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순탄치 않아서, 놓여진 가로에 상황보다 마음이, 트라우마가 날 힘글게 해서 이 글을 적습니다.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빠, 엄마 그리고 내가 있는 가정이었다.
집안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5살 쯔음에 부모님이 이혼을 했기에. 양육권은 엄마에게 넘어가서 엄마 손에 길러졌다. 엄마는 일로 바빠서 육아는 항상 외조부모님의 몫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알콜중독이었다.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지만, 왕년에 잘 나가셨던 이유에 술에만 취하면 소리지르며 난동을 피웠다. 난 이불속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울었다. 외할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사내아이는 울면 안된다.', '우리는 너밖에 없다'. 엄마도 내게 말했다. '넌 내 전부야', '엄마는 남은 게 너밖에 없어'. 난 어리광피울 수 없었다. 주변 사람 모두 나에게 철이 빨리 들었다 했다. 엄마는 나에게 아빠 흉을 봤다. 외할머니도 나에게 아빠흉을 봤다. 바람둥이라고 집안에 소홀한 쓰레기라고 끊임없이 내게 되새겼다. 나에게 아빠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줬음에도 명절엔 날 친가로 보냈다. 말없이 아빠를 따르며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아빠랑 만나는 건 일년에 딱 두 번 이었다. 추석, 설날.
엄마가 유학을 갔다. 내가 5살 때 일본에 가 2년 후인 7살 때 돌아왔다. 온전히 외할머니 손에 길러졌다. 외할머니의 인생의 억울함과 핀잔, 슬픔을 2년 내내 들었다. 괴로웠다.
엄마가 재혼을 했다. 어디서 만난지 모를 아저씨가 내 눈 앞에 서있었다. 사람 좋게 생긴 그새끼는 아빠라고 부르라며 나와 게임을 하고 어항을 꾸미고 잘해주는 듯 했다. 그렇게 엄마와 새아빠가 결혼식을 올리고 외조부모님과 따로 살게 되었다. 친가는 격노했다. 내 성을 새아빠 성으로 바꾸겠다는 공문이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거부했다. 그렇게 어느날 밤. 엄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가정폭력이었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매일 밤 울었다. 결심한 날 외조부모님께 울면서 전화했다. 외조부모께서 뛰쳐왔다. 그렇게 엄마의 재혼마저 파혼으로 끝났다.
다시금 외조부모님과 생활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다니며 가족사항을 적는 란에 친아빠 이름을 적는 게 맞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려웠다. 그러다 외할아버지께서 쓰러졌다. 뇌출혈이었다. 내가 빠르게 신고한 탓에 늦진 않았지만 말이 어눌해지셨다. 말을 못하니 답답하고 답답할 때엔 화를 냈다. 집에 어린 이이 한 명이 늘어난 느낌이었다.
두번째 결혼의 파혼 후 엄마는 나에게 집착했다. 원래있던 집착증이 더 심해졌다. 넘치는 학구열에 여러 학원과 학습지로 하루를 꽉꽉 채웠다. 자신보다 어린 아들에게 의지했다. 매일 자신이 힘들었던 이야기를 했다. 난, 힘들었는데도 아무말 하지 못했다.
엄마가 나보다 더 힘들었기 때문에. 외할머니가 나보다 더 힘들었기 때문에.
외할머니가 노쇠했다. 원래도 성격이 오락가락하는 외할머니가 몸이 아프시니 이유없이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화내고 사소한 이유에 울었다. 집안엔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일터에 나갔고 할아버지는 귀도 들리지 않고 말도 잘 못했다. 내가 전부 받았다. 죽고싶었다.
집 밥이 맛 없었다. 노쇠하고 모든 게 귀찮고 집안일을 혼자 짊어지신 외할머니가 더 이상 이것저것 신경쓰시지 않으셨다. 그리고 또 매일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하셨다. 싫은 소리를 들을 바엔 내가 하자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요리를 시작했다. 집안일도 시작했다. 고등학생이었다. 기뻐하셨다 효자라고. 엄마도 좋아했다. 내 속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공부할 시기에 펜을 잡기 힘들었다. 그러다 외할머니가 쓰러졌다.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골반뼈를 다치셨다.
내가 외할아버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수능 이틀 전에도 저녁 밥을 챙겨드렸다.
엄마는 프리랜서 일로 돈을 많이 벌다가 언제부턴가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덕분에 자유시간이 좀 생기셨다.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놀러다니기 시작했다. 여행부터 시작해서 골프로. 자기는 남편도 없고 인생도 못즐겨서 좀 놀고싶다며. 자꾸 나에게 '남에 집 엄마들은 남편한테 가방 선물도 받던데... 나는 에휴...' 라며 신세한탄을 했다. 그러면서도 아빠 욕을 했다. 난 고등학교 때 수능을 앞두고 혼자서 외할머니의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엄마는 내가 필요로 할 때 옆에 없었다.
아빠와의 교류는 지속됐다. 자주 보진 못했지만, 아빠는 썩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같이 있으면 외조부모로 부터, 엄마로 부터 해방되는 기분이었다. 아빠는 나에게 기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으로 강한 사람이어서 기댈 수 있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기대지 않았다. 기대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서. 친할머니의 칠순 잔치 때 잔치를 마치고 가는 길에 아빠 차 안에서 울면서 엄마를 두고 바람을 폈냐고 물었다. 안폈다고 했다. 오해라고 했다. 심지어 합의 이혼인데도 그 당시 3억 가까이의 집을 줬다고 했다.
마음 속 무언가가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현역에 대학에 붙었다. 서울의 좋은 대학에 붙었다. 하지만 욕심으로 무반수 재수를 택했다. 악수였다. 거처는 외조부모님의 집. 이전에는 학교를 다니고 학원을 가느라 집에 많이 머물지 않았지만 재수를 하며 마주치는 시간이 늘었다. 나라는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나락감에 빠졌다. 너무 힘든 나머지 보름 동안 가출을 했다. 길바닥을 전전하며 하루하루 다른 친구네 집에서 신세를 졌다. 그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착한 아이인 나의 일탈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지만, 그런 조심스러움은 잠깐이었고 다시 또 괴로운 일상으로 돌아왔다.
재수 무렵 엄마는 또 집에 없었다. 놀러다녔다. 이제는 진짜 해방이라니 뭐라니. 그러다 내 재수 실기날 엄마는 제주도 여행을 간가고 했다. 원망스러웠다. 죽을 듯이 분노했다. 그랬었는데, 실기를 마치고 돌아오니 엄마가 병실에 있었다. 유방암 2기 말이었다.
재수에 성공해 그다지 좋지 않은 대학에 가서 1년 동안 대학생 생활을 했다. 그리고 군대를 갔다. 군대를 간 와중에도 이런저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휴가를 나가서 집에 가면 눈물이 그렁한 채로 엄마와 외할머니가 날 맞아줬다. 엄마는 항암치료로 머리가 없어 가발을 썼다. 휴가 동안에 만큼은 마음고생하지 않고 지냈다.
전역을 했다. 전역을 하자마자 다시금 그 생활이었다. 외할머니의 오락가락하는 기분에 맞춰주면서. 엄마는 암에 걸려 다소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신세한탄에, 아빠욕에 나에대한 과분한 의지증등으로 날 괴롭게 했다. 하루는 외할머니가 '다시 군대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라고 했다. 1년 6개월 최전방 공병으로 지뢰제거작전에도 투입되어 사고는 없었지만 몇번이나 위험한 순간을 넘겨 무사전역 했는데, 다시 들어가라니. 나는 필요없는 존재인듯 성 싶었다.
엄마는 내가 군대에 있던 사이 애인이 생겼다. 말출 때 갑자기 나에게 소개했다.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여러번 봐도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믿음직하고 올곧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왜 나만? 내 가족만..?
전역하고 며칠도 안되어서 외할아버지가 코로나에 걸렸다. 잇다라 엄마 그리고 할머니도 증상을 보였다. 엄마는 매우 분노했다. 암환자인데도 자신을 신경쓰지 않고 경솔하게 행동했다고 화를 냈다. 엄마는 새애인과 살거라며 근처 시골에 지은 자그마한 집으로 갔다. 도피였다. 늘 그랬듯. 내가 초등학생일 때도, 내가 고등학생일 때도, 내가 재수할 때도. 난 집에 다시 혼자였다.
내가 외조부모를 챙기기 시작했다. 나를 제외하고 전 가족이 코로나 확진을 받았고 나는 중요한 수술을 한 주 앞으로 둔 상태여서 매우 조심스럽게 챙겼다. 미룰 수 없는 수술이었기에 더욱이 조심했다. 하지만 외조부모님은 자꾸만 방에서 나왔고 내 통제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참을 수 없게 화가났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무언갈 던졌다. 이후엔 슬픔이 몰려왔다. 엄마에게 전화하며 흐느꼈다. '이제야 내가 군대에 다녀와서 군대에서의 경험이 내가 얼마나 밝은 사람인지 알게 해줬는데, 왜 자꾸 내 발목을 잡아!' 라고 울부짖었다. 그 길로 집을 나왔다. 그렇게 싫어하던 도피를 나 또한 했다.
아빠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근처에 숙소를 2박 정도 잡아줬다. 숙소에 묵는 동안 보건소에 가서 pcr을 받았고 음성이 뜬 후, 아빠집에 갔다. 거기엔 다른 여자가 있었다. 군대에 있는 동안 애인을 만든 모양이었다. 결혼도 할 거라 했다. 나 또한 나이가 나이인지라 별 반발 없이 내키진 않았지만 받아들였다. 그렇게 새로운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수술을 했다. 거동이 불편한 나를 아빠, 그리고 선생님(애인)이 챙겨줬다. 기묘한 감정이었다. 한 번도 느껴본적 없는, 잔잔한 호수에 놓여있는듯 평온한 느낌이었다. 보살핌에 감사했다. 그러다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떻게 잘 지내냐고, 괜찮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러다 다시금 엄마 자신의 감정을 나에게 쏟아내었다. 오늘 하루 어땠는지. 자신이 외조부모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나에게 쏟아냈다.
손이 떨렸다. 가슴이 내려 앉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난 아직 얽매여있구나.
달리 말할 곳도. 달리 말할 방법도 모르는 내가
손이 가듯 이곳에 글을 써서 남깁니다.
죄송합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