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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됐다.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

카페인 하이 상태에서 조금 폼을 잡았더니 상대가 무려 이 회사 이사회의 딸이었다. 거짓말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나를 가리킬 때의 손은 결코 나같이 밑바닥에서 구르다 온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링크스라고 해봤자 결국에는 기업의 공인 용병 같은 것. 최고 전력으로써 대접받는다 해도 정말로 자본과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기업 귀족이 상대라면 좋지 않다.

내가 15년 뒤의 ORCA 여단처럼 대놓고 팍스 이코노미카 체제에 쌍으로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투 노블, 웰컴 투 디 어스 해버리지 않는 이상 말이다.

일단 숙소로 돌아와 진공 포장된 야전상의의 비닐을 뜯어내는 동안 든 생각이었다.

"첫날부터 이게 뭐냐 이루카..."

기장이 애매하게 긴 야전상의를 입고 나서, 나는 거울 앞에 섰다. 본래 알드라의 기업군이 쓰던 것인지 디지털 플레크타른 패턴이 적용된 옷은 환자복 같은 기본 지급 의류에 걸쳐지자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꼬맹이가 군복 입는 것만큼 안 어울리는 게 없네."

어찌되었든 지금의 나는 13세의 소년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외모보다 실력이 중요한 때다. 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체칠리아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겠지만, 어쩔 수 없다. 리스크를 끌어안고 일단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다.

시간을 보니 딱 7시 20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통보받은 강의 시간표에 따르자면 첫 강의인「전투학개론」의 시작까진 40분이 남은 상황이다.

조금이나마 알차게 쓰고 싶은데. 그렇다고 스트레칭이나 가벼운 운동 같은 걸 하긴 뭣하니, 나는 강의실로 향하기로 했다. 첫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주변을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강의는 대체로 전자책으로 진행되는 모양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책을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 건 전 대학생이었던 내 자아가 찔린다.

"뭐라도 책 같은 걸 가져가야... 겠지."

그리고 내 수중에 책 비스무리한 건 단 하나.

레이븐 매뉴얼 뿐이다. 이제 와선 더 생산되지도 않는 구세대 하이 스펙 노멀의 매뉴얼에 한 레이븐이 생애에 걸쳐 쌓은 경험으로 주석을 달아놓은 것. 뭐라도 가져간다지만 생각보다 교재로서의 가치도 충분하군.

매뉴얼을 챙겨 숙소의 문을 나선다. 전투학개론의 강의가 이루어지는 메인 강의실의 위치는 공교롭게도 아까 체칠리아와 한판 붙을 뻔했던 9B 복도를 거치는 경로로 내 숙소로부터 그럭저럭 가깝다. 도보로 1분 정도.

메인 강의실로 향하는 길은 조용했다. 40분이나 빨리 온 셈이니까 당연하겠지만은.

조금 걱정이 되는 것이라면 체칠리아가 지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경우인데, 그런 경우라면 적당히 무시하면서 반대쪽 구석에 앉으면 되겠지. 대책 완료.

그렇게 사뿐한 발걸음으로 도착해 메인 강의실의 문고리를 잡으려 들자.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
"...."

녀석이랑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서로 같은 생각을 해버린 모양이다.

서로의 당황은 곧바로 적의로 바뀌어 눈 아픈 대치가 수 초간 계속되었고, 나는 여기서 일단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흥!"

그러자 체칠리아는 소소한 승리를 거둔 것처럼 콧방귀를 뀐 뒤.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갔고, 보란 듯이 중앙에 앉았다.

강의실의 좌석 배치는 4석씩 나누어 배치된 총 8석의 2층식 계단 구조. 그 중 1층의 3번 좌석에 앉은 것이다. 그 성격이면 친구 하나 없겠다 싶어 십중팔구 구석 자리를 차지할 줄 알았는데, 낭패다.

무엇보다도 저 뻔뻔한 포커페이스를 보라. 네가 어디에 앉든 내가 곧 중심이다. 네깟 것 신경이나 쓸까 보냐. 나의 위광에 찌그러져 조용히 구석에나 짱박혀 있어라. 날벌레! 라고 말하고 있지 않나.

상정한 계획은 한 수만에 무너졌다. 어찌하면 좋은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쩌긴 어째. 스테일메이트 상황으로 몰고 가야지.

답변이 나왔다.

나는 곧바로 따라들어가 체칠리아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거기에 쐐기를 박듯이 가지고 온 레이븐 매뉴얼도 책상 위에 올려둔다.

"하아?!"

예상했던 반응이 나왔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당신 바보인가요? 뭘 그리 천연덕스럽게 제 옆자리에 앉고 자빠진 것이와요?!"

"바보라니, 말이 좀 심하지 않아? 그냥 좋은 자리를 찾고 있었을 뿐이거든."

"이이익...!"

발작하는 듯한 체칠리아의 반응에 나는 느긋하게 대응했고, 되려 매뉴얼을 펼쳐 보는 척을 하며 페이스를 무너뜨렸다. 화내든 부끄러워하든 마음대로 하셔. 어차피 천것에게 수치심과 배려심이 있을 리가 없잖아?

"오, 벌써부터 사람이 있다니 별일이로군.."

"예에, 뭐."
"....."

그렇게 10분, 15분, 20분. 재차 대치 상태에서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드디어 나와 체칠리아 이외의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일찍 온 둘이다. 그 와중에 딱 달라붙어 있으면 어떤 인상이 될지 잘 알고 있을 텐데.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사람 좋아 보이는 중년에서 노년 즈음의 남자. 전생에서의 지도 교수랑 비슷한 인상이다. 복장도 비슷한 걸 봐서 정말 대학 교수일지도.

예르네펠트 교수(가칭)은 빠르게 출석한 학생을 보듯 나와 체칠리아를 기특한 눈빛으로 보더니 1층의 1번 좌석. 체칠리아의 왼편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네요."
"....."

다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갈색 장발을 뒤로 묶고, 둥근 알의 금테 안경을 쓴 지적인 외모의 여자로 눈 밑의 다크서클과 알드라의 로고가 프린팅된 녹색 작업용 점프슈트를 입고 있었다. 아마도 엔지니어 부류일까.

알드라의 엔지니어는 교수의 뒤편. 2층의 1번 좌석에 앉았다. 만성 수면 부족으로 보이는데 괜찮을까. 전생에는 72시간 정도 안 잤던 적도 있지만, 미친 짓이었지.

"여어, 사람들 많구만."

"그러게요. 곧 시작이라는 느낌일까요."
".....!"

그 다음은 베레모를 좌측으로 잡아당겨 쓰고 군복을 입은 호남형의 20대 청년. 전생의 기억대로라면 저렇게 베레모를 쓰는 건 프랑스군밖에 없다던가. 아마 메리에스 산하의 기업군 병사 출신이 아닐까 짐작된다.

메리에스의 병사는 엔지니어의 바로 오른편. 2층의 2번 좌석에 앉았다. 군인 출신인 것치곤 묘하게 헐렁한 느낌이다. 말년이라고 해야 하나. 플레이보이라 해야 하나.

"이야, 벌써 다 왔습니까..."
"....."

"딱히 늦은 것도 아닌걸요."
".....!!"

마지막으로 들어온 건 딱 봐도 샐러리맨. 그리고 전 레이븐. 전자는 아예 사무용 정장에 레오네 메카니카의 배지를 달고 있었고, 후자는 딱 봐도 알 수 있다.

몸의 여기저기가 의체화되고 흉터 그득. 눈도 살벌하기 그지없다. 레이븐 이외의 인종일 리가 없지.

그 둘은 각각 2층의 3번, 4번에 앉았다. 이쪽으로 안 온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샐러리맨이야 그렇다 쳐도 레이븐 쪽은 살기를 뿜어내는 게 이 몸으로는 못 버틸 것 같으니까. 절대로 내가 쫄아서 그런 건 아니고. 음.

그렇게 강의실이 다 찼을 때, 나는 체칠리아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부들거리는 진동은 감지하고 있었지만 대체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솔직히 궁금했다.

쳐다보니 체칠리아는 여전히 흥, 흥. 콧방귀를 뀌며 나를 무시하려 애쓰고 있었다. 슬슬 패배를 받아들이는 게 좋을 텐데. 그리고 시간이 8시가 되자 곧바로 교수님이 강의실에 들어오... 시진 않았다.

수업은 기본적으로 AI에 의한 영상 강의였다. 하긴, 이런 걸 가르칠 교사가 흔한 것도 아니고. 있다고 해도 전력으로써 운용해야지. 교사를 시킬 시간이 어디 있겠나.

강의실 전면의 대형 스크린이 켜졌다.

차분한 전자 음성과 함께 강의가 시작되었다.




강의 내용은 백병전의 기본부터 전술의 기초 지식 등을 다뤘다. 전생의 대학생일 적에는 첫 수업은 오리엔테이션으로 간단히 하던 게 관례였지만 여긴 가차 없었다.

강의 한 번에 논스톱 4시간. 처음부터 무지막지한 정보량을 쑤셔 박은 뒤. 입안에 넣어줬으니 알아서 소화하라는 식이었다. 아무리 단련된 대학생인 나라도 힘들 정도. 다른 후보생 중 멀쩡한 사람은 예의 교수님과 엔지니어녀, 그리고 전 레이븐 정도였다.

그렇다. 체칠리아도 버티지 못하고 얼이 나간 상태였다.

기업 귀족의 영애라면 의외로 잘 단련되었을 것 같았는데, 오히려 금지옥엽이라서 내성이 더 없는 것인지. 다른 사람들이 강의실을 우르르 빠져나가는 가운데.

나는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체칠리아의 눈앞에 손을 내밀고 손가락을 두 번 정도 튕겨 소리를 냈다.

"야, 정신 차려. 야."

"....핫. 제가 잠깐 정신을. 큼. 정신을... 잃기는 무슨. 저는 아주 정정한 것이와요."

체칠리아는 눈에 이성이 돌아오자마자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한번 한 뒤. 평소대로의 뻔뻔한 얼굴로 돌아왔다.

"정정은 무슨, 그냥 멀쩡하다고 하든가. 하여간. 1라운드는 내가 이긴 거 같은데. 지금 무슨 기분?"

"딱히, 당신같이 저열한 기쁨에 젖어있진 않사와요. 고작해야 오전의 1라운드. 넘겨 드리지요. 하지만 오후의 2라운드는..."

그 순간, 체칠리아의 포커페이스가 살짝 일그러져 입이 샐쭉거리는 게 표정에 드러났다.

"각오하시와요."

이번에는 이겨주겠다는 저 표정. 나는 조금 얼굴을 굳혔다. 확실히 오후에는「운동」이 예정되어 있던가.

교관의 통제하에 스트레칭부터 시작해, 조깅, 기계 체조, 수영, 자전거, 에어로빅, 나중에는 전투 훈련이나 서바이벌 훈련도 한다고 얼핏 기억이 난다. 그런 것이라면 확실히 나에게 불리하긴 하다.

나이와 신체 조건부터가 다르니 말이다. 건강검진 때의 신체검사에서 측정한 내 키가 153cm. 그에 비해 체칠리아는 어림짐작해 160cm.

하지만 나도 수라장은 겪어왔다.

결의를 품은 채. 먼저 식당으로 향해 - 아침과는 달리 점심과 저녁은 어째선지 식당에서 밥이 나온다 - 중식으로 나온 라구 파스타를 흡입해 해치운 뒤. 환자복과 함께 지급된 트레이닝복 - 이거, 휠■다 - 으로 환복.

운동장으로 나선다.

운동장에 도착하니 이미 몇몇 후보생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역시 식후에는 운동장이라는 느낌일까. 아까의 강의 때와는 다르다. 체칠리아도 그 중 하나였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뜨며 도전적인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 일일이 반응해줄 필요는 없다.

이미 과반수의 후보생들이 운동장에 모인지라 교관 - 이런 곳에선 또 인간을 쓰는 모양이다 - 도 불상사의 예방을 위해 급히 왔다. 그렇다면 눈치 볼 것도 없이 몸이나 풀어두는 것이 맞겠지.

그렇게 개인 스트레칭 - 전생의 헬스장 PT 때 어설프게 배웠던 걸 했을 뿐이지만 - 을 마치고, 시간이 되자 나를 포함한 8명의 후보생은 교관의 통제하에 일제히「운동」을 시작했다.

강의 때와 마찬가지로 운동도 꽤나 가차 없었다.

운동의 강도 자체는 전생의 군 생활 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지만, 문제는 여기 모인 인간 전원이 신체 건강한 20대의 청년이 아니라는 것이겠지.

늙고 지친 샐러리맨, 가장 먼저 리타이어.

의외의 선전을 보여준 교수님, 두 번째로 리타이어.

알드라의 엔지니어녀, 세 번째로 리타이어.

그리고 내가 네 번째로 리타이어하기 일보 직전인 상황.

전 레이븐과 메리에스의 병사는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호흡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긴 커녕 그다지 땀을 흘리지도 않은 모습이었고.

"허억... 허억... 흐으... 젠장."
"후우...."

체칠리아는 땀범벅인 건 같았지만,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나와 다르게 아직 기력이 남아있었다. 역시 영양죽 원툴이던 나와 다르게 이것저것 먹으면서 자라서 그런가. 신체 발육도 좋고 어드밴티지가 있다.

"...후후후. 빈약, 빈약! 고작 그 정도의 체력으로 이 저에게 완판승을 따내려 하다니. 백만년은 이른 것이와요!"

그 와중 체칠리아가 도발을 건다. 대자로 뻗어 숨을 고르던 나는 이를 악물고 일어서며 대답했다.

"허억... 후우... 나... 아직 서 있거든...!"
"퍽이나 잘 서 있사와요. 그래서야 어디 걸을 수나 있을는지. 오호홋."

때맞춰 교관의 휘슬 소리가 울렸다. 오후 운동의 마지막 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지."

마지막 코스는 닷지볼. 거창하게 말하지만 피구다. 진작에 리타이어해 뻗어있던 사람들도 슬슬 체력이 회복되어 있었는지 운동장 내의 코트로 들어왔고.

4 대 4로 팀을 나누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체칠리아를 주시했다. 나만 집요하게 노릴 게 뻔하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도전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EN이 완전히 동나기 일보 직전인 이쪽과는 다르게 5할 정도는 유지 중인가.

소모전이 된다면 필패다. 속전속결로 승부수를 띄운다.

그래.

그렇게 생각만 했다.

"끄악-!"

생각하던 순간 그 틈을 노린 체칠리아의 첫 공이 날아와 내 안면을 직격. 꼴사나운 비명을 내며 엎어져 그대로 땅을 기는 신세가 되었으니까.

오늘의 스코어. 1 대 1. 무승부.






드디어 다음 편부터는 AC전이다

시뮬레이터지만(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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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익명의 오르카가 메르첼을 돌려 암붕이랑 롤빵을 만들어줬으니 뇌내 이미지에 참고하라....

씨발 저게 16세 발육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