세상에 그런 편하고 즐거운 학습이란 것은 원초적으로 존재하기 힘든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또 배울 학(學)이라 함도 역시 편안한 활동이 아니다. 글자의 자형을 보면 그 속에 회차리를 자그마치 네 개나 품고 있다. 배움이란 경건하고 진실한 자세로 스승으로부터, 내지 현대적 의미로는 커리큘럼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알아들은 내용을 자기화할 때까지 새가 날개치는 미친 듯이 연습할 때 비로소 진정한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양주동의 "배우고 때로 익히면" 이라는 번역이나, "대성현의 글의 모두로 너무나 평범하다" 는 인식이나 한마디로 수준 이하의 독해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친절하게 지적해 주는 헌차사자라는 사람은 양주동처럼 스스로 국보급이라고 떠벌이지도 않고 단지 사실을 투명하게 전달할 뿐이다. 공자가 나쁜 것이 아니라, 양주동이 같이 천박하게 경전을 읽는 거들먹거림과 잘 난 체 하는 사람들의 허세가 아시아의 종말적 문제다. 또 노장 거짓말쟁이는 소장 거짓말쟁이 흉내꾼들을 낳으니, 오늘에 와서도 크게 달라진 것 없다. 역시 나 헌차사자가 떠들고 소란을 피우듯 나무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말씀이면 공자(孔子) 아닌 소, 중학생도 넉넉히 말함직하였다. 첫 줄에서의 나의 실망(실망)은 그 밑의 정자(程子)인가의 약간 현학적(衒學的)인 주석(註釋)에 의하여 다소 그 도(度)를 완화(緩和)하였으나 논어의 허두(虛頭)가 너무나 평범하다는 인상(印象)은 오래 가시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후 배우고, 익히고, 또 무엇을 남에게 가르친다는 생활이 어느덧 2, 30년, 그 동안에 비록 대수로운 성취(成就)는 없었으나, 몸에 저리게 느껴지는 것은 다시금 평범한 그 말이 진리(眞理)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정씨(程氏)의 주(註)는 워낙 군소리요, 공자의 당초(當初) 소박(素朴)한 표현이 그대로 고마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현세(現世)와 같은 명리(名利)와 허화(虛華)의 와중(渦中)을 될 수 있는 한 초탈(超脫)하여, 하루에 단 몇 시, 몇 분이라도 오로지 진리와 구도(求道)에 고요히 침잠(沈潛)하는 여유(餘裕)를 가질 수 있음이, 부생백년(浮生百年), 더구나 현대인에게 얼마나 행복된 일인가! 하물며, 난후(亂後) 수복(收復)의 구차(苟且)한 생활 속에서 그래도 나에게 삼척 안두(三尺案頭)가 마련되어 있고, 일수(一穗)의 청등(靑燈)이 의미한 채로 빛을 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일전(日前) 어느 문생(門生)이 내 저서(著書)에 제자(題字)를 청하기로, 나는 공자의 이 평범하고도 고마운 말을 실감(實感)으로 서증(書贈)하였다. 

독서란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지설(持說)이다. 세상에는 실제적(實際的) 목적을 가진, 실리 실득(實利實得)을 위한 독서를 주장할 이가 많겠지마는 아무리 그것을 위한 독서라도, 기쁨 없이는 애초에 실효(實效)를 거둘 수 없다. 독서의 효과를 가지는 방법은 요컨대 그 즐거움을 양성(養成)함이다. 선천적(先天的)으로 그 즐거움에 민감(敏感)한 이야 그야말로 다생(多生)의 숙인(宿因)으로 다복(多福)한 사람이겠지만, 어렸을 적부터 독서에 재미를 붙여 그 습관을 잘 길러 놓은 이도, 그만 못지 않은 행복한 족속(族屬)이다. 

독서의 즐거움은 현실파(現實派)에게나 이상가(理想家)에게나, 다 공통(共通)히 발견의 기쁨에 있다. 콜럼버스적인 새로운 사실(事實)과 지식의 영역(領域)의 발견도 좋고, "하늘의 무지개를 바로 보면 내 가슴은 뛰노나." 식의 워즈워스적인 영감(靈感), 경건(敬虔)의 발견도 좋고, 더구나 나와 같이, 에머슨의 말에 따라, "천재(天才)의 작품에서 내버렸던 자아(自我)를 발견함"은 더 좋은 일이다. 요컨대, 부단(不斷)의 즐거움은  처음 '경이감(驚異感)'에서 발원(發源)되어 진리의 바다에 흘러가는 것이다. 주지(周知)하는 대로 '채프먼의 호머를 처음 보았을 때' 에서 키츠는 이미 우리의 느끼는 바를 대변(代辯)하였다. 

"그 때 나는 마치 어떤 천체(天體)의 감시자(監視者)가 
시계(視界) 안에 한 새 유성(遊星)의 헤엄침을 본 듯, 
또는 장대(壯大)한 코르테스가 독수리 같은 눈으로 
태평양(太平洋)을 응시(凝視)하고―모든 그의 부하(部下)들은 
미친 듯 놀라 피차에 바라보는 듯―
말없이 다리엔의 한 봉우리를." 

[편집자 헌차사자 주: "다리엔의 한 봉우리를" 을 "다리엔의 한 봉우리에서" 로 고쳐 읽어야 원문과 부합한다. 양주동은 키이츠 시를 읽으면서, 시상의 분위기에만 젖었지, 키이츠가 구상화하고 있는 사물 간의 질서와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때려맞추기로 읽었기 때문이 전혀 말이 안 되는 해석을 한 것이다. 꼬르떼스와 그의 부하들은 다리엔의 봉우리 위에 올라서 태평양을 내려다 본 것으로 키이츠는 쓰고 있다. 물론 키이츠의 문구도 역사를 짜기운 왜곡이었지만, 번역가는 원문의 형태까지는 아닐지라도 논리를 보존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독자에게 지는 영원한 번역가의 빚이다.]


[대조용 시 원문 삽입 : 양주동 번역과 대응하는 부분을 큰 글씨로 강조하였다.


On First Looking into Chapman's Homer
 

 Much have I travell'd in the realms of gold,
 And many goodly states and kingdoms seen;
 Round many western islands have I been
 Which bards in fealty to Apollo hold.
 Oft of one wide expanse had I been told
 That deep-browed Homer ruled as his demesne; 
 Yet did I never breathe its pure serene
 Till I heard Chapman speak out loud and bold:
 Then felt I like some watcher of the skies
 When a new planet swims into his ken;
 Or like stout Cortez when with eagle eyes
 He star'd at the Pacific — and all his men
 Look'd at each other with a wild surmise —
 Silent, upon a peak in Darien.]


혹은 이미 정평(定評)있는 고전(古典)을 읽으라, 혹은 가장 새로운 세대(世代)를 호흡(呼吸)한 신서(新書)를 더 읽으라. 각인(各人)에게는 각양(各樣)의 견해(見解)와 각자(各自)의 권설(勸說)이 있다. 전자는 가로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후자(後者)는 말한다. 

"생동(生動)하는 세대(世代)를 호흡(呼吸)하라." 

그러나 아무래도 한편으로만 기울어질 수 없는 일이요,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지식인(知識人)으로서 동서(東西)의 대표적인 고전은 필경(畢竟) 섭렵(涉獵)하여야 할 터이요, 문화인(文化人)으로서 초현대적(超現代的)인 교양(敎養)에 일보(一步)라도 낙오(落伍)될 수는 없다. 문제는 각자의 취미와 성격과 목적과 교양에 의한 비율(比率)뿐인데, 그것 역시 강요하거나 일률(一律)로 규정(規定)할 것은 못된다. 누구는 '고칠 현삼제(古七現三制)'를 취하는 버릇이 있으나, 그것도 오히려 치우친 생각이요, 중용(中庸)이 좋다고나 할까? 

다독(多讀)이냐 정독(精讀)이냐가 또한 물음의 대상(對象)이 된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는 전자의 주장이나, '박이부정(博而不精)'이 그 통폐(通弊)요,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함'이 또한 그 약점(弱點)이다. 아무튼, 독서의 목적이 '모래를 헤쳐 금을 캐어 냄'에 있다면, 필경(畢竟) '다(多)'와 '정(精)'을 겸(겸)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 역시 평범(平凡)하나마 '박이정(博而精)' 석 자를 표어(標語)로 삼아야 하겠다. '박(博)'과 '정(精)'은 차라리 변증법적(辨證法的)으로 통일되어야 할 것―아니, 우리는 양자(兩者)의 개념(槪念)을 궁극적(窮極的)으로 초극(超克)하여야 할 것이다. 송인(宋人)의 다음 시구는 면학(勉學)에 대해서도 그대로 알맞은 경계(境界)이다. 

벌판 다한 곳이 청산인데, (平蕪盡處是靑山) 
 행인은 다시 청산 밖에 있네. (行人更在靑山外) 

나는 이 글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종시(終始) 역설(力說)하여 왔거니와, 그 즐거움의 흐름은 왕양(汪洋)한 심충(深衷)의 바다에 도달(到達)하기 전에, 우선 기구(崎嶇), 간난(艱難), 칠전팔도(七顚八倒)의 괴로움의 협곡(峽谷)을 수없이 경과(經過)함을 요함이 무론(毋論)이다. 깊디 깊은 진리의 탐구(探究)나 구도적(求道的)인 독서는 말할 것도 없겠으나, 심상(尋常)한 학습(學習)에서도 서늘한 즐거움은 항시 '애씀의 땀'을 씻은 뒤에 배가(倍加)된다. 비근(卑近)한 일례(一例)로, 요새는 그래도 스승도 많고 서적(書籍)도 흔하여 면학의 초보적(初步的)인 애로(隘路)는 적으니, 학생 제군(學生諸君)은 나의 소년 시절(少年時節)보다는 덜 애쓴다고 본다. 나는 어렸을 때에 그야말로 한적(漢籍) 수백 권을 모조리 남에게 빌어다가 철야(徹夜), 종일(終日) 베껴서 읽었고, 한문(漢文)은 워낙 무사독학(無師獨學), 수학(數學)조차도 혼자 애써서 깨쳤다. 그 괴로움이 얼마나 하였을까마는, 독서 연진(硏眞)의 취미와 즐거움은 그 속에서 터득, 양성되었음을 솔직(率直)이 고백한다. 

끝으로 소화 일편(笑話一片)―내가 12, 3세 때이니, 거금(距今) 50년 전의 일이다. 영어(英語)를 독학(獨學)하는데, 그 즐거움이야말로 한문만 일과(日課)로 삼던 나에게는 칼라일의 이른바 '새로운 하늘과 땅(new heaven and earth)'이었다. 그런데 그 독학서(獨學書) 문법 설명의 '삼인칭 단수(三人稱單數)'란 말의 뜻을 나는 몰라, '독서 백편 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고언(古諺)만 믿고 밤낮 며칠을 그 항목(項目)만 자꾸 염독(念讀)하였으나, 종시 '의자현(義自見)'이 안 되어, 마침내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 눈길 30리를 걸어 읍내(邑內)에 들어가 보통 학교(普通學校) 교장을 찾아 물어 보았으나, 그분 역시 모르겠노라 한다. 다행히 젊은 신임 교원(新任敎員)에게 그 말뜻을 설명(說明) 받아 알았을 때의 그 기쁨이란! 나는 그 날, 왕복(往復) 60리의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하도 기뻐서 저녁도 안 먹고 밤새도록 책상에 마주 앉아, 적어 가지고 온 그 말뜻의 메모를 독서하였다. 가로되, 

"내가 일인칭(一人稱), 너는 이인칭(二人稱), 나와 너 외엔 우수마발(牛杏馬勃)이 다 삼인칭야(三人稱也)라."

(헌차사자 권독서편 통신 끝)

학습자를 위한 낱말 해설 있는 면학의 서 : http://www.seelotus.com/gojeon/hyeon-dae/su-pil/myen-hak-seo.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