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덕통사고
고백하거니와 필자가 덕통사고를 당한 건 꼴랑 20분만이었다. 재방하던 걸 잠깐 본 건데 한 방에 훅하고 들어온 거지.
첫끗발이 개끗발이라고 하필 그 장면은 5화의 청담동 스테이크 하우스 이후 박도경과 서해영의 말다툼 장면이었다. 좋았니 삼연타에 많이 놀랐다. 작가가 라임 좋게 대사를 짜주었겠지만 그걸 리듬감 있게 잘 치는 건 또 다른 문제거든.
저 대사를 저렇게 치다니 저 여배우 누군지 몰라도 연구 많이 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필자는 사실 서현진이 누군지도 몰랐다. 원래 드라마도 티비도 잘 안 본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대사의 구성과 인물간의 관계였다. 까놓고 말하자면 좋았니하는 대사는 전여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현 남친에 대해 화를 내는 여자친구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이 '내 손목 잡았잖아'드라.. 거기서 갭을 느꼈다. 애들은 사귀는 사이는 사이도 아닌데 왜 전여친 이야기를 하니마니로 싸웠을까.
여자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나 싶었는데 남자의 반응도 신선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이 장면에서 박도경의 연기가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사귀지도 않는 여자가 어째서 전 여자친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느냐하고 묻는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것 같은가?
황담함, 어이없음, '이게 지금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하는 거지? 지가 뭔데' 라는 식의 분노 등등 일 것이다.
필자가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정말 화가 나서 으르렁 거렸을 것이다. 박도경에겐 더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겠지. 어깨빨도 있고 싸늘한 인상도 있으니 성큼 다가가서 대형견처럼 으르렁 거리며 '그걸 내가 왜 말해야하는 건데'하고 대사를 쳤다면 꽤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후의 박도경의 반응을 보면 약간의 캥김과 엉뚱하게 손목 잡아서 엄청 미안하다는 소리였다. 이걸 남자어로 번역하자면 '우리 사이에 손목 좀 잡은 걸로 화를 내냐?'정도가 될 것이다. 여자가 그런 걸로 화를 내니 민망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따지자니 속 좁은 놈 될 거 같고... 거기서 또 황당했지. 니들 사귀는 사이 아니라며... 왜 삐치냐?
그래서 찾아보게 된 것이다. 이런 식의 대사구성과 모호한 인물표현은 작가가 마음 먹고 이러지 않는 이상 힘든 일이니까. 지금 돌이켜보면 거기서 멈추었어야 했다. 친절한 드라마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을 때 멈췄어야 했던거지. 1화~5화까지 정주행하고 난 뒤에는 이미 많은 것이 늦어버린 다음이었다.
현망진창 되버린 것. 결정적인 장면을 보고 말았거든.
2. 작가의 의도인가 우연인가
3화의 박도경 파혼 고백씬에서 필자가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은 작가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던 대사 한 줄이었다.
서해영: "만약에 내가 완전히 사라지고 걔가 된다면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난 걔가 되기로 선택할까? 안하겠더라구요. 난 내가 여기서 좀만 더 괜찮아지길 바랬던 거지. 걔가 되길 원한 건 아니었어요. 난 내가 여전히 애틋하고... 잘 되길 바래요. 여전히."
이 때 이 장면에서 필자는 지금껏 보아오던 서해영이 아니라 서현진이란 배우 그 자체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캐릭터가 아닌 배우 본인의 진심과 진정성이 눈에 들어왔달까. 한 서른 번 정도 돌려보고 또 돌려보았는데... 아무리 봐도 이건 배우 본인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발랄하고 철딱서니 없고 자존심 강해서 힘든 티를 못내고 평범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이쁜 서해영과의 갭이 순간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했개 때문에 나타나는 간극. 만약 그 턱의 떨림과 시선이 정말 연기였다면 서현진이란 배우는 글로벌로 가도 될 듯.
하여튼 나중에라도 기회가 있다면 꼭 물어보고 싶은 부분이다.
사실 전해영에 관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기는 했었다. 어떤 대사나 특정한 행위 때문이 아니라 전해영이란 캐릭터 자체에게 주어진 특성 때문이었다.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고 사랑을 갈구하며 진실한 내면을 보이는 것을 꺼려하는 전해영이란 인물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작가가 일부러 이 캐릭터를 이런 식으로 구성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까놓고 말해보자.
박도경을 대중으로 전해영을 연예인으로 치환하여 본다면... 전해영의 성향은 연예인들의 일반적인 성향과 동일하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끝없이 갈구하면서도 이미지라는 것에 매어 여간한 기회가 아니라면 쉽게 자신의 본질을 타인에게 보여주기 힘든 삶. 화려하지만 동시에 가장 외로운 직업.
전해영을 연기하는 전혜빈은 의외로 캐릭터와 공감하고 몰입하는 것에 별 다른 어려움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름이 같은 캐릭터를 가진 두 여배우에게 자기자신의 이야기를 끼워넣는다는 게 우연일까 그저 필자의 착각일까.
물론 몰입을 위해 배우와 캐릭터를 유사한 상황에 빠뜨리는 경우는 사실 많다. 공감갈만한 설정이나 비슷한 경험, 현재 자신이 느끼는 불안감 등을 유사하게 배치함으로서 몰입과 유사성을 끌어내고 좀 더 쉽고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기교 같은 거 말이다.
제작비와 기간이라는 한계 때문에 가장 극적이고 위험천만한, 감정적으로 가장 격렬한 장면을 초창기에 찍는 방식으로 배우의 몰입을 강제하는 방식에 비하면 부드럽고 상냥한 접근 방식이긴 하다.
필자가 전해영에게 비교적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왠지 욕하면 나중에 여파가 있을 것 같아서. 뭐, 프로라면 스스로 잘 케어하겠지만 그래도 앵간하면 서로서로 둥글게 둥글게 넘어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모든 게 다 정리되고 난 다음 전해영이 아무도 없는 곳, 예를 들어 욕실 같은 곳에서 커튼으로 모두 가린 채 혼자 펑펑 우는 장면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도 전혀 여성스럽지 않고 마치 짐승처럼 울부짓는 그런 거. 그 이후엔 언제 그랬냐는듯 더 정교해진 전해영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싶고. 뭐, 캐릭터의 깊이는 간극에서 온다는 개인적인 생각 때문이다.
3. 사실 싸이코 드라마인 줄 알았어
'너랑 나 같은 건 이름만이 아니야'라는 리뷰에서 서해영과 전해영을 비교하고 그들에게 닮은 구석이 꽤 많다는 걸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그러한 시도를 한 것은 단지 두 여자들만이 아니었다. 한태진과 박도경의 비슷한 구석은 무엇인지도 비교를 해봤었지. 한 번 가볍게 살펴볼까?
두 사람 모두 나이가 36세로 동일하다.
두 사람 모두 사업가이고, 친한 친구가 한 명씩만 등장한다.
두 사람의 옷차림은 비슷한 스타일링이며 헤어스타일도 비슷하다.
두 사람 모두 타고 다니는 차량이 하얀 색이다.
두 사람 모두 자존심이 강하며 쪽팔린 것을 싫어한다. 한태진은 쪽팔려서 파혼하자고 했고 박도경은 쪽팔려서 박훈에게 시나리오 돌리지 말라고 한다. 무엇보다 전해영에게 "내 자존심도 회복하고 너도 추모하고. 넌 죽었어야 했어."라고 말했던 것이 박도경이다.
두 사람이 결혼하고자 했던 여자의 이름은 오해영이었다.
이런 식으로 비교해보니 꽤 흥미롭지 않은가? 우연일까? 작가가 일부러 의도한 것일까?
그래서 한동안 이 드라마가 실제로는 일종의 사이코 드라마, 즉 정신적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가설을 세워본 적도 있었다. 현재의 자신과 이상적인 자신을 대립시켜놓고 각각의 상황을 던져준 뒤 반응을 살피고 스스로 성찰하여 치료해 나가는 과정.
이 경우 각 등장인물들이 매우 유사한 언행과 설정, 비슷하게 겪는 사건들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원래 같은 사람이니까 언행이 같을 수 밖에 없고 같은 일을 겪는 건 주어지는 상황이 동일하기 때문이며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과정도 좀 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내적 갈등으로 설명할 수 있으니까.
한태진을 구치소로 처박은 걸 아주 깔끔하게 해소시킬 수 있다. 실제로 한태진이란 인물을 집어넣은 것이 아니라 한태진과 박도경은 동일인물이며 그저 치료를 위해 높은 자존감을 잠시 억제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추론을 이끌어 낼 수도 있으니까.
도덕적으로도 별반 문제가 없어진다. 남에게 하면 상해지만 스스로에게 하면 자해다.
물론 이 가설은 금세 폐기처분 되었다. 이유는 간단한데... 네 남녀를 제외한 나머지 등장인물들이 지나치게 입체적이었다. 각자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고 각자의 갈등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사이코 드라마에서 다른 등장인물들은 단편적이고 무게감 없이 등장하여 상황과 갈등을 던져주고 사라지기 마련이다. 어디까지나 치료대상의 자기성찰이 목적이므로 굳이 그들의 이야기를 다룰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스토리가 이렇게 흘러가면 아마 시청자들중 열 받을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시청률 폭망해서 작품성이라도 높여보자는 마인드가 아니면 이렇게 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다.
4. 한 번쯤 생각해볼 대사들
이 드라마의 작가는 좀 뵨태끼가 있는게 반복된 상황 연출로 주제의식을 전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스쳐지나가는 말로 떡밥을 무지하게 던지기도 한다. 중의적인 대사로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말이다. 흥미로운 대사들을 몇 개 적어보는 걸로 이번 뻘글을 마무리 해보겠다.
"제 시누이도 아니고." (서해영)
"전에 저한테 자기 집 아냐고 물어봤었죠? 혹시 이렇게 될 거 미리 알았나? (서해영)
"참 좋았어. 시간을 되돌리는 것 같고." (전해영)
"이렇게 혼자 있는 줄 알았으면 되게 불쌍해질 뻔 했네."(서해영)
"벽 뚫고 들어가 너를 덮치지 않으려면!"(서해영)
"전 자면 좋아집니다. ...자면 그 사람이 좋아집니다."(이사도라)
"나 좀 쉬워."(서해영)
"상처만 회복되면 괜찮을 줄 알았어요."(전해영)
지금까지 진행된 극의 상황을 보면 흥미로운 구석이 많은 대사들이었다. 특히 제일 위의 두 대사는 극의 초반에 등장한 대사들인데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현실가능성이 꽤 높아진다. 박도경이 환각으로 미래를 본다면 서해영은 촉과 감으로 미래를 예지하기라도 하는 걸까.
어디까지나 월요일을 기다리기 힘든 괴로움에 써본 뻘글이니 모두들 가볍게 가볍게 읽고 잊어주셨으면 한당.
뻘글이라는데 정성이 느껴진닼ㅋㅋㅋㅋ 잘읽었어
횽의 글은 참 재밌다. 좋았니는 갤에서도 좋아하는 장면임. 3회 그 장면은 서배우 본인의 얘기 같았음 나도. 그걸 팬도 아닌 분이 느꼈다니 놀랍다.
뭔 뻘글이 이렇듯 심오하다냐..ㅋㅋ 친절하지 않은 드라마라고 그러는데 난 이 들마가 넘 어렵다ㅠㅠㅠㅠ '저 놈 잔돈 있었어..' '겁없이 함부로 감동주고 지랄이냐 어쩔라고' 이 플짤에 낚여 파닥거리는 나 샛기가
ㄴ댓글이 걍 올라가버렸다ㅋㅋ
3회 그 씬...나만 그리 느낀게 아니었군.. 쨌든 또요일이 왔고 본방과 함께 너님의 리뷰도 기다려진다.
이 글을 여지껏 발견하지 못했네. 뒤늦게 반갑게 읽었다. 나도 그 장면이 참 좋았는데, 미세하게 떨면서 대사를 칠 때 해영이와 그 본체와 나 사이에도 떨리는 진동이 있었어. 그래서 그때 참 좋았어. 도경이가 해영이를 좋아하게 된 순간이 그때였다고 말할 때, 너도냐 난 그랬는데 짜식. 이런 기분도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