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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드 135를 칠걸세. 자네 도움이 필요해."

밑도 끝도 없는 협력 요청. 플로리안은 적잖이 당황했다. 어이없음은 곰방대의 연기와 함께 도도히 흐르기 시작했다.

"먼저, 그리드 135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아는 만큼은 압니다. 고향이었으니."

"그래, 자네의 고향. 그리고 도저의 성지 아니겠나.

아이비스의 불 이후 수부께서 모든 활력을 잃어버리고 칩거에 들어가셨을 때.

홀로 결연히 일어나 잿더미 속에서 다시 불꽃을 찾기 시작한 남자. 진 큐비스의 본거지였지."

진 큐비스. 그 말을 듣자 플로리안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과거라는 건 언제까지고 자신을 쫓아오는 법인가. 연은 진작에 다 끊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한 가닥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아들을 내세우시기라도 할 생각이십니까?"

플로리안은 무의식적으로 날을 세워 답했다. 공장장이 이런 말을 꺼냈다면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이제 와서 과거에 휘둘리는 건 딱 질색이다.

그레이엄 공장장은 눈을 부릅뜬 플로리안을 보고 곰방대를 한번 깊게 빨아들이더니, 자욱한 연기를 내뿜고는 피식 웃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군."

"그렇다면 거ㅈ-"

"다만, 자네는 단순히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파일럿으로써 활약해주어야겠네."

그 말에 플로리안은 침묵했다.

갑작스러운 파일럿 제의. 코랄 전쟁 이후로는 한 번도 AC의 조종간을 잡은 적이 없는 사람인 걸 알면서도 말하는 공장장의 의중은 무엇인가. 935의 구출이라면 자신 이외에도 케이트나 로쿠몬센이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너무 급작스럽지 않은가.

"놀리시는 겁니까?"

3일 간의 철야로 가뜩이나 날이 서 있던 플로리안의 신경이었다. 그런 말을 듣자 안 그래도 무의식적인 날이 더 예리해졌고, 숫제 사람을 베어버릴 듯한 예기가 풍겼다.

그러자 그레이엄 공장장은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놀리고 자시고도 없네. 단순한 사실이지. 까놓고 말하겠네. 자네밖에 사람이 없어."

"....케이트나 로쿠몬센도 있지 않습니까."

"그 둘을? 그게 자사의 아키텍트로써 낼 의견인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짧은 문답 끝에 젊은이의 예기는 뭉그러졌다. 억지를 부린 것을 플로리안도 알고 있었다. 케이트나 로쿠몬센은 당분간 출격하지 못한다.

AC의 근간이 되는 조작 이론 때문이다. 예를 들어 책상의 사과를 손으로 잡는다고 해보자. 그 행위를 행할 때 모든 관절과 근육을 각각 의식해서 조작하는가?

아니다. 사과를 잡기 위해선 사과에 닿는 손가락의 위치 - 엄밀히 말해 이것도 의식하고 있진 않다 - 만 의식하면 어깨나 팔꿈치 등이 조건이 붙여진 반사신경에 의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때문에 이는 AC 조작에 있어서도 같아 조종자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지시, 조작하면 AI가 조건이 붙여진 모션 프리셋을 자동 선택하고 그 프리셋을 기반으로 상황에 응하여 실시간 수정을 행하는 구조이다.

그 탓에 모든 AC는「길들이기」가 필요하다. 사용자의 조종 습관에 맞추어 AI가 따라올 수 있도록 하는 것.

하지만 지금의 헤드 브링어나 BASHO는 마치 백지 - 헤드 브링어는 G5 이구아수용 세팅이 남아있긴 했지만, 의미가 없다 -. 그 둘에게 전혀 따라갈 수 없다.

거기에 부품마저 바꿔버렸으니 레이븐 같은 이레귤러를 제외한다면 간신히 움직이는 게 한계겠지.

하지만 여기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더는 AC에 타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단 말이다. 플로리안은 스스로의 모습이 추하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다른 용병을 고용하시면 될 것 아닙니까. 저보다도 실력 있고 그리드 135의 지리에 익숙한 용병은-"

"있겠지만 쓸 수 없지. 자사 직원이 잡혀간 초유의 사태란 말일세. 저 외성기업 놈들이야 어쩔지 모르겠지만, 기업이란 곧 가족이라는 개념의 확장일세.

그런데 그런 가족의 구성원이 납치당했는데, 자사 전력이 아닌 독립 용병에게 외주를 줘버린다? BAWS는 온 루비콘 성계의 웃음거리가 될걸세."

플로리안은 재차 침묵. 그리고 그레이엄 공장장은 이 시점에서 의아함을 느꼈다. 본직이 아키텍트이니만큼 반대가 있을 거라곤 생각했다. 하지만 강화인간 C3-935와 관련된 일이니만큼 결국에는 받아들일 거라 판단했다.

적어도 사원 평가에 따르면 꽤 아끼는 것처럼 보였으니. 그렇다면, 별개의 요인이 그를 막고 있는 것인가. 물어볼 필요는 충분했다. 그레이엄 공장장은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나도 자네가 자네 아버지만큼 하길 기대하는 건 아니라네. 너무 부담가질 필-"

반응은 급정색. 형식적으로나마 미소를 띠고 있던 플로리안의 안면에 일말의 웃음기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역시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뒤로 돌아 나간 것이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 그레이엄 공장장은 한동안 황망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공장장실에서 나온 플로리안은 C4번 행거의 개러지로 돌아와 예의 철골 더미에 도로 앉아있었다. 뻑뻑 피워대고 있는 건 당연히 담배. 그것도 이번에는 코랄이 섞여 있는 건지 연기에 붉은색이 만연했다.

자네 아버지만큼 하길 기대하지 않는다니. 헤드 브링어는 이미 다른 개러지로 옮겨져 행거의 BASHO가 검은색으로 도색되는 모습을 일부러 초점을 흐린 눈으로 쳐다보던 플로리안은 한숨을 담배 연기와 함께 내뿜었다.

"이놈아. 그 사달을 내놓고 여기서 담배나 뻑뻑 펴대고 있냐?"

짝! 포토맥이 맵기 그지없는 손바닥으로 플로리안의 등짝을 후려치기 전까진. 평소라면 아프다며 악악거렸을 그였지만 코랄의 약효가 조금 돌았는지 흐릿한 동공으로 포토맥을 바라보며 입을 열 뿐이었다.

"....안 그래도 935 건으로 심란한 와중에 그 양반 입에서 아버지 얘기가 나왔는데 어떻게 참습니까."

안 그래도 잿더미 속에서 다시 불꽃을 찾기 시작한 남자라던가 할 때부터 기분은 그닥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만큼 하는 건 기대도 안 해? 그건 선을 넘었다.

플로리안은 다 타들어 간 담배를 내버리고 밟아 끈 뒤. 입을 다물었다.

무슨 사춘기 고등학생도 아니고, 이마의 땀을 장갑 낀 손으로 슥 닦은 포토맥은 한숨을 푹 쉰 뒤. 호주머니에서 힙플라스크를 따서 건네주며 말했다.

"....일단 이거부터 마시고 말해라. 맨정신으로 할 대화가 아닌 것 같다."

"뭡니까? 이거."

플로리안은 힙플라스크를 받아들고 내용물을 기웃거리며 봤다. 알코올 향이 느껴지는 걸 보니 술 같아 보이긴 하지만, 무색투명하긴 커녕 갈색을 띠고 있었다.

"위스키."

"위스키?"

"그래 이 화상아. 쓰레기 같은 루비코니언 보드카나 보리 함유율 0% 맥주랑 다르게 발람 경제권에서 만든 진짜 술이다. 어지간해선 안 따는 귀한 거니까 후딱 마시고 넘겨!"

쓰레기라고 할 것까지야 있나. 플로리안은 중얼거리고는 한 모금을 넘긴 뒤. 포토맥 반장에게 돌려주었다. 도수 자체는 보드카보다 낮은 것 같지만 독특한 향과 맛이 난다. 아마 이게 진짜 술의 맛이라던가 하는 것이겠지.

플로리안이 그리 생각하는 사이. 포토맥 반장은 꿀꺽꿀꺽 위스키를 넘기고는 술 냄새를 풍기며 말을 걸었다.

"좋아, 술도 들어갔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해봐라. 이게 예전에 이구아수 놈이 월벽에서 볼타가 죽고 멘탈 나갔을 때 미시간 총대장께서 쓰셨던 방법이다."

"....그 인간 탈영했다고 하시지 않-"

"갈!!"

포토맥 반장의 기합 넘치는 포효에 플로리안은 조금 움찔했고, 이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은 누구에게 말해보고 싶었다. 회식 술자리에서 한두 줄 꺼낸 적은 있어도 전부를 꺼낸 적은 한 번도 없던 이야기를.

"....아버지가 엄청 유명한 도저였다는 건 전에 얘기했었죠?"

"그래, 진 큐비스. 아이비스의 불 직후부터 활동하기 시작해 도저 집단을 이끌고 그리드 135의 재건을 주도한 걸물. AC도 엄청나게 잘 몰았음. 더 있냐?"

"더 있으니까 제가 말을 꺼내겠죠. 아무튼, 그런 양반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아버지 얼굴은 한 번도 본 적 없이 어머니들 밑에서 형제자매들하고 5살 때부터 MT 만지작거리고 AC 코어를 놀이터 삼아 자랐다 이 말입니다."

"니미, 일부다처제. 그래서."

"성장 환경이 그렇고, 아버지라는 인간은 맨날 AC 타고 싸돌아다녀서 도통 보이진 않는데 아는 삼촌들은 너희 아버지 대단한 사람이라며 아주 그냥 큐비스 전기를 읊어대고,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동경을 품게 되었죠."

"엥. 안 보이는데 어떻게 동경을 품어?"

"....뭐라고 비유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요즘 애들이 레이븐 좋아하는 거랑 비슷해요. 실체는 모르지만, 모두가 대단하다고 하고, 멋져 보이잖아요."

"과연, 목성전사 미시간 코믹스 같은 거냐. 레드가 좋아했지."

"하여간 그러다가.... 지금 워치포인트 알파 부근을 탐사하러 가신 아버지가 결국 돌아오시지 못했죠.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아이비스 시리즈에게 당한 것 같은데.

아무튼. 그때를 기점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죠.「헛말만 가득하다가 가버린 아버지는 내가 넘어주겠다」라고. 그래서 여동생에게 부탁해서 아버지의 불꽃을 손을 잡는 엠블럼도 그린 거고요."

"정말이지 꼬맹이나 할 법한 생각이군."

"그때 딱 사춘기 즈음이었으니까요. 꿈이 깨지는 것도 그 즈음이었지만요. 큼."

포토맥 반장이 다시 힙플라스크를 건네주었고, 플로리안은 목을 축인 뒤. 말을 이어나갔다.

"도저끼리는 쌈박질이 일상 아니덥니까. 그날도 일과 같은 느낌으로 옆 그리드에서 쳐들어온 놈들을 격퇴했죠. 생각보다 싱거워서 금방 복귀하겠다 싶었는데.... 저희 집이 불타고 있더라고요."

"....사원 기숙사 입주 신청할 때 왜「돌아갈 곳이 없음」이라고 썼나 싶었는데. 쯧."

"급히 AC를 몰아서 가보긴 했는데. 생존자는 없음. 집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개러지에 가득하던 AC나 MT도 하나 남겨진 것 없이 텅텅.

처음에는 공포보단 황당함이 앞섰죠. 그리고 드는 건 무력감. 마지막으로 드는 건「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지 않았었을까.」라는 생각.

그 뒤로는.... 막 울면서 도망쳤죠. 어찌어찌 AC는 타고 있어서 배는 곯지 않았지만. 딱 거기까지.

그러던 도중에 해방 전선이 봉쇄 기구 상대로 자원 독립하고 행성자결주의인가 뭔가를 내걸면서 발족했고, 한 가지 생각이 든 거죠."

"저기 들어가면 나 같은 병신이라도 뭐라도 할 수 있겠다. 안 봐도 뻔하군.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예, 그겁니다. 그래서.... 해방전선에 전사로 투신했고. 거기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하늘이 불타던 날의 봉기에도 참전했습니다. 가족은 지키지 못했어도. 이번에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별만은 지켜보이겠다고."

"....그 때는 개판이었지. AC라곤 레드 녀석 것 하나밖에 없는데 아르카부스 놈들은 악착같이 저항하고...."

"....계속 해도 됩니까?"

문득 떠오른 기억을 읊으려던 포토맥은 플로리안의 시선을 느끼고 일단 입을 닫았다. 그래, 이 금쪽이 말을 들어주러 왔지 옛 일 풀자고 온 게 아니니까.

"하지만, 그것도 닿을 수 없는 꿈이라는 걸 얼마 안 가서 깨달았습니다. 유독 아르카부스의 저항이 심했던데다 베스퍼 부대장도 있던 전선이어서 말이죠. 저 빼고 다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드는 생각이 또 있으셨다?"

"예, 결국 AC를 탄 나랑 엮이는 사람은 다 죽고 마는구나. 그래서 아예 아키텍트로 전직해서 BAWS에 취직한 거고, 다시 AC는 타지 않기로 한 거죠."

그 말을 듣자 포토맥 반장은 주머니에서 미시간 담배를 꺼냈다. 입에 물고 지포로 불을 붙였다. 매캐한 니코틴 연기가 풍기고, 포토맥 반장은 플로리안을 마주 보았다.

"....그러니까, 네가 AC를 타게 되면 사람이 다 죽어버리고. AC를 타고 꼬맹이를 구출하게 된다면 꼬맹이도 죽어버리는 게 문제라는 건데...."

쓰으읍. 후우.

"까놓고 말해 미신 아니더냐?"

"말하는 코랄도 3년 전만 해도 미신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런 리스크도 감수하기 싫은 사람이. 있는 법이라고요. 대머리는 모르겠지만."

"이놈의 자식이. 그런 걸 알면서 걔가 너 좋아하던 건 왜 넘기고 자빠졌어?"

듣다가 울려퍼진 포토맥의 술 냄새 풍기는 노호성. 플로리안은 깜짝 놀라 얼떨떨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 그건 남매 관계적으로 좋.... 아니, 예, 뭐. 맞는데요. ....진짜 이 이상으로 소중한 사람이 되면 이렇게 잃어버렸을 때 감당을 못할 거 같아서요."

가족이 죽었을 때도. 해방전선의 동료들이 죽었을 때도. 마음은 산산이 부서져 껍데기만 남았었다. 그런데 이제 간신히 다시 채워진 마음을 부수고 싶지 않다. 플로리안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뽑았다.

포토맥 반장이 그걸 낚아챘다.

"어휴, 이 등신이. 아직 잃지도 않았는데 뭘 멋대로 꼬맹일 죽이고 자빠졌냐?"

"그래도, 그러다가 진짜 죽으면 어쩝니까! 저는-"

"야."

다 타들어 간 미시간 담배를 들고 뺏은 담배를 맞붙여 한번에 두 개비를 피운다.

"네 AC의 이름. 파이어스타터 아니냐. 그럼 불을 붙여. 타고 남은 모든 것에. 잿더미로 가득한 마음을 끌어모아 봤자 뭣도 되지 않아.

꼬맹이가 정말 소중하다면 말이다. 여기서 전전긍긍하지 말고 직접 찾아가서 물어봐라. 아직 만들지도 않은 잿더미를 걱정하기 전에!"

플로리안은 그 말에 한동안 침묵했고.

"....시말서부터 쓰러 가겠습니다."

결심했다.






한편, 그리드 135의 포로수용실.

노인의 웃음이 꺽꺽대는 소리와 함께 겨우 잦아드는 가운데, 창살 안 소녀의 표정은 한겨울보다 차갑게 식어 있었다. 노인은 935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기를 머금은 입을 다시 놀렸다.

"그래. 거꾸로 물어보겠는데, 니년은 뭐 바라는 일이 있냐? 구세대형이라 사적인 욕구는 없단 개소리는 하지 말고."

935가 반사적으로 떠올린 대답은 노인의 말에 흩어졌다. 느껴지는 묘한 압력과 포로 처지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기에, 소녀는 대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되돌아봤다.

도저 소굴의 한복판이 자기 성찰에 좋은 장소는 아니었지만. 935는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붉은 입술이 무심결에 그 이름을 흘렸다.

"....아키텍트."

"그게 누군데. 네 주인이냐?"

소녀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935 자신은 몰라도 그녀에게 쥐여진 질문은 이름 하나로 만족할 수 없었기에. 노인은 재차 질문했다.

"오렌지 MT에 있던 머저리? 그놈이 왜. 반하기라도 했냐?"

"아닙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저 하얀 뺨을 물들인 선명한 홍조는 뭐란 말인가. 무표정이 새겨진 예쁜 얼굴 위로 나타난 연정을 한심히 바라보며, 노인은 935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저는, 쭉 아키텍트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아키텍트의 곁에서, 아키텍트의 온기에서 떨어지지 않고 싶습니다. 언제까지나. 저는...."

935의 목소리가 멈췄다. 떠오르는 욕구를 아무리 말해봐도,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졌단 생각만이 들었다. 소중한 것. 있어야만 하는 것. 그녀 자신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

생각을 거듭한 끝에, 소녀는 답을 떠올렸다. 당사자가 들었다면 그 갸륵함이 곤란해 쓴웃음을 흘렸을 답을.

"....저는, 아키텍트가 행복하길 바랍니다."

소녀와 노인의 입장이 뒤바뀌었다. 이번엔 소녀가 차게 식은 눈을 마주 봐야 할 차례가 된 것이었다. 소녀의 헛기침이 불편한 침묵을 애써 메우고, 노인이 괜히 물어봤다는 후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 음. 그래. 거창한 목표 잘 들었다. 그런데 그 눈물겨운 소원은 어떻게 이룰 생각이냐? 그 떨거지가 네가 있으면 행복하다고 말하기라도 했냐?"

"....잘 모르겠습니다."

노인의 만면이 비웃음을 띄었다. 935의 입장에선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노망난 노인에게 한심한 시선을 받는 것은, 뭐라 설명하지 못할 자괴감을 소녀에게 불러일으켰기에.

좁은 옥중에 들어찬 조소가 가라앉을 무렵. 노인은 그제야 소녀를 찾아왔던 용건을 의중에서 퍼올렸다. 노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조금 전의 눈보다 훨씬 차갑게.

"니년, 대가리에 코랄 박아넣은 지 50년은 됐지? 눈깔이 대놓고 기술연구소에서 만들었다고 광고하는구만."

935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의 말대로, 파란 눈에 섞인 코랄의 붉은색은 그녀의 원산지 표시나 마찬가지였으니. 대답하지 않는 소녀를 보며 노인은 혼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히 말을 고르듯, 혹은 깊이 묻어놓은 옛 기억을 파헤치듯. 노인의 입술은 잠시 침묵 속에서 홀로 달싹였다. 그리고 열렸다. 얼핏 보인 깊은 이성과 함께.

"너는 50년 전에 만든 캔버스다. 그림이 되지 못한 채, 새하얗게 남겨진."

선고처럼 내려진 단정. 935는 침묵했다. 소녀는 노인의 비유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유품처럼 남은 그의 이성은 반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언젠가 네게도 모든 게 끝나는 날은 올 거다. 누군가의 패배와 죽음 위에 서 있으면 그리 되는 법이지.

하지만 네년에게도 바라는 욕망이 있으니. 그 꼴이 나기 전까진 네년도 캔버스에 뜻대로 붓을 놀릴 거다. 너는 붓을 드는 법을 모른다 했지만. 살아있는 이상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같은 50년 전의 골동품으로서. 나도 네 그림에 남기고 싶은 물감이 있거든."

"....무슨 뜻입니까?"

결국 935는 반문을 참지 못했다. 순전히 자기가 지껄이고 싶은 말인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남을 갖고 하는 이야기면 앞에서 듣는 당사자라도 알아먹게 말해야 하지 않는가.

노인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빈 캔버스 어쩌고 하는 말이 대가리까지 텅 비었단 뜻은 아니었는데. 노인은 기껏 다듬은 표현들을 억지로 풀어헤치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저 이해력 부족한 소녀를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자. 이 똥멍청이 아가씨야. 니년이 니년한테 없다 싶은 게 뭐냐?"

"....생각, 말씀입니까?"

바보 소리를 듣다 너무 눈치를 보게 탓일까. 드디어 스스로를 돌대가리라 믿게 된 소녀를 보며, 노인은 아파오는 관자놀이를 양쪽 엄지로 꾹 눌렀다. 깊디 깊은 한숨과 함께 노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생각, 지능, 사고력. 그 외에도 저능아 판정을 피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게 없긴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건「감정」이다.

강화인간이라서. 전투용으로 만져진 뇌라서 태어나길 감정이 희박할 순 있겠지.

하지만 지금의 네년에겐 감정이라고 부를 게 분명히 있다. 그것도 니년이 명확히 인지하고, 평생에 바라는 게 그따위일 만큼 단단히 자리를 잡았지 않냐.

그런데, 니년은. 감정을 모르던 관성에 안주해서 네년의 인생을 그릴 재료도 못 찾고 있단 말이다. 손에 멀뚱히 붓만 든 채로."

935의 입이 꼭 다물어졌다. 감정이야말로 인생의 재료이며, 본질이라는 노인의 말은 소녀에게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손에 USB 하나를 쥔 채.

"이게 그 좆같은 불이 터지기 전의 나를 그린 물감이다. 압수한 단말은 오늘 중으로 돌려줄 테니까, 안에 든 거나 듣고 있어라."

935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열변을 이해하지 못해 반문을 던지려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말을 약간이나마 이해했기에 할 말이 있었다.

"....어째서, 이걸 제게?"

"피차「개새끼의 불」 뒤로 이 좆같은 세상에 던져진 종자니까. 머리도 감성도 텅 빈 니년이라면, 그 불 이전의 나를 조금이라도 남길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거든."

"당신의 부하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 병신들은 결국 50년 후의 인간들이야. 너나 나랑은 결이 다른 놈들이다. 뭣보다 그놈들은 이런 이야기를 이해할 정도의 지성도 없어."

소녀는 손에 쥐인 USB를 들여다봤다. 주인의 인생을 보여주듯, 흙먼지와 상처로 뒤덮인 검은 물감을.

935가 뭐라 대답을 돌려주려 고개를 들었을 때. 철창 너머의 노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의 마음에
손가락을 넣기란
어려운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