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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감옥은 사색과 문화생활에 좋은 장소일지도 모른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고개를 까딱이던 935는 그리 생각했다. 옥중의 딱딱한 침대라도 팔자 좋게 널브러져 있는 건 좋은 수형자의 태도는 아니겠지만. 소녀는 개의치 않았다.

듣던 곡이 막바지에 가까워지고, 935는 이어폰을 뽑으며 10번은 족히 들었을 앨범을 멈췄다. 다가오는 발소리와 고파오는 배가 식사 시간을 알렸다. 소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복도에서 다가오는 냄새가 낯설었다. 그저 데웠을 뿐인 보존식의 냄새가 아닌, 제대로 식욕을 돋우는 식사의 예감. 그 기대감에 935가 갈겐벡이 사식이라도 넣은 것인지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철창 너머로 익숙한 금발의 여성이 모습을 비추었다.

"오랜만이네. 여동생 양."

들려온 목소리에 935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
.
.



창살의 문이 열리고, 앨리스가 음식 카트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불과 며칠 전에 맛있게 먹은 메뉴였건만 935의 식욕은 이미 싹 달아나 있었다.

정작, 그 원흉은 935의 굳은 얼굴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왜 그래? 아, 혹시 딴 거 먹고 싶었어?"

"....그게 아닙니다. 당신이,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겁니까?"

앨리스는 입을 다물고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질문이 어려워서는 아니었다. 그보단, 어린애에게 들려줄 말을 고르는 듯한 모습. 935는 더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당신은, 아키텍트의 친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장이라도 앨리스의 멱살을 붙잡을 듯, 935가 침대에서 일어나 한 걸음 다가섰지만. 앨리스는 그저 곤란하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자기소개를 대충 한 건 잘못이긴 한데, 그래도 그렇게까지 열 내진 말아줄래? 우리가 너한테 크게 해코지한 것도 없잖아."

"제 얘기가 아닙니다...! 당신들 때문에 아키텍트가 어떻게 될 뻔했는지, 알잖습니까!"

불쾌한 주제를 꺼낸 것인지 앨리스의 눈쌀이 찌푸려졌다. 뒤이어 경고하듯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애써 대답을 짜냈다.

"....나도 알아. 그래서 달링한테 출근하지 말라는 말도 했고. 달링이 그런 사지에 자기 몸을 내던질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러고도 당신이 아키텍트의 친구입니까! 되도 않는 애칭으로 부르기 전에, 아키텍트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그런 헛소리는-"

"그 입 닥쳐!"

날카로운 노성이 935의 목소리를 끊었다. 하지만 소녀의 말에 담겼던 분노는 여전히 앨리스를 노려보는 파란 눈에 비치고 있었다.

앨리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식어가고 있을 식사 따위는 관심에서 깔끔히 지워질 만큼. 그리고 그 눈에 담긴 격정이 옮아버릴 만큼.

앨리스가 입을 열었다. 아까와 같은 감정 그대로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속에 애써 눌러담은 분노는, 결코 그보다 가볍지 않았다.

"....그래. 달링에게 너희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건 내가 착각했을지도 몰라. 달링이 자기 목숨까지 건다는 건 상상도 못했으니까. 이걸 내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그렇다면...!"

"하지만 달링이 털끝 하나 다치기라도 했어? 아니잖아. 사소한 실수는 있었지만, BAWS와의 협상을 잘 마무리하면 달링을 다시 만나서 우리 쪽으로 오도록 설득할 여지는 충분히 있어. 달링도 전직 도저니까."

935는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이젠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키텍트에겐 2공창의 사람들이 정말 소중하다는 걸. 이제 와서 당신이 어떻게 말해도, 아키텍트가 모두를 버릴 리가 없습니다."

"역시, 아직 뭘 모르는 어린애네. 여동생 양. 사람은 소중한 걸 얼마든지 늘릴 수 있고, 그 우선순위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어."

"다른 사람이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키텍트는...."

"다르다고?"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앨리스도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어쨌든 플로리안이 갈대처럼 간단히 휩쓸릴 남자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앨리스가 말문을 닫아버린 사이. 935가 다시 입을 열었다. 플로리안을 마음에 품고, 노인이 말했던 욕망을 그 속에 담아서.

"무엇보다. 저는 당신 같은 사람에게 아키텍트를 양보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키텍트의 주변은 무시하고, 아키텍트의 행복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사랑한다는 이유로 무책임을 강요하는, 당신 같은 사람은."

앨리스는 생각을 고르듯 눈을 깜빡였다. 935도 더 입을 열지 않았기에, 둘 사이에 느닷없이 내려앉은 정적은 잔잔한 수면처럼 그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수면에 던져지는 돌처럼. 앨리스의 짧은 한숨이 그 정적에 파문을 일으켰다.

"귀여운 시누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호랑이 새끼였구나, 너."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긴. 무서운 연적이 달라붙은 남자를 건드려버렸단 소리지."

"연적이라니. 제가 아키텍트께 그런 마음이라도 품은 듯이 말하면...."

"이제 와서 부정하기엔 할 말이 궁색할 텐데."

"....."

소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불리한 대화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준비를 위해서.

"....제가 아키텍트께 사랑을 갖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께 같은 마음을 바라기엔 너무 부족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소녀가 댈 이유는 차고 넘쳤다. 자신은 50년 전에 뇌가 만져진 강화인간이고, 플로리안의 연인이 되기엔 최소한의 상식도 없으며, 플로리안의 생각을 오해해 그를 힘들게 만든 일도 많다...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은 935 자신에게조차 어딘가 핑계처럼 느껴졌다. 잡동사니 같은 변명들로 파묻기엔 불안을 머금은 본심이 지나치게 큰 탓이었다.

결국, 소녀는 지리멸렬한 말 대신 그 본심을 꺼냈다.

"....제게, 아키텍트를 행복하게 만들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앨리스는 어이가 없었다. 다소 딱딱한 태도는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겠지만, 소녀의 얼굴이며 몸은 온갖 성계에서 미인들만 골라내 엄선한 저 다펑냥냥에도 밀리지 않았다.

그런데 남자를 행복하게 만들 자신이 없다고? 앨리스의 입장에서 소녀의 말은 그저 자존감 부족의 발로였다.

"또 왜. 감정을 몰라서 연인이 되기엔 부족하단 말을 꺼낼 거면-"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앨리스. 제 몸은 기술연구소에서 전투만을 위해 조정되었습니다. 컨디션에 악영향을 끼칠 신체의 생리현상도, 제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앨리스가 그 말뜻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경악이 앨리스의 표정에 나타나자, 935는 깊은 음영이 드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설령 제가 아키텍트와 맺어진다고 해도, 저는 그 결실을 아키텍트께 드릴 수 없습니다."

옥중에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조금 전보다 훨씬 무겁게. 935는 침대에 털썩 앉았지만, 침묵을 깨고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뭔가 말을 꺼내기엔 깊은 자조가 935의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런 결함투성이인 몸으로 잘도 그에게 사랑 같은 감정을 품었다고. 마음에 더해 몸조차 고장난 주제에 그런 행복을 입에 담아버렸다고.

그런 자기혐오로 935는 바쁜 사이. 앨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안된 일이네. 생각 없이 말을 꺼낸 건 사과할게. 그래도, 이해가 가질 않는 게 하나 있는데."

"무엇입니까?"

"너. 달링한테 그 얘기 한 적 있어?"

935는 황당한 얼굴로 앨리스를 마주 봤다. 이 여자는 미쳤다고 자신이 아키텍트에게 「저는 불임입니다」 같은 소리를 했을 거라 생각한 건가.

그런 마음을 담아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앨리스가 소녀의 말문을 닫았다.

"플로리안이, 네가 애를 가지지 못하면 사귈 수 없다고 말이나 했어? 너랑 결혼하면 행복하지 못할 거라 말하기라도 했냐고."

"그런 적은...."

"없잖아. 그런데 왜 벌써부터 겁을 내고 앉았어? 이 바보 공주님."

소녀의 시선이 황망히 흔들렸다. 그 귀여운 모습에 앨리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되새겼다. 자신이나 갈겐벡과 달리 때 묻지 않은 아가씨라고.

"나처럼 달링에 대해 미리 속단하진 마. 우리가 반한 그이는 고작 그런 걸로 널 밀어낼 만큼 한심한 남자가 아니니까."

앨리스가 한 마디 덧붙인 다음에야 소녀의 파란 눈은 눈앞의 여자를 향할 수 있었다. 어쭙잖은 항의나 반론을 꺼내는 대신, 935는 앨리스에 대해 찬찬히 생각했다.

앨리스는 도저였다. 갈겐벡이 말했던 대로, 매일의 삶이 풍전등화와도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BAWS를 습격하며 특정한 한 사람만을 비켜 보호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앨리스가 갈겐벡의 지위에 있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고작해야 파일럿. 현장에서 싸워야 하는 병사다. 그런 병사 하나가 반한 남자 하나를 위해 모든 도저의 사활이 걸린 임무를 내팽겨친다?

그건 너무도 무책임한 일이 될 것이다. 인식이 덜 성숙한 소녀로선 미처 짐작하지 못했을 만큼. 앨리스는 플로리안을 사랑했지만, 그 이전에 어른이었던 셈이다.

플로리안에게 했다는 경고도 직접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앨리스로선 그저 조심히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전전긍긍하는 수밖에 없었겠지.

생각을 다시 935가 입을 열 때, 그 목소리는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플로리안을 배신한 것에 대한 반감은 아직 남았지만. 딴마음 없는 앨리스의 조언과 그녀에 대한 이해가 처음의 반감을 사그라트린 덕이었다.

"...충고 감사합니다."

"됐어. 나도 보험이 필요해서 말한 거야."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소녀는 멀뚱히 앨리스를 올려다봤다. 픽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앨리스는 그 시선에 대답했다.

"우리 쪽하고 달링이 잘 안되기라도 하면, 달링 옆에 있어줄 여자가 필요하니까. 네가 건방진 소리를 하길래 달링 걱정을 해봤을 뿐이야."

"....저라고 당신의 보험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935의 목소리에서 불만이 뚝뚝 떨어졌다. 조금 전의 격정과 표독함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노인이 말했던 그녀 자신의 욕심은 뚜렷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밖에서 보기엔 그저 귀엽게 토라진 모습. 앨리스는 그만 헛웃음을 터뜨렸고, 대답으로 소녀가 한마디 쏘아붙이려 한 순간.

저 멀리. 폭발과 함께 플랫폼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때리는 경보음에, 935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낯익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번에는 때리는 쪽과 맞는 쪽이 뒤바뀐 듯했지만.

"BAWS입니까?"

"아마도. AC가... 4개 소대라고? 단단히 작정하고 쳐들어왔네."

태블릿형 단말을 들여다보던 앨리스가 황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상처투성이의 손가락이 초조하게 단말의 커버를 두드리다, 이내 멈췄다.

"이러면 글렀네. 공주님, 받아."

그녀는 작은 카드키를 품에서 꺼내 935에게 건넸다. 그걸 받아든 935의 눈에 표면의 「격납고」라벨이 들어왔다.

"...이걸 어째서 제게?"

"공주님이 왕자님한테 가는데 마차는 있어야지. 안 그래?"

그리 말하며 앨리스는 935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었다. 소녀를 향해 뻗은 그 손은 가늘게 떨렸지만, 935는 구태여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죽을 생각입니까?"

"그렇게 안 되게 노력은 할 건데. 아마 잘 되진 않겠지."

935는 그녀를 말릴 말을 꺼내지 못했다. 괴팍한 노인이 말했던 것처럼, 그나 앨리스나 도저인 이상 여기서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걸 알았으니.

하지만 시선에는 걱정을 숨기지 못해서 그대로 보였는지. 태블릿에서 고개를 들어 935를 마주 보던 앨리스는 애써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시간이 별로 없는 건 알잖아? 그렇게 넋 놓고 있다간 나 도망가서 달링 채 간다?"

935는 생각했다. 앨리스에게도 여태 그려온 캔버스가 있을 것이라고. 그 캔버스를 위해 생명도, 플로리안에 대한 마음도 한구석에 묻은 채 싸우려는 것이라고.

소녀는 눈물을 속에 숨긴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남겼다. 내일을 살기 위해 오늘 죽어야 할 두 도저를 위한 전별처럼.

"...감사했습니다. 갈겐벡에게도, 똑같이 전해주십시오."

"그래. 기회가 되면."

소녀는 앨리스가 준 열쇠와 함께 방을 나섰다. 앨리스를 뒤에 남겨둔 채 내딛는 발걸음은 무거웠고, 그들이 틀림없이 죽으리란 예감에 소녀의 눈앞은 빗방울을 머금은 듯 흐려왔다.

그럼에도 935가 제 연적을 뒤돌아볼 틈은 없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폭발음, 비명, 쇠가 쇠를 긁어내 만드는 쌍방의 비명소리. 935는 그 모두를 뒤로하고 격납고를 향해 달렸다.

캔버스에 붓을 휘두르기 위해서.







루비콘 감기 탓에 오래 걸렸다

시발 버딕 돌려야 했는데

세력전 좀 돌리다가 글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