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다시 이명이다. 코랄을 이용한 강화 수술로 인한 영향은 구세대 강화 인간의 저주라고도, 전유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레이븐, 오늘은 거점을 옮기는 날이었지요. 데이터는 천천히 옮기고 있습니다. 슬슬 일어나주세요.」
그의 경우는 가장 특이한 케이스라고 해야겠다. 많은 이들, 특히 도저같이 코랄을 환각제로써 복용하는 이들이 그들의 음성을 듣곤 했으나, 그 코랄 군집이 모여 만들어진 인격체 수준의 지성, 그리고 그것과 교신한 강화 인간 C4-621은 단 한 명을 제외한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진실에 아무도 모르게 도달한 것이다.
「…레이븐?」
강화 인간 621은 원체 말수가 적었다. 그의 의사는 오로지 그의 몸이나 다름없는 AC에 탑승했을 때에만 표출되었다. 행동이 곧 말인 셈이다.
〈강화 인간 C4-621. AC 조종 시퀀스로 이행.〉
이 이야기는 자일렘 추락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신더 칼라와 핸들러 월터의 죽음, 루비코니언의 봉기… 격전의 한 때는 이젠 하룻밤과도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벌써 벨리우스 지방의 1/3은 모두 돌아본 것 같네요. 저로선 해방 전선에 합류하지 않는다는 판단이 의문입니다만… 당신의 결정이니까요.」
루비콘 해방전선. 이 군벌, 아니 이젠 자치정부의 규모를 가진 이 세력이 자일렘 격추 이후 루비콘 3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세력권으로 발돋움했음은 명백하다. 행성 봉쇄 기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독립 용병 레이븐’에게 농락당한 형태가 됐고, 기업 측도 공멸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으며, 아직
까지도 노출되지 않은 비밀 결사 역시 구성원의 전멸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다만 이곳의 투쟁이 마침표를 찍은 것은 아니다. 해방 전선의 대들보와 같던 러스티의 실종(주변 해역에서 그의 AC 잔해가 발견됨으로써 세력을 불문하고 사망했다고 여겨진다.), 그들을 이끌어낸 독립 용병 레이븐의 행방불명은 격전 이후 해방 전선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잔당 세력은 잔당 세력대로, 특히 베스퍼의 '프로이트’가 건재하여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며
효과적으로 농성을 벌이고 있음은 아직 큰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런 위태한 형국에 621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를 택했다. 자유를 갈망하던 루비코니언들과 합류하지도, 핸들러의 말대로 재수술을 받고 바닥을 뜬다는 선택도 어
느 하나 고르지 못했다.
「이미 충분히 선택했다…는 건가요. 이곳에서 당신이 겪은 일은 곧 제가 겪은 일. 그 심정은 이해합니다. 마침 이곳의 상황도 일종의 교착 상태에 빠진 듯합니다. 이렇게 떠돌며 휴식을 취하다가 결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요.」
AC는 홀로 타고 남아 뿌연 하늘을 걷고, 질주하고, 또 날아오른다. 이전의 도장은 벗겨지고 녹슬어, 외장도 이곳저곳 손상된 탓에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수준
에 이르렀다. 그가 이 행성을 뜨지 않는 이유. 아직 행성 봉쇄 기구의 봉쇄가 유효한 탓도 있겠지만 혼자 남지 않았음도 있을 것이다.
그의 적, 주인, 협력자, 전우. 모두 죽어버렸거나 목적에 따라 직접 죽여버렸다. 몸도, 또 언제 생겼는지 모를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땅에 떨어져 버렸다. 그럼에도 코랄을, 루비코니언을 믿고 지켜냈기에 아직 그는 대지에 서있다. 또한 그가 지켜낸 것들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레이븐’은 의지의 표상. 그 이름에 어울리는 것은 선택하고 싸우는 자뿐입니다.〕
전에 이 이름을 쓰던 용병의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 에어는 이 이름이 가짜임을 안 뒤에도 621을 이렇게 불렀다. 강화인간으로써의 단순한 숫자보다는 의미 있다고 생
각했기 때문일까.
「레이븐…? 전방에 교전이 포착됐습니다. 확인해 보죠.」
생각에 잠겨 나아가던 사이 저 멀리서 포격 소리와 총성이 들려오는 것이 에어에 의해 인식됐다. 최근엔 이렇게 멍하게 생각하기만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시스템: 정밀 스캔모드〉
화면을 돌려 초장거리에서 정보를 수집한다. 소규모 국지전이다. 그는 교전 방향에서 완전히 측면에 서있는 듯하다. 교전 중인 단체는 보나 마나 기업과 해방 전선이
겠지.
「레드 건 잔당과 해방 전선이군요.…돕기도 우회하기도 힘든 상황이네요. 이쪽은 물자를 수송 중인데…」
돕는다는 건 당연히 해방 전선을 얘기하는 거겠지. 621은 속으로 떠올렸다. 그들은 인간이고 에어는 코랄 정신체임에도 그녀는 루비콘 초기 이주민인 그들에게서 일종의 동족 의식을 느끼는 듯하다.
이러나저러나 무언가를 해야 함은 명백하다. 또다시 결단의 시간이다. 천천히 조종간에 손을 얹는다.
루비콘의 해방자 이후 얘기를 그리고 있음
아직 미완이긴 한데 열심히 써볼께
선추 후감상 - dc App
문학은 개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