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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잠시 통신을 끈다.

"후우... 할 수 있겠지. 나."
"예, 그럴 생각입니다."

이어서 수몰 구문을 읊는다.

처음부터 꽤 험한 꼴을 봐버린 덕에 덜컥 겁이 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내 지론상 싸우기도 전에 겁을 먹는다면 필패한다. 그러기 전에 수몰 구문으로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

물 위를 나느냐. 물 속에 처박히느냐. 두 가지의 상태밖에 없는 고독한 구문이기에 이는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좋았어. 다시 통신을 켠다.

"미리 말해두는 거지만, 격투전 금지다."

기본적으로 이 테스트에 룰은 없다.

무슨 편법을 쓰던 아무튼 승패를 가르기만 하면 그만. 그래서 레이븐도 아까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관제실 측으로부터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정비반에게 메니퓰레이터나 각부를 사용한 격투는 금물이라고 사전에 경고받은 것도 있는데다 격투전을 한다고 쳐도 그 끝은 아까의 클라우디아 씨처럼 토사물 범벅이 되는 것일 텐데, 그건 딱 질색이다.

아마 이 점에 대해선 체칠리아 또한 동의할 테지. 그렇기에 나는 먼저 신사협정을 제안했다.

룰이 없다는 건 룰을 새로 만들어도 그걸 제재할 근거도 없다는 것이니까.

『아라, 겁먹으신 건지?』

"하?"

뭐어라고, 이 새끼.




관제실이 지정한 교전 에리어는 아까의 에리어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다운로드받은 지형 데이터에 의하면 대략 2km 정도 떨어져 있는 폐시가지.

범위는 넓다고는 못한다. 필연적으로 시가지 내의 근접전이 벌어지겠지. 레이저 라이플 2정을 장비한 만큼 넓은 개활지에서 최대의 위력을 발휘하는 지금의 내 어셈블리와 그다지 궁합이 좋지 않다.

그에 비해.

체칠리아의 괴퍼르트는 평소에도 쓰던 펄스 건과 레이저 블레이드를 장비했다. 근접 화력이 높은 소형 EN 화기와 레이저 블레이드, 그리고 근접 적성이 높은 파일럿의 조합. 의도적이다 싶을 정도로 유리한 환경.

하지만 나도 체칠리아에 대해선 익숙해졌다. 익숙한 장비를 쓴다는 건 익숙한 전법도 쓴다는 것. 다소 지형적 어드밴티지가 있다고 한들 하던 대로 대응하면 되겠지.

아마도.

생각이 멈추자 기체 또한 멈추었다. 교전 에리어에 도착. 양 기가 지정된 위치에 도달했다.

침을 한 모금 삼킨다. 컨트롤 레버를 붙잡고 있는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와 장갑 속이 축축하고 미끌거린다.

묘한 일이다.

이럴 때 긴장하지 말라고 수도 없이 해왔던 것이 시뮬레이터였을 텐데, 막상 진짜 AC에 타서 - 출력 제한은 걸려 있지만 - 진짜 총구를 겨누게 되니 마음의 백지에 먹물이 번지는 것 같은 감각이 든다.

【ENGAGE】

"....실전이다."

허나 관제실은 무정하다. 사람의 마음에 먹물이 번지든 말든 배치가 완료되는 대로 즉각적인 전투 개시 신호를 보낸다.

컨트롤 레버의 락을 풀고 트리거를 개방한다, 페달을 밟는다, 메인 모니터를 응시한다.

일련의 동작은 하나의 행위로 귀결된다.

싸운다.

전고 10m, 강철의 거체가 푸르스름한 추진광을 후미에서 내뿜으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지면 위를 미끄러지며 모니터에 흘러나가는 풍경은 삭막하다. 2km×2km의 정사각형 구조의 분지형 에리어. 외곽은 드문드문 폐허가 남아있는 회색의 황무지. 중앙 부분에 폐시가지가 있다.

그리고 양 기의 배치 위치는 각각 정사각형의 꼭짓점 부분. 나는 왼쪽 아래. 체칠리아는 오른쪽 위. 고로 대각선 경로. 중간에 위치한 폐시가지에 가로막혀 서로 시야는 차단된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포진이다.

아니, 살짝 불리하다.

서로 레이더 탐지 범위는 겹치고 있어 쌍방이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할 수 있는 상태. 양측 모두 첫 교전 지점을 어디로 잡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체칠리아는 반드시 폐시가지 내부에서의 육박전을 벌이고 싶어할 테지만 나는 폐시가지로 진입하는 대신, 먼저 주변 지형을 활용해 체칠리아의 위치를 예측하려 했다.

아무리 레이더로 대략적인 위치는 보인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대략」이다. 제대로 광학 관측을 하는 것보단 못하다.

게다가 시가지의 폐건물들은 철근 콘크리트 등의 레이저 라이플을 어느 정도 상쇄할 정도로 밀도가 높은 구조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체칠리아는 반드시 그 점을 노릴 것이다. 최대한 폐건물을 방패로 삼아 내 시야와 사격 각도를 차단하려 들테지. 그 이점을 없애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명확한 타격 포인트다.

폐시가지로 향하는 대각선 경로를 따라 레이더에 신호가 조금 더 선명해진다. 체칠리아가 움직이고 있다. 그녀는 아마 폐시가지 중심부로 빠르게 진입할 것이다.

진입해버리면 체칠리아에게 방패가 생긴다. 바깥에서 노리기 어려워지고, 필연적으로 내가 피해를 감수한 채 돌입해야만 한다. 고로, 선수를 칠 수밖에 없다. 폐시가지 외곽을 따라 우회한다.

페달을 더 강하게 밟아 추진력을 높인다. 기체는 지면 위를 빠르게 미끄러져 간다. 레이더에는 체칠리아의 신호가 여전히 미약하게 깜빡인다.

시가지 외곽의 고지대를 선점.

계획은 간단하다.

체칠리아가 폐시가지에 돌입하는 순간, 방패가 생겼다고 안심했을 순간. 외곽 고지대에서 레이저 라이플의 최대 사거리를 활용해 기습적으로 저격을 가하는 것.

건물의 잔해를 방패 삼아, 기체를 고정한다. 레이더에 표시된 체칠리아의 신호가 폐시가지에 가까워진다.

트리거를 천천히 당기며 조준.

레이저 라이플의 조준 사이트가 붉게 점등하며 FCS가 리드를 알린다. 노리는 건 각부. 일격에 기동력을 빼앗고 차분하게 끝낸다.

체칠리아 쪽에서 대응할 가능성은 낮다.

육안은 커녕, 광학 관측으로도 최대한 줌을 당겨야 보일락 말락 한 거리에서의 저격. 녀석이 자신의 홈그라운드를 코앞에 두고 환희하는 순간, 이 승부의 향방을 가를 초석이 놓이리라.

트리거에 손가락은 이미 걸려 있다. 노려야 할 부위를 바라보고, 상대가 곧게 들어오는 지금.

그 순간,
눈이 마주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칫!"

급격한 기시감에 멈칫하고만 스스로를 질책하며 트리거를 당긴다. 허나 결단은 이미 늦어 있었다. 체칠리아는 이쪽의 움직임을 읽은 듯 춤추듯이 피했다.

계획이 초장부터 틀어졌다.

사격이 빗나간 순간, 체칠리아의 괴퍼르트가 기민하게 방향을 틀어 폐시가지 깊숙이 숨어들었다. 레이저 라이플의 탄흔만 지면에 희미하게 남았고, 그녀의 기체는 건물 잔해 사이로 완벽히 엄폐되었다.

나는 다시 레이더를 확인했다. 이젠 폐시가지의 구조물들이 전파를 난반사 시키는 탓에 체칠리아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하기 어렵다.

"젠장, 할 수밖에 없나!"

마른 입술을 조금 적시고, 잔해를 걷어차 고정을 해제. 분지 사면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간다.

폐시가지로 진입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체칠리아는 이미 시가지의 구조물들을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을 만들어놨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주도권을 넘긴 채로 시간을 끌어봤자 상황은 더 나빠질 뿐이다.

레이더는 이미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폐시가지 안으로 들어서면 그녀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오직 육안 관측과 본능적인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

기체를 낮게 숙이고, 추진기를 분사. 폐시가지 내로 돌입한다. 곳곳에 균열이 간 아스팔트 도로 위에 착지하자 폐건물의 그림자가 시야를 압도적으로 가로막는다. 하늘은 좁아졌고, 시가지는 텅 비어 적막하다.

이상할 정도다. 분명 폐시가지 내에 매복하고 나를 맞받아칠 거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긴장을 풀지 않는다.

레이더 반응, 노이즈 탓에 식별 불능.
음향 센서, 특이할 만한 구동음 없음.

열화상 센서, 반응 있음.

"열원 반응?!"

가로로 그어지는 고온의 열원이 바로 근처에서 포착되었다. 체칠리아는 나보다 한 발 앞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앙!

머리 위에서 굉음이 울렸다. 폐빌딩 한 채의 밑둥이 순식간에 잘려나가며 건물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체칠리아는 레이저 블레이드로 건물 하단을 베어 무너뜨린 것이었다.

"이러기냐!"

붕괴되는 건물의 그림자가 내 기체를 덮치며 빠르게 다가왔다. 지체할 틈이 없었다.

컨트롤 레버를 당기며 추진기를 최대 출력으로 분사, 옆으로 몸을 날렸다. 노멀인지라 퀵 부스트가 없는 게 원망스럽다. 아슬아슬하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며 일으킨 충격파와 잔해들이 아스팔트 도로를 깨뜨리고, 철골과 콘크리트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내 기체는 가까스로 잔해를 피하며 착지했지만, 잔해의 일부가 열화상 센서를 덮쳐 파손 경고가 깜박인다.

얼굴이 찌푸려진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열화상이다. 레이더가 환경에 의해 무용지물인 지금. 사람으로 치면 한쪽 눈이 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빌딩 붕괴의 여파로 주변은 폭연을 연상케 하는 먼지가 자욱한 상황. 이래서야 광학 관측으로도 레이더로도 탐지가 곤란해졌다.

차라리 아예 안 보였으면 나았을 것을. 불완전해진 센서의 노이즈와 흐릿한 시야가 압박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체칠리아는 분명 안개 너머에서 이쪽을 노리고 있을 터다. 느긋하게, 다 잡은 사냥감을 끝장내려 하듯이.

"....상황이 예상하고 거꾸로 되어버렸는데."

장갑 안이 재차 축축해졌다. 열화상 센서가 나간 상황에서 단순한 광학 탐지나 음향 탐지로 체칠리아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콕피트를 열고 인간의 오감을 전부 쓴다면 모를까.

안타깝게도 나는 지금 철로 된 관짝에 있다.

잔해들 사이에서 나오는 미세한 금속성 소음도, 먼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바람의 낮은 울림도, 하나하나가 공격의 전조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체칠리아의 기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먼지 속에서 푸른 잔광을 흘리는 레이저 블레이드가 기체의 좌완을 향해 날아든다.

"왔나!"

경계하고 있던 덕에 반사적으로 백스텝을 밟으며 추진기를 분사, 뒤로 빠져나왔다. 레이저 블레이드가 허공을 가르며 내 기체의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블레이드 끝이 레이저 라이플을 스치며 상부를 갈아내듯 깊은 자국을 남겼다.

경고음이 울리고, HUD에는「무장 손상 경고」라는 문구가 깜박인다.

"하아... 하아..."

콕피트 안에서 숨을 고르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체칠리아는 다시 엄폐물 뒤로 몸을 숨겼다. 먼지 속에서 시야를 빼앗긴 나는 또다시 유리한 위치를 허락하게 될 것이다.

그래선 아까의 반복일 뿐이다. 불가시의 기습을 연이어 받다가 최종적으로는 리타이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관제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긴 어려우리라. 타개책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극적인 타개책이.

그러던 도중, 문득 손상된 레이저 라이플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잠시 침묵했다. 일부분이 녹아내리고 전선 피복이 튀어나온 외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이거, 해볼 만하겠는데."

감각이 섬뜩하게 맑아졌다.






반갑다 거진 한 달만이구나

연말이 다가오면서 회사가 대목을 맞이한 탓에 기업인 이 몸이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그리고 괴퍼르트들의 무장은 대체로 우리가 아는 넥스트용 무장의 전 세대 무장이라는 느낌

아직 노멀이 주력일 시대에 개발된 것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