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때때로 고장날 때가 있다. 찐득한 우울이 나의 온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어서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는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런 때가 오면 나는 죽고 싶어진다. 그렇지 않은 심리적 상태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죽고 싶어진다. 다른 사람들이 멀쩡한 얼굴로 살아가는 것이 놀랍게 느껴질 만큼 나는 죽고 싶어진다.
나는 고장난 침대에 누워서 한강 다리 난간의 차가운 감촉을 수도 없이 상상했다. 수십 미터 높이에서 떨어져서 수면에 부딪혀 대가리가 깨지는 순간도 수도 없이 상상했다. 어쩌면 고통이 없을지도 모른다. 엄청난 고통일지도 모르고. 머리통이 박살나는 고통. 그것을 상상할 능력이 없었더라면 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이미 자발적인 물고기 밥이 되어 있었겠지.
죽은 다음은 아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 완전한 무, 영원한 잠, 긴급 탈출.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으로 가는 것을 나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런 사고 패턴에 빠지면 내 모든 것이 넘지 못할 장애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몸이 아픈 것, 못생긴 것, 피부가 간지러운 것, 방바닥에 내게서 떨어진 비듬이 쌓이는 것,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것, 뱃살이 나오는 것, 글을 형편없이 못 쓰는 것, 병신 머저리 쓰레기 또라이 새끼인 것.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잠시 해결해봤자 되풀이될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잘못된 원인은 나 자신이고, 나 자신은 무슨 짓을 해도 더 나아질 리가 없는 병신새끼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런 우울한 생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가 있다. 마치 마법처럼. 불현듯 찾아온 우울은 마찬가지로 새벽녘의 유령처럼 사라진다. 죽고 싶을 때 죽고 싶지 않은 자신을 이해할 수 없던 것처럼 죽고 싶지 않은 나는 죽고 싶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실은 알고 있다. 그런 일이 생기는 이유,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울을 완화시킬 수 있는지 나는 짐작하고 있다. 약간 정도는.
죽고 싶은 상태의 나에게 필요한 것은 햇살, 그리고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최근의 일을 말하자면 나는 어깨가 무진장 아팠다. 그래서 한의원에 갔다. 일주일 정도 다니면서 침을 맞고 건강에 대해 몇 마디씩 나누었다. 그것만으로 나는 잠시 우울을 떨쳐낼 수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어깨는 아직도 아프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질료다. 말라죽어가는 영혼의 살을 찌울 질료. 그것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카페에서 적당히 책을 읽는 것으로도 아마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은 때로 무의미하다.
우울은 알고 있는 것으로는 퇴치할 수 없다. 우울은 알고 있는 것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장 누워서 잠을 자고, 아침이 되면 뭐라도 하러 밖으로 나가면 나아질 것이라는 것쯤 알고 있다. 그 정도쯤 누구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울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든다.
우울한 사람은 잠들지 못한다. 그러니 아침에 일어날 수 없다. 오늘은 반드시 일찍 자고, 일어나자마자 씻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은 수도 없이 번복되었다. 그 실패의 기억은 새로운 자조의 역사로 다시 굳게 새겨진다. 그것을 먹고 자란 다음날의 우울은 더욱 강력해질 테지.
우울은 기질이다. 내 마음의 형태다. 그렇기에 그것은 쓰러뜨릴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우울을 오컬트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은 귀신이다. 내 마음에 들어오는 귀신. 그렇게 억지 외부 귀인이라도 하면 조금은 그것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용기를 갖게 된다.
그 폰귀신은 산 사람을 미워한다. 그리고 동경한다. 그 두 가지가 결합하면 상대를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추잡한 짓거리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내게 깃든 폰귀신은 그런 존재다. 한강 밑바닥에서 내가 뛰어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악한 존재. 밤마다 나의 귓가에 너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속삭이는 빌어먹을 새끼.
그런 것에 지고 싶지는 않다. 바로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과연 삶에는 궁극적인 의미가 있나? 물론 그런 것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계획이 아니라 우연의 산물이므로.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존재론적으로 허무한 이야기다. 그 허무가 낳은 마음속의 빈 공간에 침투하는 것이 바로 나에게 들린 녀석과 같은 악귀들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의 우울을 귀신으로 타자화했던 것처럼, 나는 어쩌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실은 있음을 마치 진짜인 것인 양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른다. 혹시 통 속의 뇌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심리적으로 실리적인 이유에서 있다고 생각해 두는 것이 유리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효율의 시대에 그것이 실리적으로 이득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어차피 그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란 가상적으로 있다고 치는 것인데 내 맘대로 정해도 괜찮을 것이다. 비밀이지만 나에게는 꿈이 있다. 외로운 처지의 나로서는 누구에게도 소리 내서 말해본 적이 없는 부끄러운 꿈이다.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창피해지는, 분수에 맞지 않는 꿈. 그것과 그것을 위한 과정을 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쳐도 될 것이다.
머지않아 귀신은 스멀스멀 나의 침상으로 또 기어온다. 그것에서 잠깐 벗어날 수는 있어도 효력은 잠시 뿐이다. 평생토록 그것과 맞서 싸우는 것이 오컬트 맨으로서의 나의 사명인지도 모른다. 귓가에 속삭이는 그것의 침울한 목소리는 나의 목소리를 닮아 있다. 나를 끔찍하게 미워하는 그 귀신. 아마 원수라도 그렇게 미워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 귀신의 이름과 얼굴과 정체를 나는 알고 있다. 싫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오늘의 한강 수온은 7.5도이다. 한강물 수온 어플에서 키케로가 말하길,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그렇다고 치자. 차가운 한강 물 속에서 입이 찢어지도록 웃는 귀신과 마주치는 일이 부디 없기를.
글 잘 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