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적막하다고 할 수 없는 기계 구동음과 유지 설비들의 소음이 균일하게 울리고 있는 지하 시설.
나는 그 곳에서 깨어났다.
나는 과거, 어느 기업의 파일럿으로서 훈련받았었다.
결코 편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힘든 나날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황량한 전장에서 울리는 포성, 창공을 꿰뚫는 플라즈마는 내 것이 아니었으며, 그리 될 수도 없었다.
내가 붙잡은 것은 시뮬레이터 속의 조종간, 신경 접속 모듈.
무한한 공간, 무한한 적, 무한한 파츠 구성.
수천, 수만번도 넘는 교전이 계속 되었다.
구형 파츠들로 이루어진 4각 기체를 몰기도 했었고, 아직 상용화조차 되지 않은 신형 파츠들로 경량 2각 기체를 몰기도 했다.
블레이드, 파일벙커, 라이플, 샷건, 로켓, 그레네이드 런처.. 시뮬레이터 내부에 있는 무기는 모두 수도 없이 사용했었다.
적은 한기이기도, 여러기이기도 했다. 그들 모두는 내가 탑승한 기체와 비교해도 크게 뛰어나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체들이었다.
개중 가장 많았던 교전 시뮬레이션은 총 7기의 기체와 맞붙었던 교전.
기체 한계상 모두를 처치할 수는 없었으나, 제대로 피격된 것이 없다시피 해 판정승을 받아냈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 존재의의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강자를 참수하기 위한 참수대요, 기업이 물리적으로 그어내는 경계선이었다.
기업의 인내심. 즉, 선을 넘는 자, 그들을 처형하기 위한 필살의 수단.
그것에 어떠한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다만, 그저 충실히 명령을 이행할 뿐이었다.
나는 호불호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고, 인간다운 면모라는 것은 이해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추가적인 명령조차 없이 이 지하 시설에 방치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연구 시설도, 다른 인간들도 없는 공허한 시설.
이 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격납고 하나와, 약간의 자재들. 그리고 서버룸 하나뿐이었다.
감정이 없기에 이유를 알지 못했고, 의문을 가지지 않았기에 추론하지 못했다.
다만, 기업이 내게 준 존재가치만큼은 확실했기에, 자재들과 서보암, 드론들을 사용할 뿐이었다.
서버룸 내에 있는 기술들은 이전 시뮬레이터에 있던 기술들에 비하면 훨씬 뛰어났고, 동시에 뒤떨어졌다.
전투 도중 급속도로 자가수리를 시도할 수 있는 기술이 있으면서, 대기권에서 극초음속으로 무제한적인 비행은 불가능했다.
성계간 이동이 가능할 정도의 기술력과 규모가 있으면서, 여전히 개인으로 단체를 상대할 무력을 발휘할 수 있는 병기인 AC를 사용한다.
AC의 기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세대는 발전한 듯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나, 여전히 그 한계는 AC였다.
아쉽게도, 나는 그저 교전 시뮬레이터를 진행했을 뿐 공학적인 면모는 상당히 부족했기에 서버룸 내에 있는 기술들만을 사용해야했다.
심지어 내가 시뮬레이터 내에서 사용했던 수많은 모듈과 무장들은 모두 시뮬레이션에 불과했다는 듯 없고, 처음 보는 파츠들만이 자리했다.
하는 수 없이 프레임만 간신히 가릴 정도로 경량화하고, 무식할 정도로 부스터를 증설한다.
양 팔에는 어썰트 라이플을 장착하고, 등에는 웨폰 행어를 장비해 어썰트 라이플을 추가로 장비한다.
탄환 수만 부족하지 않다면, 나는 그 무엇을 상대로도 지지 않는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시뮬레이션이 그 근거였고, 근거를 토대로 AC를 설계했다.
그 뒤에 할 일을 알 수 없어 그저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항상 내가 대기 상태로 있으면, 명령이 내려졌으므로.
하지만 그런 나를 맞이한 것은, 외부 카메라를 통해 출력된 행성 전체가 불타버리는 것만 같은 대화재의 영상뿐이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갔다.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명령이 내려지지 않자, 나는 인정했다.
기업은 더이상 내게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나는 무언가를 행하기 위한 동력 자체를 잃었다.
나는.. 존재가치가 사라졌다.
다시 수년이 흘렀다.
내가 시뮬레이션 상으로 겪은 것은 일종의 로스트 테크놀로지 혹은 과거의 유산.
성계간 이동이 가능한 지금은 아마도 시뮬레이터 내부 데이터로부터 한참이나 뒤의 미래.
그런 막연한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여전히 나는 존재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기업으로부터 자기파괴 명령을 들은 것도 아니기에 다른 할 일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기에 나는 인근 정찰을 시작했다.
목표는 새로운 전장 학습.
내가 그것을 마주한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색, 혹은 도색조차 하지 않은 듯한 무성의한 커스텀.
산업용 AC 파츠를 개조한 듯한, 저렴하다고 표현해야할 AC.
오른손의 라이플 역시 구형인데다, 그나마 주의해야할 무장은 왼손의 펄스 블레이드 한자루.
하지만 의문인 것은, 좌측 등부분에 위치한 저 작은 컨테이너와 같은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장 상태를 보면 전투용 AC가 분명함에도, 저 컨테이너를 달아둔 것은 어째서일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븐, 미식별 AC.. 대응을!
아마도 여성, 이리라 추측되는 통신이 AC 내부 파츠를 통해 들려왔다.
어째서 통상적인 통신과는 다소 다른 파형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었으나, 그 것을 물어볼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상대 파일럿은 꽤 묵묵한 것인지, 곧장 어썰트 부스트로 접근해오며 라이플을 연사하기 시작했다.
..선을 그을 시간이었다.
상공에서 두 AC가 순식간에 근접하기 시작했다. 양쪽 다 라이플을 쏘아내면서도, 상대방의 탄환을 장갑으로 비스듬히 받아내며 충격을 최소화했다.
순간 얽히나 싶더니, 교차하며 멀어지고, 다시 맞붙는다.
강철이 비산하고, 탄환이 몰아친다.
미사일이 날아들면, 정말 인간인가 의심되는 급격한 연속 퀵부스트로 모조리 피해내고 근접하며 어썰트 아머를 사용한다.
어썰트 아머가 폭발하기 직전 순식간에 후방으로 도약하며 유효 범위에서 벗어난다.
냉각 시간이라는 것이 필요치 않다는 듯, 존재의의를 잃어버린 이는 중거리에서 사격하다 접근해 어썰트 아머를 터트리기를 반복하고.
존재의의가 종속되어버린 이는 연신 피해내고 탄막을 토해내면서도 직격을 노리며 기동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
으레 레이븐이라 불리는 이는 상대가 탄막이나 근접전은 모두 순식간에 파훼하는 주제에, 미사일 대응은 어색해하는 틈을 노렸다.
도심지가 익숙치 않아보이는 것을 노려, 복잡한 빌딩들 사이로 전장을 제한해가며 미사일을 쏘아내며 돌격해 코어에 킥을 날린다.
같은 인간임이 의심될 정도의 기량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우습게도 빌딩 중간을 파고들듯 쳐박히며 기동을 멈춘다.
선을 긋지 못했다.
시뮬레이션 결과는 모두 거짓이라는 듯, 제대로 커스텀조차 되지 않은 듯한 AC 단 1기에 의해 중파당했다.
이 AC가 파괴된다고 해도,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격납고에는 추가분의 AC를 만들만한 양의 자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언젠가 기업에게서 명령이 내려지기를 기다리며, 시설의 동력이 모두 끊어지는 날까지 존재해야할 뿐이겠지.
그리 억울하진 않다.
사라지고 없는 존재의의마저도 다하지 못한 내 자신에 대한 벌이라 생각하면, 그다지 씁쓸하지는 않다.
이제와서 씁쓸하다고 표현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시뮬레이션이 아닌 실전.
그러니.. 첫 실전을 겪은 뒤에야 감정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허탈, 공허, 허무, 탈력, 무기력..
생각보다 감정이라는 것은 더욱 마이너스적인 요소였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내게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한 것들을 사고하고 있자니, 예의 AC가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코어를 파괴하고자 한다면, 진즉에 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어쩌면 직접 콕핏을 열고, 파일럿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기를 바라는 악취미인걸까.
그렇다면 그에게는 제법 아쉬운 일이 될터였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추론 범위 밖의 것이었다.
"..이름은?"
쇠를 긁는듯한 중저음의 목소리. 이정도의 실력자라면 조금 더 전투광적인 목소리를 낼 것이라 생각했는데, 편견이었던 것일까.
승자의 권리를 누릴만한 것은 그다지 없을테니, 그의 물음에 답하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만족하게 해줄까.
"나는 이름도, 엠블럼도 존재하지 않아."
간결하나 확실한 답이라 생각했는데, 상대는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C4-621, 레이븐, 들개, 유해조수.. 다양한 이름들로 불리고 있다. 뭐, 뒤의 것들은 멸칭이긴 하다만.. 너도 무언가 하나쯤은 명칭이 있겠지."
확실히, 불렸던 것이라 생각되는 것은 있다. 그것이 이름으로 기능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원한다면 이것이라도 들려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라인의 소녀. 라인의 소녀라고 불려. 아무래도, 그런 이명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야."
6계의 라인의 소녀라... 오픈 월드로 기획됐으면 히든 보스였겠지 분명
수상하게 퀵부를 잘하는 - dc App
아 7명에서 알아챘어야 했는데 ㅋㅋㅋ 초음속 보고 음 4계인데 누구지? 하다가 뒤늦게 알았네 - dc App
ㅋㅋㅋ 심심해서 뒤적거리다가 재밌어 보이는 소재 발견해서 끼적임
7명에서 설마 했다
아 맞아 라인의 소녀는 EN 무제한, 아무 장애물도 없는 맵, 탄약 무제한, 미사일 금지 하에서만 활동 가능하다고 어디 일본쪽거 읽고 쓴거라 만약 틀린거면 지적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