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별별 사람이 있지만, 가장 우습고 못난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말(=한국어)에 대해서 어떤 외국인이 이런 주장을 한다고 칩시다.


“만들다라는 낱말은 외워야 하지만, 제작(製作)하다라는 낱말은 외우지 않아도 된다.

무엇을 만들다라고 말하지 않고, 무엇을 제작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휘병에 걸린 사람이다.”


“끄다라는 낱말은 외워야 하지만, 소화(消火)하다라는 낱말은 외우지 않아도 된다.

불을 끄다라고 말하지 않고, 소화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휘병에 걸린 사람이다.”


“보다라는 낱말은 외워야 하지만, 시청(視聽)하다라는 낱말은 외우지 않아도 된다.

텔레비전을 보다라고 말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시청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휘병에 걸린 사람이다.”


“제작하다, 소화하다, 시청하다 같은 낱말은 한국의 신문에서는 쓰지 않는 말이고,

외국(=한국이 아닌 나라)의 한국어 전공자들의 한국어 작문은

겉멋만 들어서 이런 어려운 어휘로 글을 쓰기 때문에

한국어 원어민(=한국인)이 쓴 한국어 글과 달라서 어색하다.”



33000 같은 단어장에 나오는 영어 단어들을

사전에만 나오고, 평생 볼 일이 없다는 주장은 위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왜 저런 주장이 나오는지 이해는 합니다.

어휘에는 능동 어휘(active vocabulary)와 수동 어휘(passive vocabulary)가 있습니다.

읽고 푸는 문제 위주의 한국의 영어 교육에서는

33000 수준의 수동 어휘는 많이 필요하지만, 능동 어휘는 거의 필요하지 않고,

그 결과 33000 수준의 어휘는 알면서도

정작 “get”, “make”, “take” 같은 기본 어휘를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능동 어휘를 늘려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수동 어휘를 줄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능동 어휘를 늘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회화 위주의 학습도 한 가지 방법이고,

유용한 표현이 쓰인 문장을 암기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고,

의식적으로 암기하려고 하지 않아도 언어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책을 여러 권 읽어서

같은 단어를 각각 다른 문맥에서 경험하여 익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위 방법들 중에서

회화 위주의 학습은 학습자의 회화 상대가 되어 줄 영어 실력자를 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고,

문장을 암기하는 것은 개인의 근성에 따라서 불가능한 경우가 많으니,

요즘은, 언어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책을 여러 권 읽는 방법이 능동 어휘를 늘리는 방법으로 유행 중입니다.

이것을 이곳 영어 갤러리에서는 이른바 다독(多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다독을 이른바 Big 3 지역의 학생들은

이르면 유치원생일 때, 보통은 초등학생일 때 이미 어느 정도 해 놓습니다.

Oxford Bookworms Library 같은 수준의 책은 이 학생들에게는 초등학생용 교재일 뿐이고,

그 결과 이 학생들은 학원에서 원어민 강사가 영어로만 진행하는 수업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 뒤로 중학생, 고등학생일 때 학원에서 22000, 33000 단어 수준의 영어를 공부하여

토익(TOEIC)이나 토플(TOEFL)이나 텝스(TEPS) 고득점을 갖춥니다.

외고를 갈 생각이 있는 학생은 이런 공인 영어 시험 성적을 중3 때 이미 갖춰 놓습니다.


그렇게 영어를 오래 공부한 학생들을

교육부와 평가원 같은 교육 당국은 대학 입시에서 그렇지 않은 학생들과 변별합니다.

이것이 수능 영어(의 만점 방지 문제)가 어려운 까닭입니다.


33000에 나오는 단어들은 사전에만 나오고 평생 볼 일이 없다고 주장한

IP가 118.41.*.*인 사람이 이곳 영어 갤러리에 쓴 글 중에서 이번 수능 영어에 대해서

EBS 문제집의 제시문을 그대로 출제한 경우가 많았다면서 쉬웠다고 말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 글을 읽고 나서 제가 돌아 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수학 문제를 낼 때, 정수론이나 미적분학 같은 대학교 수학과 전공 서적의 문제를 그대로 출제하면,

그대로 출제했으니까 쉬운 문제가 됩니까?


EBS 수능 영어 문제집의 제시문들은 대학교 전공 서적이나 논문의 글들을 발췌한 것입니다.

제시문이 대학교 전공 서적이나 논문의 일부인데

그것이 EBS에 나온 대로 또 나왔다는 것만으로

그 내용이 갑자기 쉬워질 수 있습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수능 영어 고득점은 어렵습니다. 토익(TOEIC)보다 어렵습니다. 수능 영어에서 고득점을 하려면,

중학생, 고등학생일 때 이미 공인 영어 시험 고득점을 한 학생들 수준의 영어 실력을 갖춰야 합니다.

수능 영어의 만점 방지 문제는 그 학생들 가려 낼려고 내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학생들은 중학생, 고등학생일 때 이미 22000, 33000 수준의 어휘를 익힙니다.

꼭 그 단어장을 보지 않더라도 그런 어휘가 나오는 원서를 읽어서든 영자 신문을 읽어서든 그 수준에 이릅니다.

그러니 고3이나 재수생 같은 수능 수험생이 정식으로 그 수준에 이르려면,

남은 시간이 더 짧으니 훨씬 더 많은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당연히 그것이 가능할 정도의 근성이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되므로,

대다수의 수험생들은 요행을 바랍니다.


그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노리고 생겨난 게 이른바 리딩 스킬 강의입니다.

수능 영어, 공무원 영어, 심지어 토익(TOEIC)조차도

제시문을 다 읽지 않고 빈칸의 앞뒤만 읽고 문제를 풀 수 있다고 광고합니다.

33000에 나오는 단어들은 평생 볼 일이 없다고 한

IP가 118.41.*.* 사람도 공무원 영어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공무원 영어의 경우, 제대로 읽고 풀려면 33000에 나오는 단어들을 기본으로 알아야 하니

33000에 나오는 단어들은 평생 볼 일이 없다고 한 사람에게 제대로 풀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저런 요행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이른바 리딩 스킬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하겠습니다.

독해력이라는 것은 엄연히 폭넓고 정확한 어휘와 구문 지식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것이 없이 독해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 사기꾼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현재 대한민국 영어 교육판은 이런 사기꾼들이 판칩니다.


정말로 독해를 깊이 잘 하는 사람인지는

그 사람이 가진 사전이 어떤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전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어휘에 미친 사람이야말로 독해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글은 단어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므로,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독해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번 글에서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한 기사를 보기로

과연 영자 신문에 33000 어휘가 잘 안 쓰이는지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고작 두 문단 따져 봤을 뿐인데도 33000의 어휘가 7개가 나왔습니다.

도대체 영자 신문 기사 하나만 읽어 봐도 뒤집힐 주장을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떤 분이 그 7개의 어휘 중 대부분은 수능 단어장에 나오는 어휘라고 지적했습니다.

예, 맞습니다. 그래서 더 황당한 것입니다.

33000에 나오는 단어가 33000개인 줄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33000에 나오는 단어는 5000개에서 6000개입니다. 33000개는커녕 10000개도 안 됩니다.

그나마 그 5000개에서 6000개의 단어들 중 반은 고교 영어 단어입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배운 단어 다 빼고 세면,

2000개에서 3000개 정도의 단어를 더 외우는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 IP가 220.120.*.*인 사람에게

“영갤에 어휘병 걸린애들과 말 섞지 마라 뭐든 적당히 해야지 왜 강요하는 지

아무리 봐도 졸라게 해도 잘 안 외워지니깐 졸라게 시간낭비하는 것 같아 같이 삽질해보자는 심뽀 아닌가 싶다”

라며 “어휘병”이라는 비난을 들었습니다.


33000에 나오는 단어가 정말로 “어휘병”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외워 봤자 시간낭비인 것들인지 대강 아실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33000에 나오는 단어의 우리말 대응어를 보십시오.


“colleague”라는 단어를 보기로 들겠습니다.

이 단어는 MD Vocabulary 33000에 접두어 “com-”이 활용된 단어로 나옵니다.

이 책은 이 단어의 우리말 대응어가 “동료”라고 합니다.


어느 외국인이 한국어 학습에 대해서 “동료” 같은 낱말을 외우는 것은 “어휘병”이라고 말하면,

한국어 원어민인 여러분은 동의하실 것입니까?

이게 말이 안 되면, 마찬가지로

“colleague” 같은 33000의 단어를 외우는 것이 “어휘병”이라는 주장도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www.mosit.com

저곳이 유료화가 되면서 무료였을 때 글들이 삭제됐는데

지금은 삭제되어 없는 글 중에 mosit이 22000에 대해서 설명한 글이 있습니다.


그 글에 따르면, 22000의 저자인 Herold Levine 선생님께서는 미국의 고등학교 교사셨는데

자신이 일하는 학교의 학생들의 성적이 너무 낮아서 왜 그런지를 알아 보니까

학생들의 어휘력이 너무 부족해서 책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학생들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어휘력을 확보할 수 있게 해 주려고 만든 책이 22000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가 22000의 어휘들은 미국의 중학교, 고등학교 수준의 어휘에 불과하고,

여기에 GRE 빈출 어휘까지 더해서 나온 책이 33000입니다.


그래서 MD Vocabulary 33000의 저자 문덕 선생님도

이 책의 서문에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가 막힌 사실은 이 책의 주요한 부분으로 서술되어 있는 대부분의 어휘들이

우리들에게는 어렵다고 느껴질지 모르나, 미국에서는 우리나라 중학교 수준의 어휘들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평생 “How are you?”─“I’m fine.” 수준의 영어만 쓰려는 분들께

굳이 33000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Big 3 지역 학생들은 초등학생일 때 이미 끝낸 과정을

다 큰 성인이 되어서 뒤늦게 부랴부랴 하면서

그것이 영어 공부의 전부인 줄 착각하고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영어 공부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짓은 삼가십시오.

이것이 제가 강요하고 싶은 것입니다.


지난번 글과 같은 말로 글을 마칩니다.

영어에 대해서 떠들고 싶으면 제발 영어 공부 좀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