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벅머리, 평범, 성공적
'스쿨메이트'라는 3D 께임이 있다. 간단한 외부 모드로 다양한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다. 이챠이챠하는 상대 여자 외형은 물론이고 장소, 시간대, 자세 등을 한정된 틀 안이지만 자유롭게 창조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미연시 남자 주인공 모드가 있다. 이 모드를 고르면 남자의 외형이 미연시 남자 주인공처럼, 즉 눈을 가리는 더벅머리로 바뀐다. 일반적으로 미연시 주인공이 이런 모습이라는 것엔 다들 동의하니깐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서브컬처에서 생각하는 평범한 남자 주인공이란 이렇게 생긴 모양이다.
여러 히로인을 공략할 수 있는 미연시가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오면서 지금 하렘물의 형태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 혹은 정말로 이슬람 술탄의 하렘 제도를 보고 영감 받은 일본인이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미연시의, 하렘물의 남자 주인공은 특징 없는 평범함을 강조한/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주인공은 폄범할 수도 있고, 자각 못할 뿐 특이한 인물일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사실과 그것을 우리에게 어필한다는 사실이다.
하렘왕의 조건 1. 평범해라.
왜 하렘물 주인공은 평범해야할까. 미소녀 동물원 글이 주장했듯, 하렘물의 주인공은 우리의 동일시 대상이다. 하렘을 이루는 여자 캐릭터들은 주인공을 욕망한다. 우리는 그녀들의 욕망을 받는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평범해야한다. 실제 우리 모습을 닮아야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평범한 사람으로 떠올리는, 바로 그 사람과 닮아야한다. 자신이 안경을 꼈는데 주인공이 안경을 안 꼈다고 해서 동일시가 깨지진 않는다. 동양인은 머리가 검은색인데 주인공의 머리가 푸른빛이라고 해서 동일시가 불가능하지는 않다. 수많은 의식적, 무의식적 학습을 통해 형성한 '평범한 주인공'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동일시할 수 있다. 튀지 않는 차분한 머리 스타일, 색은 주로 어두운 계열, 안경은 낀다면 수수한 것으로, 여름엔 반팔에 긴 바지, 겨울엔 회색 코트, 실제 주인공들은 여자 캐릭터에 비해 처참할 만큼 특징이 없다. 그래야만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한 주인공'이 되어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갈수록 고착된다. 우리의 공통 이미지에 부합하는 '평범한 주인공'이 계속 등장하고, 그런 '평범한 주인공'을 보면서 이미지는 더 확고해진다는 말이다. 긍정적 피드백이라고 할까. 결과가 원인을 강화하는 형태다.
하렘왕의 조건 2. 특별해라.
그러나 주인공은 동시에 특별해야한다. 서사 내적으로, 그리고 우리나 납득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해야한다. 다시 말해, 여자 캐릭터에게 사랑 받을 개연성을 갖춰야한다.
과거 하렘물은 이 부분을 오로지 상냥함으로 일관했다. '다카포', '클라나드' 등등. 나무에 올라간 아기 고양이를 구한다던가, 넘어졌을 때 손을 내밀어준다던가. 그러나 상냥함은 제대로 된 이유도 아닐뿐더러 너무 많이 쓰여서 웃음거리도 되지 못한다. 이제 어떤 오타쿠도 상냥함에 반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상냥함에 염증을 느낀 오타쿠는 다른 방안을 고안한다.
그 방법은 주인공에게 무언가 빌미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나는 친구가 적다'에선 인상 나쁘고 머리 노란 주인공을,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 없어'에선 오타쿠 여동생을 둔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여자 캐릭터들이 주인공을 마주칠 이유를, 좋아하게 될 이유를, 즉 개연성을 만들어줌으로써 좀 더 완성도 있는 전개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사에카노'도 똑같은 맥락이다. 주인공에 오타쿠 설정을 붙이고 그것을 이유로 여자 캐릭터와 관계를 맺게 한다. 과거에 자주 등장한 입학식 때 우산 빌려준 선배의 상냥함에 반했다는 것보다는 확실히 낫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하렘물의 주인공에게는 우리가 동일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평범함을 남겨야 한다. 동시에 특정 여자 캐릭터에게 사랑 받을 개연성을, 특별함을 부여해야 한다. 하렘물은 이 모순을 해결해나가는 치열한 시도다.
서브컬처가 내놓은 해법은 단순하다. 과거 개성 없는 더벅머리 주인공을 버리고 특이한 구석이 있는 주인공을 등장시킨 것이다. 대신 그 특이함을 사회적 소외를 받을 만한 요소로 꾸며 오타쿠와의 동일시도 같이 꾀한다. '나는 친구가 적다', '내 청춘 러브코미디는 무언가 잘못됐다' 등은 소외와 따돌림을 당하는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사회적 멸시나 무관심이 너무 적나라하면 거부감을 주기 때문에 적당히 그 부분은 '좋은 게 좋은 거다'는 식으로 은폐된다. '아웃 브레이크 컴퍼니', '변태왕자와 웃지 않는 고양이' 등은 아예 진짜 오타쿠를 등장시키고 그게 마치 특별한 능력인 것처럼 표현한다. 현실 오타쿠가 떠안고 있는 멸시는 사라지거나 희화된다.
이러한 해법을 취한 라노베, 애니는 큰 성공은 거둔다. 소외 받는 걸 알고 있는 오타쿠의 자조적 입장에서 똑같이 따돌림 당하는 주인공은 더 쉽게 동일시할 수 있다. 평범함과 특별함이 공존해야한다는 모순을 일견 해결된 듯하다. 개성을 주면서도 동일시가 가능하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이 전개되면서 이번에는 내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이중적, 작위적 주인공
하렘물의 필수 인물 구도는 주인공과 다수 미소녀다. 그리고 여자 캐릭터들은 주인공을 좋아해야 한다. 그 개성은 소외 받는 주인공으로 확보했다. 그러나 반대로, 주인공 입장에서 여자 캐릭터를 함락하는 결정적 계기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렘물의 주인공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앞서 살펴본 것 이외에도 중요한 요소가 더 있다. 모든 여자 캐릭터를 좋아하면서도, 특정 여자 캐릭터를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정 여자 캐릭터가 메인 히로인이 되는 순간 하렘은 무너지고, 다른 여자 캐릭터를 지지한 오타쿠의 비난만이 남는다. 저 옛날의 '딸기 100%', 혹은 충분히 이성적 선택으로 보이는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 없어', 주력 여자 캐릭터가 밀려난 '나는 친구가 적다'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다.
이제 상황은 매우 독특해진다. 주인공이 여자 캐릭터에게 플래그를 꽃는 구체적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동시에 그 사건은 주인공이 그 여자 캐릭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일어나서는 안된다. 비슷한 이유로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종료된 후에는 그러한 이유는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야 한다. 즉, 주인공은 자신의 감정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대를 사랑에 빠지게 해야 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두 가지 감정 상태로 분리된다. 여자 캐릭터와 무관하게 자기 이야기를 할 때가 첫 째다. 이 단계에서 여자 캐릭터는 무의식적, 의식적으로 외면된다. '사에카노'에서 남자 주인공이 게임 만들기에 몰두하는 것, '내 청춘 러브 코미디는 뭔가 잘못됐다'에서 주인공이 독백하는 것이 해당된다. 주인공은 주체성을 가지고 상황을 판단하거나 일을 수행한다. 주로 극 초반에 자주 볼 수 있으며 그의 성격이 드러나고 특색이 생기는 부분이다.
두 번째는 여자 캐릭터를 함락시킬 때다. 이 부분에선 주인공의 성격을 막론하고 그들은 대단히 활동적이며 정열적이다. 주로 정신적 외상을 치유해주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방법을 취하든 그건 보통 사람이 잘 하지 않는 것이다. '사에카노'의 오타쿠 주인공이 카토 메구미와 쇼핑할 때 갑자기 전략을 짜는 것,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 없어'에서 쿄스케가 키리노를 위해 자전거에 태우고 달리는 것 등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할 때 주인공은 절대 감정을 가져서는 안된다. 분노, 슬픔, 우울, 짜증은 당연히 안 되고, 사랑, 애정도 안된다. 완전히 텅 비어버린 상태로 오로지 여자 캐릭터만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사랑 없이 상대를 사랑에 빠뜨릴 수 있고, 하렘물은 무너지지 않는다.
감정과 이성을 가지고 무언가를 수행하는 주인공에서, 여자 캐릭터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주인공으로의 이동은 굉장히 작위적이다. 하렘물에서 혐오감과 질린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부분은 바로 여기다. 평소에는 매사 귀찮고 초연하던 주인공이, 여자 캐릭터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녀를 위해 적극적으로 변한다. 그 에피소드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다.
하렘물은 하렘을 만들기 위해, 주인공의 감정 없이 다수 여자 캐릭터에게 사랑 받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자연스러운 성격을 포기한다. 하렘이 현실적이지 않은 이유는 많은 여자가 동시에 한 남자를 사랑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하렘물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이렇게 보듯 지나치게 많은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에카노'도 똑같다. 처음에는 오타쿠라는 신선한 설정과 만담으로 산뜻하게 출발한다. 그러나 카토, 우타하, 에리리, 미치루로 이어지면서 결국 주인공의 작위성이 드러난다. 오타쿠로 시작한 주인공의 특색은 얼마 못가 주변 인물들이 죄다 오타쿠라는 설정으로 이어진다. 미치루 에피소드에서 미치루 밴드가 전부 오타쿠였다는 설정은, 우타하의 말대로, 작가의 밑천이 드러난 것이다. 또한 에리리 에피소드에서 오로지 제대로 된 미연시를 만들겠다는 변명 아래 주인공은 에리리를 위해 행동한다. 평소에 누굴 좋아하는지 말할 생각도, 제대로 된 의지도 없는 주인공이지만 에리리를 달래기 위해 갑자기 뜨겁게 타오른다.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그 나이 또래 남자가 여자를 위해 그렇게 열정적일 수 있는 이유는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벌거숭이 임금님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하렘물은 붕괴한다. 하렘물의 주인공이 되려면 그는 우리처럼 평범하면서 동시에 무언가 특별해서 여자에게 사랑 받을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주류 사회에서 소외되지만 여자 캐릭터에게는 사랑 받아야 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모두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하지만 자기는 아무도 좋아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평소 성격이 어떻든 간에, 여자 캐릭터를 위해서라면 제대로 된 이유 없이 적극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하렘이냐, 동물원이냐.
하렘물의 복잡한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손쉬운 방법은 여자 캐릭터를 많이 등장시키지 않는 것이다. 2명 정도면 주인공이 누군가를 좋아해도 충분히 다른 여자 캐릭터도 기회를 받을 수 있다. '토라도라', '4월은 너의 거짓말' 등이 그렇다. 그러나 이러면 아시다시피 이미 하렘물이 아니다.
어쨌든 하렘물의 본질은 많은 여자 캐릭터를 이용한 '한 명쯤은 네 취향에 맞겠지'식 전략과 그 한 명을 보면서 판타지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에서 여자 캐릭터가 많이 등장해서 판타지를 만족시키면서도 동일시의 가능성, 애정의 개연성을 배제한 미소녀 동물원계가 등장한다. 남자를 없애서 동일시와 이성 연애 요소가 사라진 대신 백합과 일상 개그, 만담이 빈자리를 채운다. 극의 긴장감과 서스펜스는 줄어들지만 더 이상 사랑 없이 사랑해야하는 조건 따윈 없어진다.
이제 우리 앞엔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주인공의 작위성을 견디고 하렘물을 볼 것인가, 아니면 늘 같은 내용에 여자 캐릭터만 바뀌는 미소녀 동물원계를 볼 것인가. 또는 아직도 애니메이션 인물을 나와 동일시할 것인가, 아니면 '바깥'에서 손 놓고 그저 바라만 볼 것인가. 지금까지 추세는 후자로 기울고 있지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게 또 묘미 아니겠는가.
개인적으로 '평범함'의 정점에 있는 건 하루히의 쿈같음
그리고 갠적으로 하렘물의 조건을 '여러 여자가 한남자를 좋아하는가'가 아니라 '한 남자가 여러 여자 중에서 취사선택이 가능한가'로 봄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이다
애갤의 숨은 전문가
그냥 안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