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 미국에서 유대인이 벌이는 일들
"영국인과 독일인이 금발의 머리를 갖고 태어나는 것처럼 유대인은 불타는 광신을 가슴속에 품고 태어난다. 언젠가 이들이 인류에 치명적인 존재가 된다 해도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 볼테르. <Letter of Memmius to Cicero>.
21. 유대인, "우리를 민족으로 구분하지 말라." - 디어본인디펜던트. 1920.10.09.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단지 유대교 뿐만이 아니다. 물론 유대인과 유대교는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나 유대교와 유대인의 연관성에 대한 시각이 어떠한 것이든 종교만 가지고는 한 민족을 규정할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유대교를 믿는다고 해도 비유대인은 유대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유대인으로 태어난 자는 유대교를 버리더라도 여전히 유대인으로 남는다." - 레오 레비. 성약의 형제단 회장.
현재 미국의 유대인 인구를 하는 비유대인은 아무도 없다. 정확한 수치는 오직 유대인 사회의 지도부만이 알고 있다. 미국정부는 이 나라의 출신민족별 인구통계와 관련해서 그 어떤 정보도 제공할 수 있지만, 유대인에 대한 인구통계는 예외다. 미국정부가 매년 얼마나 많은 유대인 이민자가 이 나라에 입국하고, 또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이미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지를 유대인을 한 민족으로 구분해 조사하려 할 때마다 워싱턴의 유대인 로비가 나서 이를 금지시키기 때문이다. 유대인 로비는 매번 이를 무산시킬 만큼 강력하다.
현재 유대인의 미국이민은 국제유대인의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다. 오늘날 유럽에는 미국이민이 거의 불가능한 나라들이 있다. 요즘 북구인을 필두로 독일인이나 폴란드인이 미국이민을 허락받는 것은 매우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독일과 폴란드에 사는 유대인들은 사정이 다르다. 이들은 국제적 유대인 협력 네트워크의 공조 하에 미국의 이민법과 보건규정은 아랑곳없이 수십 명도 아니고, 하루에 수천 명씩 미국에 들어오고 있다. 이는 마치 유럽을 정복한 수백만의 유대인 군대가 미국을 침략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요즘 엘리스 섬에 근무하는 이민국 관리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1) 이민자 신분으로 이 나라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의 대부분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이다. - 진정한 우크라이나인,러시아인,독일인은 이민오지 못하는 마당에서 이들 나라의 국적을 가진 유대인은 아무런 제약 없이 이 나라에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민국 관리들은 한결같이 질문한다. "왜 유대인만 특별대접을 받나?"
2) 이들 유대인이 굶주림과 박해에서 탈출하는 난민이 아니라, 마치 이 나라를 소유하고 있는 특권계층처럼 행동한다. - 이들은 이 나라에 내리자마자 귀빈대접을 받는다. 이미 유럽에서 여권수속 등의 각종 이민준비를 도움 받았듯이, 이들은 입국할 때에도 미국에 사는 그들의 동포들이 준비해놓은 각종 특혜를 누린다. 각종 입국심사 관련법규와 보건규정은 이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유대인 단체에서 나온 이들이 미국 이민국 관리들의 지시를 뒤엎는 것은 엘리스 섬에 내린 유대인 이민자들이 흔히 목격하는 일이다.
3) 힘있는 유대인들의 입김 탓에 유대인 불순분자들의 입국을 막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 유럽의 유대인은 잠재적인 혁명분자다. 어제는 이탈리아,독일,러시아,폴란드의 혁명분자였던 유대인들이 오늘은 미국의 빨갱이와 노조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정체가 의심스러운 이민자는 일단 엘리스 섬에 억류해 두는 게 규정이지만, 이러한 일이 어느 유명한 유대인 혁명분자에게 일어나면 유대인 네트워크는 바빠지기 시작한다. 정계나 언론계에 있는 유력인사들에게 청탁이 들어가고, 엘리스 섬의 이민국 관리들은 곧 이들의 연락을 받는다.
이 모두는 유대인의 침략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달리 말할 방법이 없다. 미국 유대인은 유럽에서 이민 오는 동포들을 '박해와 기아에서 탈출하려는 불쌍한 사람들'로 선전해 미국인의 동정심에 호소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가난하고 굶주린 몰골을 한 동유럽 유대인 부녀자와 아이들의 사진을 내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보여 주지 않는 것은 러시아를 침탈하고, 이제 미국정복에 나서려는 진정한 유대인 혁명분자들의 사진이다.
만약 미국에 얼마나 많은 프랑스계 미국인이 살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미국정부에 문의하면 간단히 알 수 있다. 이는 폴란드계 미국인이나 이탈리아게 미국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 한 민족집단으로서 유대계 미국인이 살고 있는지를 미국정부에 문의한다면 아무런 답도 얻지 못할 것이다.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구분해놓은 기록이나 통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2. 유대인은 종교인가, 민족인가? - 디어본인디펜던트. 1920.10.16.
"국적,직업,종교와는 상관없이 유대인은 한 민족이며 모든 유대인은 이 유대민족의 일원이다." - 루이스 브랜다이스.
"유대인은 유대교의 신자일 뿐 민족이 아닙니다." - 시몬 구겐하임. 상원의원.
"기독교와 달리 유대교는 내세의 구원을 믿지 않는다. 유대교가 오직 관심을 갖는 영역은 현세에서의 유대민족의 승리와 영속 뿐이다." - 레온 시몬. <유대인 민족주의 연구>.
"유대인이 단지 한 종교의 신자집단이었다면 독일을 비롯한 전 유럽에 걸쳐 유대인이 그토록 핍박받고 모욕당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유대인은 종교를 넘어 하나의 혈연적 민족집단이요, 하나의 국가였다." - 모세스 헤스. <로마와 예루살렘>.
"개종을 한다고 유대인의 매부리코가 없어지고 검은색 곱슬머리가 금발이 되지는 않는다. 유대인은 수천 년 동안 사회환경 및 기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혈통과 신체적 특성을 순후하게 보전해 왔다." - 모세스 헤스. <로마와 예루살렘>.
지난 세기 중엽 유대인으로서는 최초로 영국수상이 된 벤저민 디즈레일리도 자신의 소설 <코닝스비>의 서문에서 무려 4차례에 걸쳐 유대인을 민족으로 지칭한 바 있다. 디즈레일리는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자신이 민족적으로는 유대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종교적 편견이라는 혐의에 쉽사리 움츠러드는 서구사회의 약점을 간파했던 유대인은 비유대인을 상대로 자신이 민족이 아니라 한 종교집단일 뿐이라고 항상 주장해왔다. 그러나 비유대인이 유대인을 차별했던 이유가 종교적 편견은 아니었다. 유대인을 차별했던 것은 종교가 아니라, 유대인의 행동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종교적 편견에 기인한다는 주장은 한마디로 난센스에 불과하다.
23. 뉴욕 금융가에서 소리 없이 대결하는 유대인과 비유대인 - 디어본인디펜던트. 1920.11.13.
미국의 유대인 문제는 본질적으로 도시문제다. 유대인은 땅 대신 사람을 벗겨 먹고 산다. 유대인은 다른 민족들처럼 땅을 일구거나 천연자원으로 상품을 생산해 삶을 꾸려 가는 대신 그런 일을 하는 비유대인들의 피를 빨아서 살아간다. 들판과 공장에서 땀을 흘리는 일은 다른 민족들에게 맡겨 둔 채 유대인들은 이들이 거둔 결실을 착취한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기생적인 천재성이다.
뉴욕 유대인 케힐라(카할)가 보유한 등기부를 보면 이 도시의 유대인 인구가 1,527,778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유대인 인구를 포함하고 있는 도시는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현재 30여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전 세계 유대인의 10%가 뉴욕에 살고 있다. 오늘날 유대인이 뉴욕을 상대로 행사하는 영향력의 크기는 아마도 현재의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유례가 없는 것이다.
뉴욕의 대형 백화점들도 한 곳을 제외하면 모두 유대인 소유다. 뉴욕의 의류 및 모피산업 역시 이들이 장악하고 있다. 뉴욕의 법조계와 언론계 또한 유대인 일색이다. 뉴욕의 이스트사이드에만 무려 360개의 유대교 회당(시나고그)이 있다.
뉴욕의 케힐라는 뉴욕 유대인 정부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뉴욕 케힐라는 1908년 유대인이 뉴욕시 범죄의 50%를 저지르고 있다는 빙햄 뉴욕시경 국장의 발표가 있은 직후 조직되었다. 이후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사실을 발표하기 전 뉴욕 시 공직자들은 먼저 케힐라의 눈치부터 살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케힐라는 막강한 영향력과 방대한 인맥을 보유하고 있다. 보통 미국인들은 태머니홀이 뉴욕의 정치를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론이 이들에게 알려 주지 않는 것은 태머니홀이 유대인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이다.
월가에서 유대인은 숫자도 많을 뿐 아니라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아도 미국인 금융가들은 유대인 금융가들과 물밑에서 힘을 겨뤄 왔고, 최소한 현재까지는 근소한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은밀하고도 빈번하게 미국의 금융,정치,외교에 개입해왔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첫 번째 패배를 경험한 나라도 미국이었다. 뉴욕에서 유대인 자본은 주로 투자은행 계열에 집중되어 있다.
유대인 은행가들이 철도회사나 제조회사, 정부나 지자체의 채권과 주식을 발행해준다 해도 이들은 곧 대중에게 판매한다. 그리고 투자금은 신속하게 회수된다. 유대인 은행가가 자신이 자금을 대주는 어느 회사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일은 매우 드물다. 반면 비유대인 은행가는 자신과 거래하는 회사와 꾸준한 관계를 유지하고 경영을 도울 책임을 느낀다.
현재 월가에서 가장 큰 유대계 투자은행은 쿤앤로엡이다. 지난 9월에 죽은 제이콥 쉬프가 이 거대 금융회사의 최고경영자였다. 그의 아들 모티머 쉬프, 오토 칸, 폴 위버그 등이 그의 동료이자 측근들이었다. 반면 월가의 주요 상업은행들에서는 유대인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다행히도 상업은행계는 아직까지 비유대인 금융가들의 통제 아래 있다.
뉴욕증권거래소 장악을 위한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물밑 힘겨루기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일이다. 유대민족의 가장 두드러진 강점들 가운데 하나는 끈질김이다. 이번 세대에서 이루지 못하면 다음 세대에서는 꼭 이룬다. 주식투기에 있어서라면 유대인 비율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유대인이 투기에 능하고 도박을 좋아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금융활동에 있어서도 유대인들이 주력하는 부분은 역시 투기다.
유대인의 투기가 실패로 끝나는 일은 거의 없다. 금융스캔들에 연루되어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릴 수는 있어도 이들이 재산상의 손실을 겪은 경우는 드물다. 이들은 주로 확실한 정보에 의존해 투기를 하는데, 월가는 이러한 일에 편승한 비유대인 투자자들이 큰돈을 벌었다든지 손해를 봤다든지 하는 등의 얘기들로 넘친다.
무질서를 조장하는 유대인 불순분자들이 진보 구호를 내걸고 자본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의 실질적인 표적은 오직 비유대인이요, 비유대인의 자본이요, 비유대인의 권력일 뿐이다. 미국에서 유대인 불순분자들과 이들이 운영하는 언론의 공격대상은 오직 비유대인 금융가나 기업인이다.
24. 월가 유대인들의 명(明)과 암(暗) - 디어본인디펜던트. 1920.11.20.
"비유대인을 파탄시키기 위해 우리는 거액의 화폐를 시중에서 퇴장시키는 방법으로 경제위기와 금융공황을 일으킨다... 현재 우리가 유통시키는 통화량은 노동계층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는데 불충분한 것이다... 금본위제는 이것을 채용한 국가로서는 그야말로 사약을 안은 셈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될 수 있는 대로 금을 시중에서 회수했기 때문인데, 금의 부족으로 정부는 점점 화폐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 제20의정.
유대국제금융이 미국과 연관되기 시작한 것은 로스차일드 가문을 통해서이다. 미국에서 벌어들인 돈을 기반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부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 역시 전쟁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로스차일드의 중개로 독일의 헤시안 용병들이 미국독립군과 싸웠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얘기다. 이렇게 미국과 연을 맺은 이후 로스차일드는 대리인들을 통해 미국의 통화정책에 빈번히 관여해왔다.
그럼에도 로스차일드 가문의 5형제 중 미국에 정착한 이는 없었다. 장남 암셀은 프랑크푸르트에 남았고, 솔로몬은 비엔나, 네이션은 런던, 찰스는 나폴리, 제임스는 파리에 뿌리를 내렸다. 이후 로스차일드 5형제는 유럽에서 일어난 모든 전쟁들에 관여했고, 이들 사후에는 자식들이 부,지위,역할을 물려받았다. 1837년 미국에 건너온 로스차일드 가문의 어거스트 벨몬트는 남북전쟁 전 민주당전국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로스차일드 가문 외에도 여라 나라의 금융,통화정책에 관여했던 유대인 은행가문들은 많다. 이들을 통합적으로 유대인 국제금융가로 부른다. 이들은 어느 나라에서 영업하든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표면적인 국적이 무엇이든 유대민족 외에는 어느 나라에 대한 애국심도 없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에게 전쟁과 평화는 단순히 시장변동 사항이며, 돈을 벌 기회일 뿐이다.
수익을 위해 증시를 조작하듯, 이들은 나라들 사이의 관계를 조작하기도 한다. 지난 세계대전의 발발시기도 국제금융가들에 의해 여러 차례 연기된 것이다. 너무 일찍 전쟁이 터지면 원하는 나라들을 전쟁에 끌어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11년 로스차일드가 독일의 카이저에게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아마도 금융가들에게 1911년은 너무 이른 시기였던 듯싶다. 1914년에는 로스차일드가 카이저에게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는 얘기가 없었으니 말이다. 反나폴레옹 동맹의 주체도 당시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었던 유대인 국제금융이었다.
유대인 국제금융가들은 특정 산업에 대한 장악과 독점을 지향한다. 그리고 일단 통제력을 확보하면 예외없이 비유대인들은 산업에서 몰아낸다. 대표적인 예가 화폐의 가치를 지닌 광물들과 관련된 산업이다.
"유대인 국제금융가들은 특히 국제차관 영역에서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는 유대계 대형 금융사들간의 국경을 초월한 긴밀한 협력관계에 기인한다." - <유대백과사전>.
유대인 사회 언론은 항상 유대인의 국제금융 통제설을 황당한 음모론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유대백과사전>과 같은 권위있는 문헌이 이를 버젓이 인정하고 있다. "국제적 협력과 공조에 익숙해진 비유대인 금융가들의 부상으로 유대인 국제금융가들의 영향력은 근래 약화되고 있는 추세다."
지난 전쟁 중 많은 미국인들은 월가의 유대자본이 미국의 국익보다는 유대국제자본의 의제에 충성한다는 사실에 눈을 떴다. 실제로 지난 전쟁에서 월가를 포함한 유대국제금융은 양쪽 편 모두를 지원했다. 유대자본은 한 정당만 미는 법이 없다. 모든 경주마에 돈을 거니 질 까닭이 없다.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어느 쪽이 이기든 유대국제자본은 항상 승리한다.
패배한 쪽에 걸었던 돈도 전쟁배상금 형태로 얼마든지 회수할 수 있다. 지난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유대인 국제금융가들이 그토록 들끓었던 것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금융사들을 통제하는 유대인 금융가문들은 마치 거미줄을 연상케 하는 혼인관계들로 맺어져 있다.
유대인이 말하는 反유대주의란 유대인의 그릇된 행태에 대한 비유대인의 각성에 다름 아니다. 유대인은 흔히 "모든 전쟁이 끝난 뒤에는 항상 유대인이 속죄양이 되어 손가락질 받는다."고 하소연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리는 법은 없다.
미국에서 유대인 국제금융을 대표하는 쿤앤로엡의 제이콥 쉬프, 오토 칸, 필릭스 워버그 삼두체제는 유대자본이 이 나라에 유립되는 가장 주된 창구다. 제이콥 쉬프는 프랑크푸르트 출신으로, 그의 부친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대리인이기도 했다. 제이콥 쉬프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전비를 몰아주어 승리를 도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또한 일본에 억류된 러시아 포로들을 상대로 한 공산주의 의식화교육에 자금을 댄 장본인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러시아혁명의 성공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월가에서 일어나는 금융범죄의 십중팔구는 유대인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다. 유대인 범죄자들에 대한 유대인 사회의 반응은 침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죄의 유무와 경중을 떠나 무조건 동족을 옹호하고 두둔하는 행태는 유대인의 잘 알려진 특성들 중 하나다. 몇 년 전에는 유대인 깡패들이 이끌었던 도박,매춘 조직에 대한 당국의 조사결과가 유대인 사회의 격렬한 반발로 끝내 기사화되지 못했던 일도 있었다.
월가 유대인들이 관련된 최근의 사건으로는 1,200만 달러 상당의 주식과 리버티채권(전시용국채)이 조직적으로 도난당한 사건을 들 수 있다. 1918년 봄 월가의 증권회사들이 내보낸 주식과 채권 배달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같은 일은 아무런 규명도 없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1920년 초, 몇몇 연루자들이 체포되어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월가를 약탈하기 위한 일부 유대인들의 거대한 음모였다. 유대인 범죄자들은 유대인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도둑질한 증권들을 은행들에 대출담보로 잡히는 형식으로 현금화했다.
이 정도의 무도함에 법을 존중하고 질서를 사랑하는 정직한 국민들이 받는 마음의 상처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이 유대인 부호 범죄자들은 영리한 유대인 변호사들에 의해 변호되고, 유대인 사회 역시 이 범죄자들에게 존경심을 바친다. 이들이 저지른 범죄로 피해를 입은 쪽은 비유대인이고, 비유대인 자본이 아닌가?
유대인 사회는 이들의 범죄에 철저히 침묵한다. 사건이 유대적 성격이 만천하에 드러난 뒤에도 뉴욕 케힐라는 철저히 무시했다. 사건의 주모자와 하수인들 모두가 유대인이었는데도 말이다.
25. 미국의 유대인 독재자 버나드 바룩 - 디어본인디펜던트. 1920.11.27.
지난 세계대전 덕분에 미국 유대인의 부는 크게 불어났다. 지난 전쟁을 통해 새롭게 백만장자 반열에 오른 뉴욕시 거주자의 73%가 유대인이라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이 나라와 유럽에서 유대인의 부와 권력은 더 한층 공고해졌다. 이를 반영하듯 현재 국제연맹 총장, 국제연맹 이사회 의장, 그리고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 알렉산더 밀레랑이 유대인이다. 지난 전쟁에 대한 책임을 규명하는 것이 목적인 국제연맹 산하 조사위원회 위원장도 유대인인데, 그의 지휘 하에서 많은 중요한 문서들이 증발했다고 한다.
현재 프랑스,독일,영국에서 유대인의 금권은, 그들이 퍼뜨리고 있는 불순한 사상들과 발맞춰 기승을 부리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비유대인은 아무도 없다. 이 나라에서도 유대인의 독재는 러시아의 그것에 못하지 않다.
월가를 완전히 접수하지는 못했을지언정 유대인은 그래도 이 나라를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를 입증한 이는 월가 출신의 유대인 버나드 바룩이다. 그는 미국의 유대인 총독으로 불리기까지 한 인물이다. 그가 한 번은 이렇게까지 말했다고 한다. "보라, 내가 미국의 디즈레일리다!"
버나드 바룩은 의회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기간 동안 나보다 더 큰 권력을 가졌던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여지없는 사실입니다." 이는 허풍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는 이 나라의 국민이 부여한 합법적인 권력이 아니었다. 그의 권력은 전쟁 동안 모든 가정과 상점, 공장, 은행, 철도, 광산에 미쳤다. 이 나라의 국민이 뽑은 정부와 군대도 그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의 권력은 모병 과정에도 개입되어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추락과 출세가 달려 있었다.
버나드 바룩의 권력은 무책임하면서도 무제한 것인 것이었다. 이 나라의 국민들은 무엇에 관한 것이든 이 유대인과 그의 유대인 동료들에게 복종해야 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1917년 이전에 이 유대인의 이름을 들어본 미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를 모르는 미국인이 거의 없을 것이다.
미국이 지난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에는 아무도 몰랐던 이 유대인은 미국의 참전과 함께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요직에 올랐고, 기이하게도 이 나라의 합법적 정부는 그가 무슨 제왕이라도 되는 듯 그의 권위를 존중하고 그의 명령을 따랐다. 그는 자신의 결정에 이의가 있으면 대통령에게 말하면 될 것이라고 했으나, 저간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특출한 유대인은 권력 지향적 유대인 야심가들의 표본과도 같은 인물이다.
버나드 바룩은 1870년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유대인 의사 시몬 바룩의 아들로 태어났다. 19세에 뉴욕시립대를 졸업했다. 졸업 후 버나드 바룩은 다년간 경제를 독학으로 집중 공부했다고 한다. 27세 때 월가의 증권회사에 취직했다가, 1900년 최사한 뒤 뉴욕증권거래서 회원자리를 확보했다.
적어도 그의 측근이나 동료들이 전시산업위원회에서의 활동을 통해 큰 축재를 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청문회 기록을 보면,
그래함 의원 : 귀하는 주식거래를 유럽의 전쟁에 참여할 때까지 계속 하고 있었습니까?
바룩 : 사실 당시 사업에서 손을 떼고 은퇴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시산업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은퇴하려던 한 개인사업가가 어느 날 갑자기 전쟁 동안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전시산업위원회의 수장으로 덜컥 임명되었다는 얘기를 믿으라는 말인가?
버나드 바룩은 언제부터 윌슨 대통령과 알고 지냈을까? 어떻게 정부의 공직자도 아닌 일개 사업가가 국가전체에 그토록 큰 파급력을 지닌 요직에, 그것도 바룩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서 임명될 수 있었을까? 바룩은 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래함 의원 : 대통령과는 전쟁 전에도 아는 사이였습니까?
바룩 : 그렇습니다.
그래함 : 대통령이 임명문제에 관해 귀하와 상의했나요?
바룩 : 아니요. 만약 그런 자리를 제안했다면 고사했을 것입니다.
그래함 : 대통령과 만나고 얼마 후에 임명된 것입니까?
바룩 : 기억이 안 납니다.
기억이 안 난다며, 그는 곧 화제를 바꿔 다른 쪽으로 예기를 끌고 갔다.
바룩 :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얘기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1915년 즈음 나는 이 나라가 유럽의 전쟁에 대해 얼마나 준비가 안 되어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에 어떤 물자가 얼마나 소요될 것인가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구상이 본인의 위원장 재임 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바룩은 미국이 결국 참전할 것임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1915년만 해도 유럽의 전쟁은 보통 미국인들에겐 그저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사실 미국은 지난 세계대전과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럼에도 전쟁에 절대로 관여하지 않을 것임을 공언했던 윌슨 정부는 이후 유대인들과 함께 은근히 전쟁분위기를 돋구었다.
독자들은 1915년 가을 즈음 미국의 참전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프로파간다들이 이 나라 언론에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몰랐겠지만, 이제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룩 :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아마 그때 대선 이후로 대통령과 처음 만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함 : 첫 번째 대선 말씀입니까?
바룩 : 네.
일반인에게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다. 일반인이 대통령을 만났다면 대개 언제,어디서,어떻게 만났는지 분명하게 기억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바룩의 이런 모호한 대답은 그가 대통령과 수시로 만나는 사이였기 때문이 아닐까?
의회의 관련법안 통과를 거쳐 설치된 국방평의회는 국방성,해군성,내무성,농무성,상무성,노동성 장관 6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밑에는 7인의 고문위원회가 있었다. 이 7명 가운데 3명이 유대인이었고, 그중 바룩이 하나였다. 이들 분과위원회들 중 하나가 전시산업위원회였다.
그럼에도 전시산업위원회는 바룩의 의지대로 상위조직인 국방평의회를 제치고 이 나라의 전시정부를 사실상 주도했다. 바룩과 그의 조직이야말로 미국 전시행정의 최고실세였다. 이는 기록이 입증해주고, 바룩 자신이 인정하는 바와 같다. 대통령도 만사에 바룩의 권고대로 시행했다. 한 유대인이 나라 전체의 산업을 쥐고 흔드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바룩의 권력은 어쩌면 러시아에서의 레닌의 권력보다 큰 것이었다.
미국인들은 정부가 애국심에 기초해 그들의 이익을 돌봐 줄 것이라고 믿었을 뿐, 그들이 선출한 정부 위에 있는 유대인 정부를 보지 못했다. 바룩에게 이런 큰 권력이 주어진 것은 그가 단지 능력이 출중한 인물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유대인 누상정부로부터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을까?
바룩은 능력과 수완이 출중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능력과 수완이 전부가 아닌 곳이다. 능력과 수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알고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바룩이나 트로츠키나 모두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모든 사실들을 짚어 봤을 때 이들이 옳은 일을 했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제프리즈 의원 : 다른 말로 하면 지난 전쟁 동안 사람들이 뭘 가질 수 있고 없는지를 귀하가 결정했다는 말씀입니까?
바룩 : 그렇습니다. 대통령도 말했듯이 그런 문제에 대한 결정권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었습니다. 미국 육군과 해군에 어떤 물자가 얼마나 공급될지, 미국의 철도가 어떻게 운영될지, 동맹국인 영국군에 기관차를 제공할지, 또 그 기관차가 러시아에서 사용될지 프랑스에서 사용될지 모두 내게 결정권한이 있었습니다.
제프리즈 : 그것은 정말 대단한 권력이 아닙니까?
바룩 : 물론이죠. 전쟁기간 동안 나보다 더 큰 권력을 가졌던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26. 전시 미국에 대한 유대인 독재의 실상 - 디어본인디펜던트. 1920.12.14.
"이스라엘의 왕은 결코 감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특히 정욕에 빠져서는 안 된다. 본능이 이성을 지배하는 것과 같은 일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정욕은 정신적 능력의 최악의 적이므로 명민한 관찰력을 흐리게 하고, 어떠한 천재라도 더러운 동물적 본능을 채우는 일만을 생각하도록 하고 만다. 다윗의 신성한 후예인 세계의 왕은 인류의 복지를 위해 모든 개인적 향락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왕은 일 점이라도 잘못이 없는 만인의 광휘 있는 모범이어야 한다." - 제24의정.
일각에서는 윌슨 대통령이 독단적이었고 만사를 혼자 결정했다고 비판하는데, 이는 대통령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 있었던 유대인 정부를 모르고 하는 얘기에 불과하다. 실상 윌슨은 만사에 있어 유대인 정부가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적어도 바룩에게 있어 지난 전쟁은 미국이 참전하기 2년 전인 1915년에 시작되었고, 베르사유 평화회의가 종결된 1919년에 끝났던 셈이다. 바룩은 베르사유 평화회의에서도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유대인들은 윌슨을 최대한 이용했다. 그들은 윌슨을 둘러쌌다. 윌슨이 국민과 소통했던 것도 오직 유대인을 통해서였다. 유대인 언론인 데이빗 로렌스는 이 나라 유수의 언론인들을 제치고 윌슨의 대변인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윌슨의 임기가 말기에 이르자 유대인들은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하는 쥐 떼들처럼 윌슨의 민주당을 떠났다. 이후 공화당 정권 내부에서 "무슨 조사위원회가 이리 많나?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이다."라는 목소리들이 일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일을 하는 이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유대인이나 그들의 하수인들이다. 지난 전쟁 동안 바룩은 미국의 독재자였다.
"평화시에도 독재는 쓸 만한 정치체제가 될 수 있으며, 전시에는 국민들이 많은 것을 희생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독재가 더욱 수월해진다." - 버나드 바룩.
전시자본위원회의 수장 역시 유대인 유진 메이어였다. 왜 이렇게 나라 일에 있어 중요한 자리에는 항상 유대인이 발견되는 것일까?
바룩은 전쟁 동안 뉴욕의 한 유대인 극장주가 호화롭게 꾸며진 신축극장 5개를 개관한 일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왜 전쟁물자 생산에 도움이 되었을 한 비유대인 기업가의 사업계획은 불허하면서도, 동일한 계획과 사업소재지를 제시한 유대인에겐 승인을 내주었는가? 참으로 이런 권력은 한 사람이나 소수집단에게 주어지기에는 너무 큰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뉴욕에 거주하는 신흥 전쟁 백만장자들의 73%가 유대인이다.
27. 전쟁으로 떼돈을 번 유대인 구리황제들 - 디어본인디펜던트. 1920.12.11.
버나드 바룩은 국제유대인 정부의 많은 공작원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국제유대인 정부의 목표는 무엇보다 유대민족의 이익이다. 지난 전쟁 동안 이 나라의 모든 합법적 절차에 따리 임용된 공복들을 제치고, 윌슨 대통령의 귀를 소유했던 인물은 바룩이라는 월가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괴이한 일이다. 아직까지도 이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한 설명이 국민들에게 제공되지 않고 있다.
바룩은 베르사유 평화회의에도 관여했다. 휴전 성립 후인 1918년 12월 31일 전시산업위원장에서 물러난 그는 프랑스로 갔다. 청문회 기록을 보면,
바룩 : 사임 후 고향 사우스캐롤라인에 있었는데, 파리로 오라는 대통령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1919년 1월 초에 프랑스 행 배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당시 나는 더 이상 전시산업위원장이 아니었으므로 미국정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래함 의원 : 파리엔 얼마나 있었나요?
바룩 : 1월 초에 미국을 떠나 6월 말에 돌아왔습니다. 조지 워싱턴 호를 타고 대통령과 함께 귀국했죠.
그래함 : 파리에서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바룩 : 미국대표단 경제고문이었습니다... 주로 경제와 전쟁배상금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나는 평화회의 최고경제회의 멤버였습니다.
베르사유 평화회의를 보고한 한 프랑스 언론인은 코셔회의라 부른 일이 있다. 주요국 정상들은 하나같이 유대인 고문들,보좌진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특히 미국대표단의 높은 유대인 비율을 보고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평화회의 회의록에는 페르시아 대표의 발언이 있다.
"미국대표단은 폴란드,루마니아에게 그 나라의 유대인들을 위한 여러 가지 특권을 제도화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한 남의 나라 주권을 침해하는 요구의 부당성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들은 강하게 밀어붙였고, 결국 그들의 의지를 관철했다."
따지고 보면 베르사유 평화회의의 유일한 수혜자는 유대민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은 막전,막후를 가리지 않고 평화회의를 지배했다.
버나드 바룩은 개인사업 시절부터 구리업계와 친밀했다. 그리고 전 세계의 구리산업은 철저히 유대인의 수중에 있다. 구겐하임 가문과 루이슨 가문은 실로 지구상의 구리황제들이다. 이들은 또한 은 시장의 상당부분도 장악하고 있다.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기 전 바룩은 구리업계의 대표들과 회동했다. 미국은 1917년 4월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전쟁 동안 두 가문에서 미국정부에 구리를 공급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두 가문 사이에는 어떤 경쟁도 없었다는 것이다. 담합에 대해 그들은 단지 바룩의 권고에 따랐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바룩과 양 가문 사이의 합의에 따라 미국정부에 대한 구리공급은 오직 루이슨 가문 소유의 미국금속판매회사를 통해서만 일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하지 않고서는 미국정부와 거래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미국정부의 구리조달에 있어 사는 쪽과 파는 쪽 모두를 지배했던 유대인은 외부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했던지, 그들의 애국심을 널리 선전할 필요를 느꼈다. 바룩,루이슨,구겐하임은 애국심이 충만한 가문들로서 필요하다면 수익을 따지지 않고 구리를 공급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바룩 : 그들은 정부가 제시하는 가격에 공급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양측은 10년 전의 시가인 16센트로 합의를 보는 쪽으로 일을 추진했습니다. 당시 구리의 파운드 당 평균시가는 32~33센트였습니다.
그러나 요란한 애국심 광고와는 달리, 실제로 정부가 지불해야 했던 파운드당 구리 값은 16센트가 아니었다. 그토록 선전되었던 구리업자들의 애국심은 어디로 갔는지, 정부는 전쟁 동안 파운드당 27센트를 지불하고 구리를 매입했다. 전쟁 기간 동안 미국정부가 사들인 구리는 약 6억 파운드였다.
더 기막힌 일은 전쟁이 끝난 뒤, 정부가 쓰고 남은 1억6천만 파운드를 애국적인 가격 16센트에도 못 미치는 15센트에 미국금속판매회사에 되판 것이었다. 전시 구리공급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린 유대인 구리황제들은, 전후의 거래를 통해서도 측정하기 힘든 이윤을 남긴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정부는 이들에게 봉이었다.
버나드 바룩은 결정권은 자신이 보유하되, 책임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방향으로 업무체계를 구축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권력이었다. 업자들과 관련사항들에 대한 합의를 보고 결정을 내렸던 주체는 바룩과 전시산업위원회였으나, 정작 계약체결은 거래내용에 무지한 정부관리들에게 떠넘겼다. 따라서 문제가 생겨도 바룩과 전시산업위원회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도 없게 만든 것이다.
28. 미국 연극계를 접수한 유대인 - 디어본인디펜던트. 1921.1.01.
비유대인 대중의 감성과 사고방식 통제를 목표로 하는 유대인 프로그램에서 극장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시온의정서에도 연예산업은 비중있게 언급된다. 영화,연극을 통해 막후의 권력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관념과 사상을 널리 확산시킬 수 있다. 과거의 잔재들이 파괴되고 있는 적화된 러시아에서도 극장들만큼은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 데에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연극,영화는 언론만큼이나 대중의식 통제에 유용한 도구다.
현재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산업으로 부상한 영화산업은 100% 유대인의 지배 하에 있다. 유대인의 영화산업은 오늘날 의식있는 사람들로부터 전 세계에 부도덕한 풍조를 퍼뜨리는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다. 유대인이 미국의 주류업계를 장악하고 난 뒤 미국인의 음주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리고 유대인이 영화산업을 장악하고 난 뒤 미국에는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두고 볼 일이다. 어느 분야든 유대인이 장악하기만 하면 곧 부도덕의 온상이 된다.
영화,연극계는 단지 경영차원에서만 유대적인 것이 아니다. 집필진,제작진,출연진도 거의 유대인 일색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유대인의 득세와 함께 미국 영화,연극의 질과 도덕성이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영화,연극계에서 비극은 금기대상이다. 희극 오페라도 화려한 색상과 율동만이 난무하는 단순한 눈요기 거리로 전락했다. 연기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졌고, 무대장치와 설정이 중시되었다. 음란성이 점령했다.
사실 방종하고 음탕스러운 카바레 문화의 기원도 유대인이다. 무대 위에서 반라의 무희들이 손님들을 유혹하는 식의 유흥문화가 비엔나에서 건너왔다고 선전하지만, 실은 비엔나의 유대인들이 만든 것이다.
유대인은 그들의 민족적 계획을 빼고는 만사에 있어 빠른 성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영화,연극인들을 양성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온갖 수단을 통해 스타를 급조해내고, 이들의 부족한 자질로부터 관객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화려한 조명, 무대장치, 속옷차림의 출연진에 의존하는 것이다.
연극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유대인은 예술적 측면이 아니라 상업적 측면에서 이들을 바라본다. 유대인에겐 예술 자체보다는 예술을 이용한 돈벌이가 더 중요하다. 연극의 성공기준이 예술성보다는 관람객 수에 맞춰진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는 것이 철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9. 유대인 연극 트러스트의 부상 - 디어본인디펜던트. 1921.1.08.
유대인이 연극계를 지배하는 것 자체는 문제 삼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가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성취되었고, 또 반사회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유대인 트러스트의 지배 아래서 연극과 관련된 모든 것이 상업화되었고 속악화되었으며 천박해졌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연극에 호의적이지 않은 비평가들을 해고하도록 신문사들에 압력을 넣었고,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비평가는 극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는 정도의 수준 밖에 안 되는 인물들이었다. 자신들의 위치가 확고해짐에 따라 숨겨 둔 발톱을 드러냈고 폭군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30. 연극계의 신(新)군주 슈베르트 형제들과 데이빗 벨라스코 - 디어본인디펜던트. 1921.1.22.
크게 봤을 때 미국의 연극 시장은 소수의 영리한 유대인 제작자들과 다수의 잘 속아 넘어가는 비유대인 관객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미국의 연극과 영화 예술이 이들 유대인 소수의 통치 하에서 쇼 비즈니스로 전락하게 된 것도 事必歸正이다. 더 큰 돈벌이를 위해서는 대중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이들의 사업관을 감안하면, 왜 이 나라의 연극예술이 오늘날의 이 지경으로 추락했는지를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딱한 것은 이 모든 불미스런 세태에 대한 대중의 무감각이다. 그들도 영화와 연극은 그저 쇼 비즈니스일 뿐이라는 연예계 유대인 군주들의 관념에 길들여진 듯하다. 상업화,속악화, 그리고 본질의 전복은 유대인들이 어느 직종을 파고들어 뿌리를 내리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를 가장 잘 증언해줄 수 있는 이들은 아마도 미국 법조계의 사람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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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놈들이 유대퇴폐문화를 퍼뜨려서 사람들이 스스로생각할능력을 잃게하고 유대인놈들이 나라를 통치하고잇다는것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 의사 박멸. 민중의학 육성. 유대의학 박멸. 민족전통의학 육성. 유대자본 박멸. 파쇼조국 건설.
맞습니다 ㅋㅋ 꾸준히 봐주셔서 감사드려요^^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