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이븐이 된 이유를 묻는 자들이 있다.
시작은 별 거 없었다. 단순히 힘이 필요했다.
레이븐이 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악착같이 의뢰를 받고, 악착같이 모은 크레딧으로 AC의 장비를 바꿔왔다.
"......"
이제는 그 초기장비의 원형마저 남지 않은 AC만이 개러지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도 모자라다고 생각했다.
///
아레나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레이븐이 되고, AC까지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아레나에 등록했다. 이래저래 봐도 이점이 많았으니까.
충분히 강해진 나는 상위권 정도라면 금방 닿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였다.
나는 고작 D랭크의 누군가에게 막혀선 하위권에 멈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웃기지 마라, 지금껏 내가 무슨 노력을 해 오면서 이만큼이나 강해졌는데, 고작 이런 남자에게 가로막혀?
말도 안 된다. 무언가 잘못됐다 싶어 그를 찾아가 보았으나 들려온 답이라고는...
"너는 쓸데없을 정도로 탄을 낭비해."
같은 돼먹지 못한 말뿐이였다.
너는 틀렸다, 지금까지의 내 싸움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여태껏 그렇게 살아오면서 얻은 확신이란 말이다.
허나, 아레나에서 그것이 완전히 부정당했다.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몇번이고 덤볐으나 결과는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저 놈의 AC가, 저 놈의 실력이 나보다 위였을 뿐이기 때문이니까.
허나 패배는 거듭되고 거듭되어, 굳이 열을 뻗치면서 상위권을 노릴 이유를 만들어주지 않았다.
"......."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상위권을 향한다는 생각에서 눈을 돌린 것은.
내 밑에 나동그라진 녀석들을 괴롭히기 시작한것은.
그리고 지금.
"....아침인가."
겁도 없이 아레나에서 랭크를 올리던 레이븐 하나를 짓눌렀었다.
그 녀석의 AC도 트라우마가 될 만큼 머신건을 다발로 갈겨서 찢어놓았다.
아마도, 다시는 위쪽으로 향할 생각따윈 하지 않겠지.
슬슬 잠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라도 마실까 하던 참에 알람이 울렸다.
"무슨..."
내용은 아레나 매칭.
그때 잘근잘근 갈아놓은 레이븐 놈이였다.
"재도전...얕보는거냐."
보통 이런 부류가 있다, 주제도 모르고 밟혀놓고선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시 달려드는 부류 말이다.
"흥."
그런 싸구려 AC나 몰고 다니는 녀석에게 질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런 녀석에게 당했다는 아랫놈들이 같잖아보였다.
결과는 같을 것이다, 이번에도 내가 이긴다.
그렇기에 받아들였다.
////
"장난하자는건가.."
놈의 AC를 보고 내뱉은 말이였다.
재도전하는 저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 걸 보여주나 했더니, 같은 머신건 암으로 교체한 것이 전부였다.
지금껏 저 머신건 암을 누가 더 많이 사용해왔을 것이라 생각하는거냐, 저 자식은.
슬슬 아레나의 종소리가 울릴 때 즈음, 통신이 걸려왔다.
저 맞은편의 건방진 레이븐에게서다.
[여, 고상하신 레이븐 나으리. 하루만이네, 응?]
"..."
처음 듣는 그 레이븐의 목소리, 레이븐명을 보고 예상한대로 여성의 목소리였다.
허나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든 간에 대화할 가치는 없다. 그걸 통신을 건 본인도 아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알아, 대화하기 싫증나겠지, 그래서 나도 그냥 짧게 말할려고.]
보나마나 이번엔 다를 것이다-같은 내용일 거라 생각했기에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으려 침묵했다.
[정면부터다, 개자식아.]
정면? 뭐라고?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통신이 끊겼다.
좀 예상 외의 발언이였지만, 결국에 리벤지라는 목적으로 말한 이야기다.
보나마나 같은 무장으로 이겨주겠다..같은 유치한 발상이겠지.
아레나 시작 5카운트.
무엇이 되든 이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4.
3.
그깟 팔이 달라진다고 한들, 숙련도는 이쪽이 위다.
2.
1.
네녀석의 AC를 다시 벌집으로 만들어주마.
뿌우우우!!
아레나의 시작을 알리는 버저가 울린다.
AC가 부스팅을 하면서 전진, 머신건 암을 변형시킨다.
"무엇이 되었든 결과는...음?"
놈의 AC가 이상하다. 전혀 부스팅을 하고있지 않았다.
정면이라더니, 겁이라도 먹었나 싶었던 그때에 보인 놈의 AC 뒤편에 푸른 빛이 일렁였다.
"잠깐-"
저 AC는 부스팅을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OB인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초기형 AC가 빛을 내뿜으며 나를 향해 머신건을 갈기며 급가속했다.
투다다다다다카가가가가가강!!!!!
"우으으으윽!!"
장갑대처를 어느 정도 한 AC라지만, 이 정도로 빗발치는 머신건 세례는 예상하지 못했다.
AC가 탄막의 비를 정면으로 두들겨맞으며 미친듯이 떨린다.
제네레이터가 표면으로부터 급부상한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맛이 갔다.
파지직-
스크린에 노이즈가 꼈다. 헤드의 메인 카메라마저 몇 대 얻어맞은 모양이다.
시작 초장부터 이렇게 두드려 맞아본 적은 없었다. 내가 두들겨패는 입장인 적은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맞는 입장이였던 적은 단연코 없었다.
그런가, 정면부터라는 건 그런 의미였나?
고작 입밖으로 내뱉은 허접스런 예언 따위에 내가 당했단 말인가?
"이게...!"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분노였다. 그것도 윗 놈들이 아닌 아랫 놈에게...
수치다. 참을 수 없는 수치다...!
곧바로 AC의 방향을 꺾어 놈에게도 같은 고통을 맛보여주기로 했다.
초기형 AC는 예상한대로 OB의 가속을 버티지 못해 휘청대고 있었다.
하지만 노이즈가 낀 메인카메라에 비춰진 AC는 심히 휘청대면서도, 지금 자신이 넘어지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나를 조준하고 있었다.
"....!"
저걸 막지 못하면 진다. 그것만은 납득할 수 없다. 저지해야만-
...초조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녀석의 머신건이 다시 불꽃을 내뿜으려했다.
"이 내가!!!"
카가가가가가가강!!!!
먼저 납탄의 비를 흩뿌린 건 이쪽이였다.
투두두두파바바바박!!!!
두들겨맞은 초기형 AC가 머신건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조준이 흐트러져 내 AC의 주변에 탄을 퍼뜨렸다.
초기형 AC의 외장이 순식간에 벌집이 되었다. 헤드의 메인 카메라도 간신히 살아있을 정도다.
저것으로 더는 움직일 수 없을것이라 생각했으나 그건 착각이였다.
녀석의 AC는 두들겨맞아 뒤로 넘어지는 듯 싶었으나 부스팅을 가해 기적적으로 넘어지지 않고 뒤로 빠지더니, 이어서 공중으로 뛰어올라 기동하기 시작했다.
각부의 상태를 생각해보면 해봤자 걸림돌이 될 조작을 신참내기 따위의 레이븐이 태연히 해내고 있었다.
"무슨 조작이-"
투다다다당!!!!
"크우웃!"
마구잡이로 쏘는 탄알이 AC에 작렬했다.
저 초기형 AC는 날개 뜯긴 나비처럼 덜렁대는 장갑 판때기를 매달고선 필사적으로 날아다니면서 집요하게 내 방향으로 탄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런 같잖은 초기형 AC로, 건방지다는 말로도 모자랄 만큼 현재의 내 AC에 같은 위치에서 대적하고 있었다.
"뭐냐...대체 뭐하는 년이냐..!?"
오버히트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린다.
AC가 계속해서 머신건의 비를 맞아가며 덜덜거린다.
하지만 저 년의 AC는 그보다 더한 상태일것이다.
초기형 AC란 말이다, 이 쪽의 AC보다 조잡한 물건이란 말이다.
그런데 왜...저것은 거리를 두거나 쓰러질 생각은 커녕, 앞뒤 분간할 생각조차 않는 광인처럼 계속해서 나를 밀어붙이려 든단 말인가?
"웃기지 마라....!"
계속해서 헛공격질을 시도하는 초기형 AC의 헤드는 몸체와 마찬가지로 앞부분 외장이 눌리고 뭉개져 찌그러져 있었다.
그런데도 저것의 카메라만큼은 손상없는 채로 희번덕하게 이쪽을 향해 렌즈를 부라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 저 AC에게-
"웃기지 마라!!!!!!"
형용 못할 불쾌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시야에 들어온 년에게 공격을 퍼붓는다. 머신건 암의 끝이 점점 시뻘겋게 열을 내기 시작했다.
투다다다다까가가가강!!!
실탄끼리 맞부딪히는 소리, 쌍방의 AC가 계속해서 피격당하는 소리가 불법화음의 광상곡을 자아내고 있었다.
덜컹-
"우그윽!!"
AC가 점점 피격 반동을 견디지 못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등짝의 무장이 장식이 된 것인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쓸 여유도 없다, 그리고 쓸 이유도 없다.
이미 이 싸움은 나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 되고 말았다.
당연히 이긴다 따위가 아니다.
저것을 이기지 못하면 내가 무너지고 만다. 지금까지의 내가 처참하게 박살나고 만다.
"이긴다...! 이겨주겠다...!"
나는 '이겨야만 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투다다다다다-
팅, 티팅, 파직-까강!
파바바바박!!
다시금 놈을 시야에 두고 미친듯이 머신건을 난사했으나, 이상하게도 몇 발만이 스치듯 맞을 뿐, 대부분이 애먼 땅을 두들기거나 허공으로 흩어져버렸다.
점점 뭔가 잘못되어감을 느낀다. 저 AC는 분명 진작에 걸레짝이 됐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저 꼴이 되고도 아직까지 움직이고 있단 말인가?
초기형 AC의 내장이 저리도 단단했던가? 그럴 리 없다.
투다다다다-
다시금 머신건을 갈기고 나서야 깨달았다.
설마.
"맞지를, 않...?"
정통으로 맞는 공격이 없었다.
놈의 헤드 외장이 날아갔을 때부터.
무언가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다.
놈의 수준은 싸워 본 내가 잘 알고 있을 터다.
고작 팔 하나 바꾼 걸로 이렇게 차이가 날 리가 없다.
"말도...안 되는...!"
내가 가장 잘 다루는 무기다. 지금껏 가장 잘 다뤄온 무기란 말이다. 그런데 왜 저딴 년의 AC따위가 어떻게-
...ㅣ......ㅃ.....ㅣ.......ㅃ..ㅣ......삐.....삐...
소리가 난다.
아니, 나고 있었다.
AC의 한계를 알리는 경고음이였다.
귓가에 맴돌기 시작한 경고음이, 내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저 절망스런 소리가 눈앞에 패배가 찾아왔음을 실감시켰다.
"어째서-아니, 아직이다, 아직! 나는!!!"
아직이다, 지지 않았다. 아직 더 해낼 수 있다. 한번만 놈을 정면에서 두들길 수만 있다면-
위이이이잉...
탄약소리도 머릿속에서 묻혀버릴 정도로 내몰린 나는, 이해할 수 없게도 그 소리만큼은 선명히 들을 수 있었다.
"...나는...아직..."
상대의 AC에서 새나오는 저 소리는.
-----------------....
한 차례 거대한 소음이 지나갔다.
눈앞의 AC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경고음이 들리지 않는다. 노이즈의 소음으로 가득 찼던 카메라도 지쳐 눈을 감았다. 콕핏의 열기는 제네레이터의 침묵과 함께 죽어가는 듯이 식어간다.
졌다.
"..........."
어떤 말도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지금껏 해 왔던 것들이, 내가 살아 온 이유가, 처절하게 찢긴 AC와 함께 무너졌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자리에 쳐박혀서...나는.......
//////////////////////////////
"........."
"져 놓고선 이런 메일이나 보낸다니, 그 사람..."
"됐어...대답할 기분도, 그럴 기운도 없어..."
지친다. AC는 또 걸레짝이고, 나는 그 두들겨맞아 떨떨대는 AC에 두어 번이나 OB를 쓴 탓에 몸이 시큰거려 누워있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땐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싶다. 그저 운이 좋아서 이긴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감히 저놈의 메일에 대한 시답잖은 답변도 할 입장이 되지 못했다.
내가 미쳤지, 머신건 암을 산 거야 그렇다치고, 앞뒤 다 짤라먹은 무대포식 우라돌격따위를 화려하게 저지르다니.
도발성 메일 탓에 머리가 돌아버렸다고는 해도, 눈에 보일 정도로 격정적으로 군 것이 나로써는 스스로가 영 아니꼬왔다.
그야 그럴 게, 아레나가 아니였다면 가장 먼저 죽을 놈의 행동거지이지 않은가.
"속은 풀리셨나요?"
"그랬어야 했는데...영 아니네."
"뭐, 이미 끝난 일이고, 별 수 없잖아요? 뭣보다 좋게 끝났으면 됐지."
"...그것도 그렇네."
나름 맞는 말이다. 리매치의 내용은 좀 불편했지만 결과는 이쪽의 승리로 끝났다. 그럼 된 거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내가 말을 꺼냈다.
"다음 아레나도 준비해 줘."
"...제정신이세요? 그런 삐걱대는 몸으로 뭘 또 한다고."
흡사 나사 빠진 놈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에마가 물었다.
"그래도 오늘안에 끝내고 싶어...난 쉬더라도 내일만큼은 하루종일 쉬고 싶거든."
"......참내, 그렇게 말하면 괜히 혹한다니까요."
에마는 텄다, 는 한숨을 쉬면서도 스크린을 두들겼다.
"시간은 저녁대로 잡아놨습니다. 아무리 초기형 AC더라도 수리하는 시간은 필요하니까요, 레이븐 당신처럼."
"아 맞다, 그랬었지 참.."
"..아 맞다?? 자기 AC 상태가 어떤 꼴이 됐는지 금방 잊어버렸단겁니까 지금??"
아.
"헉 잠깐만그게아니라으겍-"
변명을 하기도 전에 안면에 쿠션이 날아왔다.
"할 말은 많지만 이걸로 땡치죠. 아침부터 정신없기도 했고, 그러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 둘씩 까먹기도 하는 거니까요."
"...휴..."
얼굴에 박힌 쿠션을 내려놓으면서 안도감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AC에 관한 일은 되도록 잊어버리지 말아주세요, 레이븐이잖아요? 자기 AC의 상태도 몰라서야 레이븐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건...엄...명심할게."
대답을 머뭇대다 점점 험악해지는 에마의 표정을 보곤 쭈그러드는 모양새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좀 쉬고 계세요, 전 그동안 꿀좀 빨 생각이니까요."
에마는 그리 대답하면서 방을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 걸 막 말해도 되는거야?"
"윗선만 안 들으면 문제될 거 없거든요."
에마는 내 물음에 붸 하는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방에서 떠났다.
"...허참."
내려놓은 쿠션을 옆으로 치우고 이마에 손등을 얹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방금 전 아레나는 순전히 운이 좋았던 것 같았다.
판때기가 벗겨져 너덜너덜한 AC따위로 용케 그런 기행을 보였다는 건 감탄스러우나, 그런 짓거리를 밥 먹듯이 할 수 있냐고 한다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곤란 한 것은 그 순간의 감각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마에 얹은 손을 쥐락펴락해본들 그 때 느꼈던 감각의 출발선을 인식하는것조차 불가능했다.
"...하...."
이래선 잠도 오지 않는다. 에마도 지금은 공석이겠다, 홀로 테스트장에 들러보기로 했다.
///////
쭈웁-하는 소리를 내며 종이팩 음료수를 마신다.
스크린에 비춰지는 건 2랭크 위의 레이븐, 마이릿지였다.
테스트 타입은 A, MT성능도 겸하는 B와는 달리 깜빡이는 표적을 보이는 족족 명중시키는 것이 목표다.
살짝 들은 바로는 탄 낭비에 있어 철저한 인간이라고 하는데, 깜빡이는 표적을 정확히 맞추는 솜씨를 보아하니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닌 듯 했다.
그래, 정확하다. 지나치게 정확하다. 저런 실력인데도 하위권이란 말인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지?"
"엉?"
문득 부르는 듯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젊은 녀석이 혼자 이런 데에 있다니, 길이라도 잃었나?"
그렇게 말을 거는 남자의 첫인상은 실로 대단했다.
2m는 족히 되는듯한 키에 그저 순수하게 강해보이는 떡대가 눈에 띄었다.
허구헌날 화만 내고 사는 인간들도 보자마자 꼬리 말린 개처럼 낑낑댈법한 그런 인간이 있지 않던가? 그런 인간을 직접 보게 된 기분이였다.
"...어...일단은 레이븐이라.."
나라고 한들 다를 바 없이 기가 눌려서 꼬리가 말려들어가 버렸다.
"레이븐? 너 같이 젊은 놈이 무슨-아니, 실언이니 봐 주게."
급하게 말을 고친 남자는 내가 앉은 자리의 두칸 옆 자리에 착석했다.
"이름은 어떻게 되나."
"...아재같으면 말하겠어?"
"...하기야, 그것도 그렇지, 모르는 게 낫겠구만."
"모르는 게 낫다고? 아재도 레이븐이였어?"
내 물음에 남자는 비아냥대며 답했다.
"모르는 게 낫다 말하면 이놈이나 저놈이나 레이븐인 줄 아나? 아닌 건 아니다만 너는 생각머리를 고칠 필요가 있군."
말을 마친 남자는 손에 들린 음료수 캔의 꼭지를 따내고 벌컥대며 마시기 시작했다.
꼴랑 음료수 캔을 마실 뿐인데 괜히 압도당하는 기분이였다.
"푸하-살겠구만, 그래서 여기엔 무슨 볼일이지?"
"머리 식힐 겸 온거야."
"그런가? 고민거리라도 있나?"
남자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들어주겠다는 듯이.
"...대충 그렇지."
"음, 그렇구만. 잘 해결되길 바라지."
"?"
? 뭐야? 안 들어? 끝??
"? 왜 그러나?"
남자는 얼빠진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조차 모르는 것처럼 말했다.
"아니, 들어줄 것 처럼 말하더니 무슨-아니, 됐다. 그리 생각한 내가 빡통이지."
"들어준다고? 아~핫하, 그런 거였구만."
남자는 내 말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유감이지만 젊은친구, 나도 심리상담사 노릇을 하기엔 머리가 굳어버려서 말이야...심란해지게 들을 생각도, 해결해 줄 말발도 없어."
"...끙."
조금이나마 품었던 얄팍한 기대감은 그대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대신에 재밌는 이야기 하나는 막 생겼지, 들어 볼 텐가?"
"뭔데."
방금 전 대화 때문에 괜히 기분이 상한 나는 퉁명스럽게 답하게 됐다.
관심 있는듯한 대답이 나오자 남자는 그 굵은 목소리로 속닥거리듯 말했다.
"그 아레나 랭커 기믈렛이 꺾였다는 이야기 말이지."
"!"
"음, 반응이 있군, 너도 아레나에 관심이 있는건가보군, 그렇지?"
그 녀석이다.
내가 리벤지 매치로 승리했던 그 레이븐이다.
"그 녀석이 왜, 그렇게 유명해?"
"유명하고 자시고, 우리들 딴에 이명따위는 없지만 녀석은 아레나의 문지기 같은 놈이거든."
"문지기인가..."
"그래, 그것도 자기 밑의 놈들에게 져본 적 없는 문지기라는거지. 이번 아레나가 있기 전까진 말이야."
"..."
난 그런 녀석에게 이겼다는건가...내가 의외인건지, 아니면 내 아래의 레이븐들이 저 약했을 뿐인건지, 그 레이븐을 '운'으로 꺾은 나에게 있어선 여전히 모를 일이였다.
"기대되지 않나? 기믈렛을 꺾은 그 레이븐이 언젠가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올 그 때가 말이야!"
그런 말을 하면서 남자는 호기롭게 기대감에 찬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삐빅.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알림음이 들려왔다. 현재 레이븐의 테스트모드가 종료되었다는 알림음이였다.
"아, 이런, 벌써 시간인가...하여간 기다릴 때 만큼은 쓸데없이 잘 가는군."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대충 빈 캔을 5m 거리는 되어보이는 쓰레기통에 한 번의 바운드도 없이 던져넣었다.
무슨 정확도가 저렇단 말인가 생각할 때즈음에 남자가 말했다.
"언제 또 보자고 젊은 친구, 이 아저씨는 AC테스트 때문에 먼저 가 볼란다."
"어? 어어..."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남자는 내 자리에서 멀어졌다.
생각해보니 저 남자도 레이븐이라 했었지...아레나의 소식에 대해서도 아는듯한 모습이였다.
"......"
언젠가 저 사람과 대결 상대로 만나게 될까? 도중에 포기하게 돼서 만나지 못하게 될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먼저 죽게 될까?
스스로가 생각해봐도 참으로 쓸데없는 생각들이다. 언젠가 잊어버리겠지 생각하며 테스트장에서 나왔다.
////////////////
맞질 않는다.
역시나, 그 때의 열이 오르는 감각을 다시 재현하기란 힘든 모양이였다.
"잔탄...달랑 6발..."
이성적으로 바라보면 고작 일주일도 안 된 신삥이 이만큼이나 몰고 있다는 것에 대단함을 느껴야 하나, 지난 날들의 만남과 경험들 탓에 "고작 이런 것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라는 답만이 도출되고 있었다.
"레이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에마가 나를 보며 물었다.
"...별거 아니야."
"별 거 아니긴, 심란한 표정 지어놓고 아니라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에휴, 이건 말해도 딱히 해결되거나 하진 않는 고민같은거라고."
"참 내, 아레나 내용이 어떻든간에 어쨌든 이겼잖아요? 기뻐하진 못할 망정 똥씹은 표정이나 하고선 우울 전파라도 하실 생각이세요?"
에마는 그리 이야기하면서 가상스크린을 열었다. 에마가 열어놓은 가상스크린은 휴식과 관련된 서비스 사이트였다.
"지금은 걱정이고 고민이고 싹 잊어버리고, 꼴랑 하루밖에 안 남은 자유시간이니만큼 소중~히 하면서 노는 걸로 해요."
에마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허구헌날 고민하고 걱정해봐야 당장의 삶이, 당장의 내가 갑자기 바뀌진 않는 것이니까.
"...네 말이 맞는 거 같다, 지금은 그냥 놀자!"
"예, 그럼요, 그래야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에마가 신이 난 목소리로 내 말에 화답했다. 덕분에 조금은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이제 막 레이븐의 삶에 발을 들였을 뿐이다. 앞으로의 내가 어떤 삶을 살 지는 모르겠으나, 긴말 않고 미래의 내가 알아서 잘 해주겠지.
그럼 남은 시간동안 '유예기간'의 마지막 하루를 뭘 하면서 보낼 지 에마와 고민해봐야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제 미션내용들 스킵할지 스킵안할지 정해야됌
뭣보다 구구작 다시 돌면서 스샷도 찍어야됌..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아이비스한테 문의해봤는데 위성폭격미션에서 정해줄 일이라네요
재밌는 자동차 교배프레스는 스킵하지 말죠
심리묘사가 아주 맛있어. 뇸뇸
님글 너무 재밌는데 시리즈로 모아줄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