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과 조언 산업에 대한 비판"
우리는 누구나 아프고 힘들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주 접하는 세상은, 그 아픔 위에 화장을 하고, 고통을 성공으로 포장한 사람들의 쇼로 가득하다. 책을 쓰고, 방송에 나오고, 강연장에서 마이크를 쥔 자들이 말한다. "웃어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너 자신을 믿어라", "고통은 성장의 밑거름이다". 그 말들, 그 문장들, 그 웃음들. 과연 진심일까? 아니, 그 이전에, 그것들이 진짜 경험에서 나온 것인가?
진정한 고통은 말이 없다. 망해본 사람만이 안다. 진짜로, 인생이 바닥까지 무너져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입을 닫게 된다.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아무에게도 조언할 수 없다. 왜냐면 그 상황에선 아무 말도 위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언을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덜 망했기 때문이다. 아직 냉장고에 먹을 게 있고, 아직 병이 없고, 아직 사랑받고 있고, 아직 지탱해줄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서 웃음을 말하고, 행복을 말하고, ‘이겨내라’는 말을 내뱉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한 삶을 살아본 적 없는 자의 착각이며,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자의 무책임한 자기 도취다.
왜 인간은 자신이 아직도 온전히 남아 있을 때, 남을 가르치려 드는가? 왜 쓰러져 본 적 없는 자들이, 아픔을 말하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그들의 ‘밥벌이’이기 때문이다. 인생 조언, 심리학 강연, 동기부여 콘텐츠, 인생 성공 스토리. 이 모든 것은 상품이다. 웃음도 상품이고, 눈물도 상품이며, 자기계발서도 상품이다. 그들은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고통을 상품화할 수 있는 것이다. 병든 자가 병을 팔 수 있겠는가? 정신이 망가진 자가 타인의 정신을 책임질 수 있겠는가?
자칭 ‘행복 전도사’들은 그들이 이야기하는 ‘긍정’이 실제로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말한 그 ‘긍정’으로 스스로를 살릴 수 있었는가? 아니다. TV에 나와 웃으면서 모든 이들에게 “웃으라”고 말하던 자, 인생을 웃음으로 이겨내라고 주장하던 그들은 결국 병을 이기지 못했고, 말년에는 고통에 허우적거리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그들의 말이, 그들의 조언이, 그들의 철학이 그 자신조차 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 이것은 위선의 종말이며, 위로의 산업이 갖는 본질적 결함을 폭로하는 실례다.
인간은, 결국 다 거기서 거기다. 누가 더 강하고, 누가 더 약한 게 아니다. 조금 더 일찍 망하거나, 조금 더 늦게 무너질 뿐이다. 그런 인간들이 서로를 판단하고, 위로하고, 가르치려 든다. '내가 겪은 고통은 너보다 더 컸으니, 내 말을 들어라'는 식이다. 그러나 고통은 비교할 수 없다. 누군가의 작은 상처가, 다른 누군가에겐 삶을 끝내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마치 고통의 척도를 알고 있다는 듯 말한다. 철학자는 말한다. “삶이란 고통을 수용하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는 말한다. “우울은 마음의 감기다.” 연예인은 말한다. “웃으면 행복해진다.” 과연 그들은 그 말의 무게를 진정 이해하고 있는가?
자신의 인생이 순탄했기에, 그들은 감히 타인의 인생을 분석하고 평가하며 조언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 조언은 철저히 기만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조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진짜 망한 사람은 말이 없다. 진짜 바닥을 친 사람은, 웃지 못한다. “웃어보세요, 그러면 나아집니다”라는 말은, 웃을 힘이 있는 사람에게나 통하는 이야기다.
인간의 본성은 인생이 망했을 때 드러난다. 어떤 철학도, 어떤 이론도, 어떤 훈계도, 인생의 절벽 앞에서는 의미를 잃는다. 그러니 ‘가르침’을 직업으로 삼은 자들이여, 조심하라. 당신이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 당신은 그 말의 무게를 짊어져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무게를 짊어질 각오 없이 말한다. 왜냐하면 그 말은 그저 ‘직업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강연에서 던지는 ‘삶의 통찰’은 대개 책에서 베껴온 것이고, 자기계발서의 문장들은 수천 번 복사된 진부한 프레이즈일 뿐이다. 그 속에 진짜 삶은 없다.
세상을 가르치려 드는 자, 그 순간 이미 자기도 모르게 자기를 신격화하고 있다. ‘내가 아는 것이 너보다 많다’, ‘내가 겪은 것이 너보다 깊다’는 환상 속에서, 그는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고 있다. 자기가 신이라도 된 양, 모든 고통은 극복 가능하고, 모든 절망은 희망으로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오만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인간은 무너진다. 인간은 견디지 못하고, 인간은 포기한다.
웃음을 팔고, 희망을 상품화하고, 고통을 예쁘게 포장하는 자들. 그들은 자기가 남을 돕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사명감’이라는 명분을 내세운다. 하지만 그 사명감은 현실에서 자신이 굶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정당화일 뿐이다.
이런 사회 속에서 진짜 잘난 사람은, 남을 가르치지 않는다. 왜냐면 그는 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다르며,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는 걸. 그는 겪어봤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알고 있다. 가르치려는 순간, 그 말이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그런 사람은 강연장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그는 조용히 살아간다. 조언을 밥벌이로 삼지 않는다.
진짜 무너진 사람은, 살아남는 것 자체가 싸움이다. 그런 사람에게 "이겨내라", "너 자신을 믿어라", "웃어라"는 말은 칼이다. 그들은 살아보지 않았기에 쉽게 말할 수 있다. 살아봤다면, 감히 말하지 못한다. 고통은 말이 아니라, 함께 있어주는 존재로 극복되는 것이다. 그것도 극복이 아닐 수 있다. 그냥 하루를 또 버티는 것뿐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조언자’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당신이 말한 그 철학, 그 정신력, 그 긍정의 힘이, 당신 인생이 망했을 때도 작동하던가? 당신이 병들고, 가족을 잃고, 모든 걸 잃었을 때도, 과연 웃음이 모든 것을 해결했는가? 당신의 조언으로 당신 자신은 구원받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제발 조용히 해라. 방송에서 주접 떨지 마라. 강연장에서 감동 포장하지 마라. 책으로 인생을 팔지 마라. 네 인생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얼마나 고통을 이겨냈는지 팔아가며 타인의 마음을 ‘컨텐츠’로 삼지 마라. 그 고통은 네가 소유한 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네 안에서 조용히 정리되어야 할 이야기이지, 강연 무대 위에서 박수받기 위한 포장지가 아니다.
너는 지금도 말하고 있겠지. “내가 어떻게 이겨냈는지 알려줄게”, “네 고통도 결국 나처럼 끝나게 될 거야.” 하지만 너는 그걸 안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왜냐면 고통은 결코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그 ‘살아내는’ 과정을 낱낱이 견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네 인생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기에, 그렇게 당당히 떠들 수 있는 것이다.
너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사람을 만나고, 운 좋게도 지지해줄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네가 마치 '그 힘든 고통을 내가 극복한 결과'인 양, ‘삶의 스승’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들 앞에 서 있다. 이것이야말로 모순이며, 인간의 위선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정말 너는 네가 한 말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 인생이 완전히 망했을 때, 진짜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지금처럼 확신할 수 있겠는가?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고, 아무도 네 곁에 남아 있지 않으며, 아무도 네가 누군지도 기억해주지 않는 그 날이 왔을 때도, “희망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인생은 단순하지 않다. 쉽게 정리되지도 않고, 공식처럼 적용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이들이 공식처럼 떠든다. “고통은 기회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행복은 선택이다.” 이 문장들은 몇십 년째 자기계발 시장에서 팔리고 있는 낡은 문장들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고통은 기회가 아닐 수도 있고, 실패는 실패로 끝날 수도 있으며, 행복은 선택지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람은 어떤 날에는 아무리 선택하고 싶어도 선택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말한다. 선택하지 않은 것은 너의 의지 부족이라고. 그러면서 고통마저 ‘책임 전가’의 논리로 포장한다. “그건 네가 감정 조절을 못한 탓이야.” “너는 아직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러면서도 자신은 무너졌을 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남탓을 하며, 끝내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 자신이 그렇게 가르치던 방법론으로도 자신을 구제하지 못하면서, 왜 그토록 자신 있게 말했는가? 그것은 자기확신이 아니라, 밥벌이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을 ‘말’로 살아가는 자들 – 작가, 철학자,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교수, 방송인, 연예인, 강사 등 – 이들이 과연 얼마나 자신이 말한 것을 자신에게 적용해봤는지, 그것을 끝까지 견딜 수 있었는지 물어야 한다.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병이 나고, 우울해지고, 삶을 포기한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실패’가 아니다. 이것은 ‘조언 산업’의 한계이자 붕괴다.
세상을 향해 훈계하던 자가, 결국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무너진다. 그들이 떠들던 희망과 웃음, 자기 수양, 마음 다스리기, 철학과 논리 – 이 모든 것이 실전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숱한 사례에서 보아왔다. 그것을 아직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그들이 아직 그 고통의 깊이를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진짜로 무너져 본 사람은, 감히 그런 말을 반복할 수 없다.
결국 인간은, 위선의 동물이다. 모두가 위로를 말하지만, 자신도 위로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숨긴다. 모두가 가르침을 설파하지만, 정작 자기 삶은 그 가르침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모두가 누군가의 인생을 구하려 하지만, 자기 인생도 구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말은 점점 가벼워지고, 조언은 점점 폭력이 된다.
우리는 이제 말하는 자보다 묵묵히 버티는 자를 신뢰해야 한다. 책을 낸 사람보다, 책 없이도 오늘 하루를 살아낸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카메라 앞에서 긍정을 외치는 자보다, 침대에서 눈도 뜨기 힘든 상태로 살아남은 사람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면, 진실은 쇼가 아니라 침묵 속에 있기 때문이다.
방송에 나와 고통을 웃음으로 이겨내라 말하던 그 사람,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우리가 조롱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모두 직시해야 할 진실이다. “웃어라, 웃으면 행복해진다”고 외치던 그 말의 허구를, 자기 생으로 증명해준 사람이다. 고통은, 웃음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미뤄질 뿐이다. 그리고 결국, 그 웃음 뒤에 있는 진짜 감정은 반드시 드러난다. 그때, 사람은 무너진다.
그 무너짐 앞에서, 인간의 본성이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는 깨닫는다. 그동안 떠들던 모든 말들이, 얼마나 가볍고 무의미했는지를. 그래서 진짜 잘난 사람은 침묵을 선택한다. 그는 누군가를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그는 굳이 자신의 삶을 포장하지 않는다. 그는 강연장에서 눈물을 팔지 않는다. 그는 책으로 인생을 팔지 않는다.
"그는 조용히 살아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짜 힘을 가진다. 말하지 않고도, 삶으로 증명하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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