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드 02, 너무 오래되어 사람의 발길이 끊겨버린 최초의 그리드 중 하나.


그리고 그 곳에, 위치를 알 수 없는 외딴 곳에 잠시 의식과 긴장감을 내려놓은 사람마냥 조금 멍하니 AC 루치페르의 콕핏 시트에 앉아 있던 레이븐은, 지금 열려 있는 회선의 대화 상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와 자신의 청각을 흔들고 나서야 흐릿하던 시선을 되잡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워치 포인트는 조용하더군.”]



발신자는 프로이트.


BAWS에서의 회식 겸 파티가 종료된 이후, 숙취 때문에 머리를 쥐어싸매던 러스티가 프로이트를 향해 왜 워치 포인트에 갔는지에 대해 쏘아붙였더니 튀어나온 그 이유란 다름이 아니라 코랄 릴리즈를 진행하려는 올 마인드와 이구아수의 소재지 파악을 위해서였다고 대답했다.


솔직히, 워치 포인트 심도 깊숙한 곳에 있는 구 기술연구도시의 경우 비록 루비콘 해방 전선이 한번 수색을 했다지만 구석구석 세밀하게 수색이 이루어지진 못했고, 이 때문에 이구아수가 생존하여 올 마인드와 접촉하게 되었으므로 혹시 모를 추가적인 위험요소를 차단하기 위해서라는 의미에선 설득력이 있는 행보였던지라 러스티도 별 말을 하지 못했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오키프마저도 말하기를.



그 녀석이 그렇게 성실한 짓을 했을 리가 없는데?



라고 인지부조화를 느끼는 대답을 했을 정도다.



[“사실, 코랄 릴리즈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었을 때가 좀 더 즐거웠다.”]



“생각 없이 싸움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인가?”



[“어째 욕 같은데....뭐, 틀린 말은 아니라서 반박은 못 하겠군.”]



“난 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프로이트, 그렇기에 과거의 모습에 대한 기억이나 정보 또한 없지. 무슨 변화가 자리잡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렇지만 스스로 열과 성을 다해 진심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레이븐의, 그동안 프로이트의 기행을 포함하여 지켜볼 수 있는 언행들을 전부 지켜봐왔기에 할 수 있는 담백한 평가에 회선을 잠기게 만든 잠깐의 침묵이 깨어진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칭찬이지?”]



“아마도.”



농담하자는 것도 아니고, 저 의미심장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처음으로 파안일소하고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고 했으나, 회선 너머로 전해져오는 서늘한 침묵의 기운을 눈치채고도 남을 육감을 지닌 프로이트는 잡담을 한 마디 덧붙이는 대신.



[“건투를 빈다.”]



지금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이해한다는 듯 무덤덤하지만 묵직한 응원을 한 마디 던졌고.



“너도.”



레이븐 역시 회선 너머에서 흘러들어온 프로이트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미세한 긴장감을 잡아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제 귀에 흘러들어온 응원을 짧게 똑같이 받아쳤다.


지금 레이븐의, AC 루치페르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하나 뿐인 붉은 점이 그를 향해 고속으로 접근 중이었고.



“...올 마인드제 AC인가.”



카메라 너머 포착된 화면이 확대되어 그 형상이 드러나 FCS의 락온 범위 안에 들어오자, 레이븐은 곧바로 전투 모드를 기동했다.


꼬리를 잡지는 못했어도, 꼬리가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적극적인 AB 돌격, 좌수의 커티스 리니어 라이플과 우수의 루드로우 머신건.


기억 속의 익숙한 그 어셈블리의 AC를 연상케 하지만 쉴드는 없었다. 그 기억의 AC였다면 분명 펄스 쉴드와 4연장 미사일이 탑재되어 있었겠고, 저런 과감한 근거리 난전을 시도하느니 쉴드를 전개한 채 거리를 재며 지속 소모전을 강요했을 터.


그러나 저 AC는 그런 파츠는 거추장스러웠는지 등이 휑하게 비어있을 뿐.


레이븐은 AC 루치페르의 다른 AC들을 상회하는 우월한 기동성과 출력을 활용, 이 악물고 추격해오는 마인드 알파 AC의 공격을 피하며 그리드 02의 무너져내린 철골 사이를 헤집듯 파고들듯 빠져나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EN 게이지가 바닥을 보이며 경고음이 울리기 무섭게 자세 제어 스러스터를 통해 잔여 EN을 방출, 뒤를 돌아보게끔 선회된 AC 루치페르의 오른쪽 매니퓰레이터에 들린 것은 터너 어설트 라이플이 아닌, 마제스틱 바주카 런처.


투캉!


마제스틱이 폭연을 내뿜으며 포탄을 토해내자, 그것은 타이밍 좋지 않게 똑같이 EN이 고갈되어버린 마인드 알파에 직격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검은 연막을 내뿜으며 추락한 마인드 알파는 곧바로 비스듬하게 튀어나온 철골에 코어와 각부의 연결 조인트를 관통당하며 양단되었고, 그것의 윗몸뚱이가 오른팔을 들어올려 최후의 발악 마냥 루드로우 머신건을 발사하려는 찰나, AC 루치페르가 급강하하며 순간적인 중력 가속을 각부로 가해 마인드 알파의 완부를 밟아 으스러뜨린 뒤.


키이이-


좌측 완부에 장착된 코랄 발진기를 전개, 살아있는 불꽃처럼 일렁이는 붉은 칼날을 가로로 휘둘러 마인드 알파의, 지성 없는 꼭두각시의 머리를 윗몸뚱이에서 분리해냈다.


너무나도 손 쉬운 상대였으나, 레이븐의 육감이 제 주인에게 외치길.



‘시작인가.’



철컥, 마인드 알파 한 기를 침묵시킨 AC 루치페르가 천천히 뒤를 돌자 그 안의 레이븐을 악의로 점철되어 반겨주고 있는 것은, 방금 전의 한 기는 애피타이저에 불과했음을 알리는 다섯 기의 마인드 알파 AC였다.


프로이트와 G6 레드가 증언했던 그 AC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마치 AC 헤드 브링어의 무장 구성을 부분적으로 차용한 듯, 각 마인드 알파 AC들의 무장들은 그것을 다양하게 섞어 놓은 느낌을 주었다.


한 기는 AC 헤드 브링어처럼 쉴드를, 다른 한 기는 똑같이 쉴드를 장착했으나 4연장 미사일 대신 4연장 핸드 미사일을, 아예 4연장 미사일을 둘 장비한 기체도 있었고, 매니퓰레이터에 마운트 된 실탄 화기들을 좌우 바꿔 장착한 형태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는 한 기의 마인드 알파는.



‘...좌측 견갑, 색상이.’



붉은 색.


저 마인드 알파에서 목소리 같은 건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 느낌이. 그 육감이 발산하는 무의식이 처절하게 외치며 경각을 울리게 하는 그 색이 저 마인드 알파와 함께했다.


어셈블리 역시 AC 헤드 브링어의 그것.


저 마인드 알파에, 저 꼭두각시 무인기에게도 콕핏은 존재할 터.


그렇기에 레이븐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걸 입 밖으로 꺼내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방열을 마친 코랄 발진기를 다시 전개한 AC 루치페르의 헤드 렌즈를 바이저가 덮으며, 이번엔 레이븐이 먼저 공세를 펼치고자 후면의 모든 부스터 유닛을 통해 엄청난 출력을 발산하며 돌진했다.






‘맞다. 확실히 그 방식이 맞아.’



앞서 격파했던 마인드 알파 한 기를 제외하고, 무장이 변형되어 있던 마인드 알파 넷은 문제시되지 않을 정도로 저열한 성능을 과시하듯 AC 루치페르에게 분쇄되듯 격파된 상황.


그러나 저 마지막 마인드 알파만큼은 절대 그렇지 않았고, AC 루치페르가 원본이 된 AC인 IB-C03: HAL 826에 비해 성능이 대폭 하향되었다 하나 인공지능에게 조종받는 마인드 알파로는 수십 기 이상의 물량공세를 펼치지 않는 이상은 뒤집어질 수 없는 상성을 무색하게 할 정도의 상당한 회피기동을 펼치며 오히려 AC 루치페르를 자신의 사거리 내로 끌어들여 거리를 유지했다.


레이븐의 생각이 적중했다고밖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전법.


그러나 다시 한번 서술하지만, 레이븐은 이 심증과 물증을 전부 합쳐 확증으로 삼고자 입을 먼저 열 생각 따위는 하고 있지 않았기에 마인드 알파가 펄스 쉴드를 전개하는 타이밍에 맞추어 코랄 발진기의 출력을 최대로 전개했고.


상대가 인간이든 인공지능이든 처절하게 회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불타오르는 코랄의 파도가 그리드 내부를 휩쓸며 제 가치를 잃어버린 금속 파편들을 녹여내고 집어삼켜 마인드 알파 AC를 향해 쇄도해, 결국 상대는 도약하여 부스터 출력으로 상승을 시도했으나 레이븐이 ACS를 강제로 조작해 코랄의 붉은 파도의 궤도를 틀어버려 조그마한 추적 성능을 심어주어, 결국 마인드 알파의 완벽 회피는 실패로 돌아갔다.


쿠웅-


하반신이 완전히 녹아내려 소멸하고, 코어 유닛의 하단부마저 고열에 그슬려 반쯤 녹아버린 AC 였던 것은 힘을 잃고 추락해 금속들이 얽힌 장판을 구르는 것이 최대.


매니퓰레이터에 마운트 된 리니어 라이플과 머신건까지 놓쳐버린 저 AC의 잔해 되는 것을 향해 AC 루치페르를 이동시키던 레이븐은 루치페르의 각부를 이용해 마인드 알파의 코어를 밀어내 뒤집고는, 그 코어를 향해 붉은 날이 이글거리는 코랄 발진기를 겨누며.



“이젠 발람의 흔적까지도 버렸나.”



열어놓은 공개 회선 속, 그 누구의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해도 이상함이 없을 상황에서 나지막히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발람의 흔적이라 한다면 멜란더 C3 풀 프레임으로 이루어져 있던 AC 헤드 브링어를 이야기하는 것이겠으나, 가장 마지막으로 보았던 헤드 브링어 역시 발람의 흔적을 마치 허물을 벗어내듯 하나씩 지워나가고 있는 상태였다.


이젠 그걸 넘어서, 상징색이랍시고 남겨두고 싶었을지도 모를 붉은 견갑과 무장만 제외하고서 모두 올 마인드가 만든 AC 부품으로 교체했다는 것은.



‘인간을 포기할 생각인가.’



그리 생각하던 레이븐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 없이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자신은 이 마인드 알파 AC의 콕핏에 이구아수가 존재하고 있다 상정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무섭게 냉정함을 되찾고는 코어를 짓이겨 파괴하기 위해 AC 루치페르의 왼팔을 들어올렸다가.



[“들개 새끼 주제에, 멋대로 타인의 선택을 평가하지 마라.”]



제 귀를 의심하며 멈춰세웠다.


G5의 이름을 버린, 그 이구아수의 목소리였으나 메마르게 건조한 인간의 그 평범한 목과 성대를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아니라, 기계적인 변조가 들어차 미세하게 메아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레이븐이 상대했던, AC 루치페르의 마지막 상대역이 된 이 마인드 알파 AC의 콕핏에 파일럿이 탑승해있고, 그 파일럿의 정체가 정말 이구아수일까.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목소리에서 인간성이 의도적으로 거세된듯한 느낌만은 지울 수 없었다.


강화 인간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시작한 레이븐.


그렇다면, 그 반대의 길을 걷게 될 이구아수는?


그 진실을 파헤치고자, AC 루치페르의 들어올려진 왼팔 위로 솟구친 붉은 검격이 마인드 알파 코어를 갈라 그 안을 드러냄과 동시에 레이븐의 두 눈동자가 충격으로 확장되었다.


파일럿이 있어야 할, AC의 코어 유닛의 시트 자리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죽지 말고 기다려라, 내가 꼭 죽여줄테니.”]



그러나 이 목소리만큼은 환청이 아닌 진짜 메아리로 들려와서, 레이븐은 갑자기 몸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인격체로서의 불쾌함을 참지 못하고 AC 루치페르를 움직여 AC의 발을 이용해 마인드 알파의 헤드 유닛을 밟아 뭉개버려야만 했다.


금속의 파열음 그 직후 그리드 내부를 휩쓸어 내려앉은 것은, 서늘한 침묵.


그 침묵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올 마인드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


거기에 또 다른 가능성 하나까지.



‘인간으로서의 육체를....포기했다고?’



강화 인간, 그 끝에서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재 의의를 버렸을 확률.


그 확률이 0퍼센트라는 결론만큼은 지을 수 없었다.








[“장거리 통신을 통한 블러핑이었을 가능성은 없었나?”]



“없었다. 회선에 이상 신호가 감지되지 않았어, 올 마인드가 그 정도의 세밀한 능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언급은 바로 오키프 너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그랬지, 그래도 확인은 필요했기에 한 질문이었다. 그렇다면 경우의 수는 단 하나 뿐.”]



자신의 거주지, 집이라고 부를 장소로 돌아와 그리드 02에서 있던 일을 주제 삼아 통화로서 대화하던 레이븐은, 오키프의 말에 이미 정해진 답을 조용히, 그러나 원치 않을 진실을 억지로 몸 속에서부터 끄집어내 강제로 내뱉듯.



“전뇌화인가.”



코랄을 이용한 강화 인간들에겐 그저 도시 괴담처럼만 내려져오는 인생 최후의 말로.


뇌 심부 코랄 디바이스를 장착한 구 세대 강화 인간들의 경우,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해 결국 육체가 파괴되어도 그 안에 축적된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프로그램 형식으로 변환하여 인간으로서의 육신을 상실한 채 그저 통 속의, 컴퓨터 속의 뇌가 되는 결말을 맞이한다고만 알려진 이야기.


핸들러 월터에게 옛적에 그런 이야기를 듣던 레이븐은, 월터의 입을 통해서 레이븐 자신에게만큼은 그런 운명이 찾아올 날을 절대 빌어주지 않을거라며 그 결말을 원치 않는다고 하긴 했기에 분명히 다른 하운즈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말은 해주었을것이다.


그렇지만 구 세대 강화 인간들에 대한 처우는 이게 평균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레이븐도 알고 있던 사실이기에, 그저 괴담으로만 치부되던 이 이야기가 어떤 곳에서는 현실로서 일어났을 것이 분명했고, 어쩌면 그 새로운 사례가 지금 이 행성에서 벌어졌다.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 설비를 어디서 구했고, 어떻게 구축했는지가 미지수지만 이런 전개만큼은 올 마인드가 큰 틀을 준비하여 나름대로 대비했다면 이해가 안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꼬리를 숨기는 법을 모르는건지, 아니면 일부러 꼬리를 드러내는건지 알 수 없군. 확실히 최초로 건설된 그리드들은 실질적인 거주 구역의 능력을 상실한 유령 도시다. 그곳을 거점 삼아 암약하고 있다면 가능하겠지.”]



“이구아수가 전뇌화를 했다는 가정 하에서, 둘 다 인간이 아니기에 그런 문제는 사소하고 의미 없는 단점이 될 뿐이니까.”



[“....레이븐, 이건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하기에 꺼내는 이야기일 뿐이다.

올 마인드가 그동안 접촉했던 구 세대 강화 인간들 중에서, 코랄 디바이스가 적출되어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전뇌화되거나 데이터를 응용한 무인 병기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확신만큼은 할 수 없어졌다는 걸 명심해라.”]



“...알겠다.”



[“우선은 내 쪽에서도 좀 더 알아보겠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니다. 이 말은 잊어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오키프가 무언가를 추가로 언급하려다가, 인간적인 장벽을 스스로 세워 말이 넘쳐흐르지 않게 자제하는 것이 호흡의 간격만으로도 느껴져서 레이븐은 그 흘러나오지 않은 말에 대해 질문하는 대신 그의 통화가 먼저 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단말기를 손에 쥔 채 허리 밑으로 내리고는 싸라기눈이 흩날리는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앞으로 찾아올 일을 예고하는지 모를 이 혹한의 기후는 공기를 싸늘하게 냉각시키려고 했으나.



“레이븐.”



그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감미로우면서 부드럽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레이븐은 옅은 미소를 띄운 채 몸을 돌려 제 뒤를 바라보아, 그 목소리의 주인 되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스테인리스로 된 찻잔을 두 잔 들고서, 제 자신에게 다가와 한 잔을 건네주는 그녀.



“..고마워, 에어.”



“이런거라도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네요.”



에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젠 의도하지 않게 그 날의, 멀지 않았던 이전 날 한밤중의 기억이 떠오르던 레이븐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열기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가 그것을 숨기기 위해 아직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돌아갈 장소, 그리도 돌아갈 장소에서 함께 있어 주는 존재.


그런 존재를 위해서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감내할까 생각하기도 했던 레이븐이었으나.



“잊지 마세요, 레이븐.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과....제가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거라는 걸.”



그런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에어임을 알았기에, 레이븐은 그저 그녀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는 것으로 대신 화답하며 웃음지을 뿐이었다.



“아, 그래도....

저번 밤 같은 상황은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요.”



그러다가 얼굴을 살짝 붉힌 에어가 빈 손을 들어올려 제 뒷목덜미를 손 끝으로 슬쩍 매만지며 감싸는 모습에, 레이븐은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녀에게 손을 뻗어 부드럽게 내려앉은 흰색 머리카락을 살며시 들춰올리고, 그 아래에 희미하게 낙인처럼 새겨진 흔적을 바라보고는 헛기침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미안.”



“미안해하실.. 필요까지는…”



그 흔적을 남긴 당사자가 레이븐 자신이라는 점에서 미안함이 들지 않냐면 그건 거짓이지만.



“...아팠어?”



“...부끄러우니 그만 물어봐주시면 안 될까요?”



이젠 부끄럽다는 감정까지 느끼고, 그걸 스스로 언급할 수 있게 된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손 끝과 입술이 간질거리는 이 낯선 느낌 때문에 레이븐은 이런 식으로 조금씩 에어를 놀리는 것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해버렸다.


그리드 02에서 경험한 일들, 그리고 방금 전 오키프와의 통화를 통해서 나누었던 심각한 내용의 대화마저도 순간 뇌리에서 잊혀져도 이상하지 않을 이 신선하지만 소중한 평화 속에서 레이븐의 마음에 불꽃을 지펴올리는 것이란 다름이 아닌.



“그래도...싫..싫지는 않았어요…”



이제는 서로를, 서로의 모든 것을 다 알아가고 느끼는 과정에 접어들었기에 보일 수 있는 저러한 반응.


제 가슴이, 제 마음이 간질거리는 감각에 입꼬리가 살짝 말려올라가려고 하는 것을 느끼던 레이븐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앞으로 조심할게.”



“...못 지킬 약속 같은건 하는 게 아니랬어요. 레이븐.”



“그런 말을 들으니 더더욱 약속을 어기고 싶어지잖아.”



루비콘의 해방자니 뭐니 해도, 이런 자신을 무장해제 시키는 이런 면모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레이븐의 인내심이 대단하냐면 그렇지도 않기에 결국 레이븐은 넘어버린 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지나쳐왔기에, 이제는 선을 신경쓰지 않기로 결정했고.


결국, 에어는 못 이기는 척 하고 레이븐에게 한번 더 져주는 선택지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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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다시 등장한 이구아수


그리고 다시 등장했는데 이번엔 심상치 않아진 이구아수다


어째서 본편 집적 코랄 도달 알트미션에서 죽었는데 어떻게 최종보스로 등장할 수 있었는가? 에 대해서는 내 문학 설정에선 이렇게 묘사했음


코랄 디바이스가 이식된 강화 인간들의 전투 데이터가 디바이스에 축적되고, 그 축적된 데이터를 프로그램화 시킨 결과물이 그 최종보스다


라는 생각임


그리고 순애 분량도 넣어뒀음


아무튼 이번 글도 읽어준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다들 메리 크리스마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