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헤이즈는 마이크로 미사일을 무너진 건물에 기대어 막아낸 후 곧바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플라즈마 폭격을 피해 시가지에서 벗어났다.

"언제까지 그렇게 버틸 수는 없어, 러스티!"

물론 그 자리에는 진작에 배런 플라워가 기다리고 있었고 결국 스틸 헤이즈는 란세츠 RF 라이플의 총알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탄알 하나에도 크게 흔들리는 스틸 헤이즈의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러스티는 침착하게 자신에게 남은 기회를 계산했다.

'프레임의 충격흡수력이 확실히 떨어졌어. 그나마 리페어 키트 잔량은 넉넉하지만.... 이래서는 눈먼 파편에 맞고 한방에 갈 수도 있겠는걸? ACS 과부하가 온다면 무조건 죽을테고.'

하지만 러스티는 자신이 승리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올마인드를 공격하러 간 이구아수의 엄호를 맡았을 뿐, 전과 따위에 집착하는 베스퍼로서 행동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스틸 헤이즈는 배런 플라워가 엄폐를 포기하고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조준조차 하지 않은 채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러스티...."

어째선지 배런 플라워는 스틸 헤이즈를 끝까지 쫓아가는 대신 공중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나갔다면 추가적으로 공격을 허용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러스티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너, 루비콘을 구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오키프의 말이 러스티를 계속해서 잡아끌고 있었다.

"아르카부스가 자비롭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너도 아르카부스를 알잖아."

러스티는 오키프를 책망하고 싶지 않았다. 스파이끼리 친하게 지낸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기 때문이다. 이중 삼중으로 소속을 세탁해가며 서로에게 흘린 역정보로 죽은 사람들이 이미 한 트럭이었다.

"그래, 잘 알지. 주식처럼 사고파는 투표권과 로비스트가 정책을 집행하는 기업통치 말이야. 그런 세상으로 루비코니안을 팔아 넘기라고? 오키프, 이건 언젠가 일어날 운명이었어. 어울리지도 않은 스파이 흉내도 지치니까!"

"운명이라니. 보다보면 넌 변방계 출신이란 걸 숨긴 적이 없었지. 스네일에게 네 행동을 설명해주는 건 꽤나 힘들었어."

오키프는 스틸 헤이즈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아직 기회가 남아있다는 거다."

"무슨 기회? 스네일에게 돌아가서 목을 내밀라고? 해방전선 밖에 남은 길이 없다는 것쯤은 알텐데."

스틸 헤이즈는 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날아간 한쪽 팔 때문이 아니라, 항상 그래왔다. 같은 스파이여도 러스티는 직감에 의존하는 타입이었다. 자신에게는 없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지만 지금은 자신이 그 직감을 막아야할 때였다.

"그래, 그러니까 해방전선에만 남으라고. 아르카부스를 막는 데는 해방전선만으로 충분하니까. 코랄까진 필요 없어."

"....올마인드가 보냈다, 그런 건가. 너도 이중 스파이였군."

"스파이로서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린 아직 같은 인간이니까. 그래서 널 붙잡는 거다."

"루비코니안이 인간이라니, 눈물나게 고마운 표현이네."

"그래, 넌 코랄에 미친 인조인간이 아니니까. 이구아수나 레이븐은 죽여야겠지만 넌 다르다. 아직 인간으로 남을 수 있어."

오키프는 신입사원 러스티와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꼬질한 더벅머리 강아지를 사람꼴로 만드는데만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코드네임으로 개 이름으로 들고 왔을 때부터 네가 웃기는 녀석이라고 생각했어. 마구 달려들면서 일을 해결하는 모습도 싫지만은 않았지. 그러니까 널 막고 싶은 거야."

"...."

"아르카부스, PCA. 사악함에 한 없이 가까운 시스템이지. 하지만 적어도 인간의 것이다. 인간을 다스릴 존재는 인간 뿐이다. 사람이 아닌 코랄에게 지배받는다면.... 노예 이하로 전락하겠지."

오키프는 통신을 종료하고 기체에서 몸을 꺼냈다. 이렇게 소리쳐서라도 러스티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고 싶었다.

"나는 네가 남았으면 좋겠다. 러스티."






한동안 침묵 끝에, 스틸 헤이즈는 오키프에게 전할 대답을 골라냈다.

"인간이라.... 인간이 되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인지 몰랐어."

스틸 헤이즈는 지금이라도 오키프를 저격할 수 있었다. 란세츠를 들고서 맨몸의 파일럿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면 그만이었다.

"알아, 코랄 릴리즈가 일어나면 감당 못할 일이 시작되겠지. 남은 인생 동안 불타는 우주를 지켜봐야 할지도."

하지만 러스티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기로 했다. 오키프를 살리고 싶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 우주가 불타고 네놈들이 아껴온 아일랜드들이 전쟁터가 되는 걸 왜 걱정해야 하냐고? 애초에 가진 적도 없었는데!"

오키프를 죽이기 위해서는 조금의 부정확함을 허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 확실하게 끝장내야 했다.

"내 코드네임이 개새끼 이름이라고? 나는 네 코드네임이 어떤 화가였는지 알아낸 그 때부터 좆같았어! 네놈 눈에서 루비콘에서 보이는 건 메마른 풍경뿐이냐? 꽃, 사막, 유골. 루비콘에서 살아있는 걸 본 적 따위 없었잖아. 사실은 나도 그래.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시체밖에 못 봤지. 그러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거다."

엄폐물이 없는 상황에서 서로 총탄을 주고 받을 수는 없었다. 실력은 러스티가 더 낫더라도 스틸 헤이즈는 충격을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단 일격도 허용하지 않아야만 했다.

"러스티!"

스틸 헤이즈는 견제용으로 달고 다니던 3연장 플라즈마 미사일 무장을 스스로 해체했다. 오키프는 러스티가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길 바랬지만 동시에 다시 싸우기 위해 배런 플라워에 재탑승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짐승으로 전락하는 게 아냐. 시체가 생기를 가진 개새끼가 되겠다는 거다. 그러니까.... 얌전히 물리기나 해!"

스틸 헤이즈가 스스로 플라즈마 미사일 발사기를 짓밟자 거대한 유폭이 일어나면서 배런 플라워를 덮쳤다. 오키프가 조금만 늦었다면 맨몸으로 플라즈마를 뒤집어썼을 것이다.

보라빛 전류에서 해쳐나온 배런 플라워는 곧바로 펄스의 장막을 뒤집어쓴 채로 달려오는 스틸 헤이즈를 마주해야 했다.

제대로 된 보급 없이 워치포인트의 심층까지 돌파한 스틸 헤이즈의 장갑재는 이미 닳아 부서지기 직전이라는 점은 오키프도 짐작하고 있었다. 리페어킷을 써봤자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ACS는 마비될 터였는데도 펄스 아머의 지속시간에 의지해 스틸 헤이즈는 돌격을 선택했다. 유리한 고점을 점거한 채 무장을 소모시켜 안전하게 제압한다는 계획은 이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버텨야하는 쪽은 배런 플라워가 되었다.

"하지만 죽어라고 달려드는 짐승을 상대하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냐.... 오히려 지긋지긋할 정도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스틸 헤이즈는 배런 플라워를 향해 영거리 사격을 가했지만 배런 플라워는 침착하게 충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코어를 확장시켜 펄스 아머를 전개했다. 서로 함께 펄스 아머를 전개했다면 지속시간의 차이로 늦게 발동시킨 쪽이 유리하다는 것은 러스티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시간 싸움에서 배런 플라워가 앞서게 되었다.

유일하게 위협이 되는 것은 스틸 헤이즈가 끝까지 아껴놓고 있는 레이저 슬라이서였다. 계속해서 근접을 허용한다면 슬라이서 특유의 지속시간이 긴 회전으로 펄스 아머의 내구도를 뚫어낼 수 있었다.

오키프는 변수를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4각 특유의 호버링 성능으로 빠르게 고도를 높여가며 돌진하는 스틸 헤이즈의 기세를 한번 꺾어내면서 배런 플라워는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우선 플라즈마 탄을 쏟아부어 스틸 헤이즈의 경로를 가로막는 차단막을 만들어냈다. 스틸 헤이즈는 아무렇지도 않게 뚫어냈지만 방어막이 눈에 띄게 얇아졌다.

스틸 헤이즈는 회피를 포기하는 대신 어설트 부스트의 가속력을 더한 속도로 탄환을 쏘아댔다. 웬만한 파일럿은 버티기도 힘든 속도 속에서 조준을 유지하며 탄환의 충격력을 더한다는 이론상의 영역이었다. 그 것을 실현시키는 러스티의 실력에 오키프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머의 내구도 싸움에서 따라잡기에는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배런 플라워는 스틸 헤이즈의 코앞에서 미사일 컨테이너를 사출시켰다. 컨테이너가 그대로 직격하는 가까운 거리였다. 피하지 않는다면 아머의 한계를 넘어서는 유폭으로 스틸 헤이즈는 파괴될 터였다. 퀵 부스트로 피한다면 이미 어설트 부스트로 빠르게 소모되고 있을 EN이 버티지 못하고 스틸 헤이즈를 다시 땅바닥으로 내려놓을 것이다. 오키프는 러스티의 반사신경을 믿고서, 그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동시에 트리거를 당겼다.

그리고 그런 오키프의 기대를 배신하듯이 미사일이 가득찬 컨테이너는 배런 플라워 앞에서 폭발했다.

"더 높이 날아오르는 건.... 나다!"

그리고 스틸 헤이즈는 화염을 뚫고 지나와 배런 플라워에게 레이저 슬라이서를 겨누기 시작했다.

"아머의 내구도가.... 그런가, 터미널 아머였나...."

플라즈마 미사일을 자폭시키는 것이 단순히 눈가림이 아니라 스스로의 AP를 깎아내 터미널 아머를 작동시키는 행위였다는 것을 오키프가 깨달은 시점은 이미 늦었다. 훨씬 단단한 터미널 아머를 상대로 배런 플라워의 펄스 아머는 이미 너무 많은 공격을 허용했다. 그리고 방금 전의 폭발을 뒤집어쓴 것은 배런 플라워도 마찬가지였다. 계산을 마친 오키프는 배런 플라워의 펄스 아머가 뚫릴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펄스 아머를 발동시키기 직전 스틸 헤이즈가 뚫어놓은 관절부의 총알 구멍 사이로 레이저 슬라이서가 통과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배런 플라워는 추락하게 되어 다시는 누군가를 내려다 볼 수 없게 되었다.





"어이, 베타. 살아있었냐."

이구아수는 스틸 헤이즈가 박살났을 것을 생각해서 목이 잘린 이페메라 기체 한 대를 끌고왔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그래.... 이제 아르카부스한테는 죽은 척을 해야하겠지만. 올마인드는 어떻게 됐지?"

"이제 내 꺼야. 숨겨놓은 파츠와 정보 뿐만 아니라 코랄에 대한 비밀까지. 이제 아무나 잡아다가 강화인간으로 만들어줄 수 있어. 너도 해줄까?"

"아니.... 오히려 보상을 줘야하는 쪽은 나잖아. 소원이라도 있어?"

물론 이구아수가 해방전선과 협력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러스티는 이번에도 베스퍼의 것을 훔쳐오기로 했다.

"급하게 레이븐 쫓느라 미뤄둔 미션이 있는데.... 미안하지만 그게 워치포인트의 레드건 부대를 전멸시키는 미션이었어. 원한다면 죽은 척을 그때로 맞춰줄 수도 있겠지."

"흥미없어. 어차피 미시간 열명이 있어도 레드건은 전멸 확정이야. 그리고 너 정도로는 연습도 안되고."

"....역시 그렇게 나대야 내가 아는 이구아수지. 약한 대원으로 바꿔달라고 했으면 바로 쏴죽였을 거야. 좋아, 소원대로 네 상대가 될만한 강한 놈을 불러주겠어.

프로이트에게 이레규러가 나타났다고 전할께. 레이븐이 목표라면 베스퍼 1 정도는 쉽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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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늦어서 미안합니다....


오키프는 조지아 오키프라는 미국의 유명한 화가에서 따온 이름으로 보임. 엠블럼도 오키프의 작품의 오마주였고. 주로 미국의 고유한 자연풍경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했다고 함. 베스퍼 중에 유일하게 루비코니안제 무장을 쓴다던가 루비코니안이었을 스케치 화가 STV한테 잘 대해준다던가 보면 러스티뿐만 아니라 루비콘에 대한 호감이 있지 않나 프롬뇌가 돌아감.
미사용 대사를 보면 러스티한테 까인 것 같지만.... 화가 본인도 미국 원주민 문화예술에서 빌려와 자기 예술을 했다는 비판을 받음.
러스티는 진짜로 개 이름으로 쓰더라. 주로 갈색 강아지한테 러스티라는 이름을 붙여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