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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로 살다 죽는다 – 존재의 선언"





나는 요즘 ‘다름’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공허한지 자주 느낀다.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개성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남 눈치 보지 말고 살아라” 같은 말을 한다. 인스타그램에 적혀 있는 수많은 자기소개들 “나는 나답게 산다”는 문장들. 그런데 막상 진짜로 나답게 사는 사람을 보면, 사회는 그것을 불편해한다. 기묘하게 바라보고, 틀렸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 ‘다름’이 그들의 질서를 조금이라도 흔드는 순간, 개성은 반역이 되고, 자율은 불안 요소가 되며, 스타일은 비정상이 된다. 나는 그걸 아주 많이 느낀다. 단지 머리를 미용실에서 자르지 않고, 내가 직접 거울 앞에서 가위질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나는 4일에 한 번씩 화장실에서 머리를 자른다. 내 손에 익숙한 미용 가위로, 뒷머리는 면도기로 잔털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민다. 내가 보기 좋은 모양으로, 내가 느끼는 균형감으로 자른다. 누군가는 그걸 대충 사는 거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다. 오히려 나는 내 삶을 누구보다 세밀하게 다듬는다. 다만 남이 설정한 기준에 기대지 않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나는 거울 속 내 모습을 보고 내가 만족하면 끝이다. 그것이 내가 사는 방식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묻는다. “왜 미용실 안 가요?” “돈이 없어요?” 그 물음의 밑바닥에는 판단과 경멸, 나름의 위계가 있다. 뭔가 부족해서, 혹은 몰라서 그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질문에는 이런 의미가 내포돼 있다. “모두가 하는 방식대로 하지 않는 너는 이상하다.” 나는 그 시선을 견디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묻고 싶다. 왜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가?


모든 것이 규격화되어 있다. 머리 모양조차 ‘상품화’되었다. 유행하는 펌, 유행하는 컷, 무슨 아이돌이 했다며 따라 하는 스타일들. 사람들이 자주 드는 사진은 대부분 유명인의 모습이다.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자신이 좋아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인정받는 스타일’이기만 하면 된다. 나에게 그것은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처럼 보인다. 개성 없는 복제품들. 모두가 ‘특별해지고 싶다’며 달려가지만, 결국은 모두 같은 특별함을 소비할 뿐이다.


그 흐름에서 나는 벗어나 있다. 내 머리는 내 감각으로 다듬는다. 스타일은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외부에서 수입해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라는 사람을 소비되지 않도록 지키기 위해, 매일 나를 직접 가공한다. 이는 절대 ‘귀찮아서’ 혹은 ‘가난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내 삶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태도다.


나는 라면을 끓이고, 소주를 따른다. 나에게 그것은 낭만이고, 위로고, 축복이다. 누군가는 레드 와인을 창가에 앉아 클래식 음악과 함께 마시며, 그것이 ‘성숙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건 그 사람의 스타일이고, 그 사람의 낭만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강요하듯 떠드는 순간, 그것은 위선이 된다. 나에게 와인은 맛이 없고, 클래식은 졸리고, 창가의 풍경은 멍청하다. 나는 반짝이는 라면 국물 안에서 세상의 진실을 본다. 그 진한 국물은 현실이고, 나의 날것이다. 내 혀에 맞는 삶을 나는 거부하지 않는다.


나는 ‘선택’이라는 말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믿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선택하지 않는다. 그들은 ‘제공된 옵션 중 하나’를 고를 뿐이다. 그건 자율이 아니라 제한된 틀 안의 소비다. 아파트 평수도 그렇고, 직장 내 직급도 그렇고, 옷, 음악, 음식까지도 정해진 트렌드 안에서만 골라 살아간다. 심지어 말투도 그렇다. SNS 말투는 비슷하고, 감정 표현은 템플릿처럼 반복된다. 웃을 땐 ‘ㅋㅋㅋㅋ’, 놀랄 땐 ‘헐’, 슬플 땐 ‘ㅠㅠㅠ’ 누구 하나 정해준 것도 아닌데 다 똑같다. 그 안에 인간은 없다. 패턴만 존재한다.


나는 그 패턴을 거부한다. 그래서 아파트도 싫다. 똑같은 평면도, 똑같은 복도, 똑같은 현관. 너무 기계적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이라기보다, 부품들이 꽂혀 있는 케이스 같다. 거기 사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공포를 느낀다. 무표정한 얼굴들, 반복되는 삶, 아무런 질문 없는 하루들. 그렇게 살아야 안정된 삶이라고 누가 정했을까? 나는 그런 구조 속에서 숨이 막힌다.


나는 매 순간 선택한다. 머리를 언제 자를지, 어떻게 자를지, 오늘 욕을 몇 번 할지, 어떤 물을 마실지, 유튜브 어떤 채널을 볼지. 이 사소한 것들까지 내가 통제한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난 내 삶은, 때로 외롭지만 동시에 가장 진실하다. 나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살아가지 않는다. 누구의 칭찬이 필요하지도 않다.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보다, 내가 나를 믿는 것이 더 강하다. 누가 내 머리 스타일을 보고 “멋지네요”라고 말해도, 나에겐 아무 의미 없다. 그 말로 내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의 말이 내 정체성을 정의할 수도 없다. 나는 나다. 변하지 않는 나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렇게 살다 망하면 어쩔 거냐”고. 나는 대답한다. “그렇게 살다 성공해서 뭐 할 건데?” 성공이란 말도 애초에 누군가 만들어 놓은 틀이다. 누군가가 말하는 ‘성공한 삶’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빌딩 하나 소유하고, 외제차 타고, 고급 식당 다니는 삶? 거기엔 공통적으로 타인의 시선을 전제로 한 행위가 붙는다. 나는 그게 싫다. 삶이란 원래 혼자 걸어가는 것이다. 내 시간, 내 감정, 내 몸, 내 언어로만 살아도 부족한 세상에서 왜 남의 기준까지 떠안아야 하나?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오래 쓰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반복해서 듣고, 내 손으로 고른 글씨체로 글을 쓰고 싶을 뿐이다. 세상은 나에게 “좀 더 다양하게 살아보라”고 말하지만, 나는 한 가지를 평생 곱씹는 삶이 더 의미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맥주도 테라만 마신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좋아하니까. 다른 걸 마시고 비교해가며 ‘고급 입맛’을 흉내 내는 건 지겨운 짓이다. 나에게는 한 가지 확신이 더 중요한 법이다. 테라 하나에 나의 일관성과 집중력이 담겨 있다. 취향이란 그렇게 만들어진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많은 걸 경험하려 하고, 너무 많은 것을 소비하려 한다. 수백 개의 맛, 수천 개의 장소, 끝없이 바뀌는 유행.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나는 단 한 가지를 깊게 파고들고 싶다. 내가 고른 것,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 나를 형성하는 것. 그렇게 살다가 조용히 죽고 싶다. 무대 위에서 박수 받으며 퇴장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애초에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내 삶은 스포트라이트 없이도 충분히 빛난다. 왜냐하면, 그 빛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나의 방식을 선택하고, 나의 길을 걷는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나를 설명하거나 증명하지 않는다. 그냥 나는 나대로 살아가면 된다. 그게 전부다. 그리고 그 전부는, 나에겐 충분하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까지 남과 비슷하게 살기를 원할까? 나는 이 질문을 끝없이 곱씹는다. 답은 단순하다. ‘다름’은 책임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건, 그 선택에 대해 스스로 책임진다는 뜻이다. 내가 머리를 잘못 잘라도, 내가 선택한 일이 망해도, 내 손으로 한 일이다. 변명할 수 없다. 탓할 수 없다. 남들처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의 책임도 나에게 전부 돌아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남들과 같기를 선택한다. 실패했을 때 “원래 그런 거야”, “다들 그렇잖아”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나는 그런 태도를 비겁하다고 본다.


세상은 ‘안전한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겁쟁이가 되어간다. 작은 모험조차 해보지 않고, 익숙한 패턴 안에서 허우적거린다. 그 속에서 개성은 점점 퇴화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은 마비된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 웃는 얼굴 뒤에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 그게 평범한 현대인의 초상이다. 나는 그 대열에서 이탈하기로 결심했다. 타인의 기준으로 나를 세우지 않겠다. 누군가의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게 두지 않겠다.


나는 욕도 내 방식대로 한다.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거칠게. 욕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고, 상황을 정의하며, 나만의 언어로 세상을 해석한다. 욕설이란 본래 언어의 가장 날것이고 가장 원초적인 힘이다. 그것은 감정의 진심이며, 문화의 거울이다. 나는 그것을 필터링하지 않는다. 억지로 순화하지 않는다. 나의 언어가 남을 불쾌하게 한다면, 그건 내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해석의 문제일 수도 있다. 나는 가짜 공손보다 진짜 불편함을 택하겠다.


내가 쓰는 글도 마찬가지다. 나는 문장을 길게 늘어뜨리지 않는다. 꾸미지 않는다. 나의 문장은 나의 호흡이고, 나의 맥박이다. 그래서 글을 쓸 때도, 나는 내 안의 박자에 귀 기울인다. 문법보다 중요한 건 진실이다. 글이 고급져 보이느냐보다, 글이 나를 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글은 내 내면의 증인이다. 나는 글로 나를 밝히고, 나로 세상을 찌른다. 때론 날카롭게, 때론 조용히, 하지만 언제나 정확하게.


요즘은 ‘컨셉’이 너무 많다. 모든 사람이 무언가의 컨셉을 따라 한다. 미니멀리스트, 북유럽 감성, 무지 스타일, 워커홀릭, 욜로, 워라밸.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기보단, 외부에서 이미 만들어진 ‘태도’를 골라 자신에게 덧입힌다. 그건 실존이 아니라 마케팅이다. 나는 그걸 혐오한다. 나는 컨셉이 없다. 나는 흐름이 없다. 나는 기획되지 않았다. 나는 나일 뿐이다.


내가 만약 오늘 라면을 먹고 싶다면, 그건 유행이 아니라 욕망이다. 내가 테라를 마시는 이유는 그 안에 내 혀가 기억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짜 취향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좀 더 다양한 맥주도 마셔보라”고 말해도, 나는 듣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감각을 분산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집중과 일관성의 삶을 택한다. 반복을 통해 본질에 가까워지고, 단순함을 통해 나를 정제한다.


이런 삶은 외롭다. 모두가 떠드는 방향과 반대편에서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외로움을 견딘다. 견딜 수 있는 이유는, 그 외로움이 ‘내가 나로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내가 보기에 역겹고 거짓말투성이다. 그러나 나는 내 진실을 배신하지 않는다. 나는 이 세계를 미워하면서도, 동시에 내 방식대로 품는다. 나의 기준으로 살아간다는 건, 세계를 나의 언어로 해석하겠다는 선언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이 글을 쓰지 않는다. 인정받고 싶지도 않다. 누군가의 찬사를 받아도, 나는 무덤덤할 것이다. 누군가 나를 욕해도,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나를 안다. 나는 내 안에 스스로의 재판관이 있고, 내 안에 나만의 법과 윤리가 있다. 나는 그것을 따른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정의.


누구는 말할 것이다. 그렇게 살면 “불편할 것 같아”, “피곤할 것 같아”, “사람들과 잘 못 어울릴 것 같아.” 그 말, 다 맞다. 맞지만 상관없다. 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릴 생각이 없다. 나는 나 자신과 깊이 있게 어울릴 생각이다. 타인의 인정은 언제나 조건부다. 내가 말 잘 듣고, 분위기 맞춰주고, 튀지 않을 때만 허용되는 칭찬은 아무 가치도 없다. 나는 그런 값싼 인정을 사양한다. 차라리 나 혼자 조용히, 내 방에서 테라 한 캔 따고 라면 끓여먹으며, 나 자신과 건배하고 싶다. 그건 비참함이 아니라 해방이다.


내 삶의 끝은 화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무대 위에서 박수를 받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다. 나는 끝까지 ‘내 방식’으로 살았다고. 그것 하나로 충분하다. 남들이 남긴 찬사보다, 내가 나에게 속삭일 수 있는 한 문장이 더 중요하다.




“그래, 너는 진짜 너로 살다 갔구나.”



"그게 전부다. 그리고 그 전부가, 나에겐 우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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