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유대인 영국 수상 디즈레일리가 묘사한 유대인 - 디어본인디펜던트. 1920.12.18.
유대인은 이제껏 자신들의 이미지가 왜곡되었다고 항상 불평해왔다. 그들에겐 합당하지 않은 칭송 외의 유대인에 대한 모든 얘기는 왜곡이요 박해다. 그러나 정작 왜곡의 명수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실로 오래 전부터 러시아의 공산화를 위해 자신들의 수중에 있는 언론과 외교 수단을 총동원해 러시아와 차르 정부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요즘 폴란드에 대한 비방공세도 유대인이 주도하고 있다. 이들에게 폴란드의 죄란 폴란드인들이 유대인으로부터 그들의 조국을 구하려 했다는 것이다.
유대인이 은밀히 자신의 나라를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나라의 애국자들이 일어설 때마다, 유대인은 왜곡,중상모략,반유대주의,박해를 외친다. 그러나 그 애국자들이 유대인이 벌인 일들에 대해 무엇을 왜곡했고 또 중상했는지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지금도 자신들의 조국을 지키려는 폴란드인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 유대인은 떳떳하게 말할 수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민족들에 대한 지배를 획책하는 유대인 자신의 죄부터 실토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짓말, 사실왜곡, 책임전가, 박해에 대한 하소연 등이 비유대인의 동정심을 이끌어 내고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유대인이 의존하는 주된 수법이다. 이런 일에 있어 프리메이슨, 특히 언론과 학계에 있는 비유대인 프리메이슨은 훌륭한 도구가 된다. 유대인을 위한 변호에 있어 프리메이슨은 국제유대인의 수족노릇을 해 왔다. 지난 세기를 통해 프리메이슨 결사는 실로 유대인 세계전략의 실행도구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미국의 역사 속에서도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국가적 대사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감지해 이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했던 때가 두 번 있었다. 조지 워싱턴 시절과 존 애덤스 때였다. 이때 프리메이슨에 대해 많은 책들이 출간되었고, 기독교 성직자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위험성에 대해 설교했다. 이런 선상에서 근대의 프리메이슨 결사는 18세기 초 영국중앙은행을 세운 유대인들이 만든 것이라는 한 미국 유대인 사회 지도자의 얼마 전 공언은 의미심장하다. 이 공언으로 그간 프리메이슨 결사를 둘러싼 의구심이 상당부분 해소되었고, 프리메이슨 결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유대인 단원들 또한 자신들도 몰랐던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온의정서에서도 얘기하듯이 프리메이슨은 용도가 떨어지면 폐기대상일 뿐이다.
비콘즈필드 백작이자, 영국수상을 지낸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가 쓴 책들에도 유대인 관련 얘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소설 <코닝스비>(1844)에는 시도니아라는 유대인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디즈레일리는 네이선 로스차일드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는 시도니아를 통해 유대인을 대변하려 한다. 소설에서 시도니아는 먼저 청년 코닝스비에게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힌다. "나는 12사도들이 그들의 주인을 따르기 전에 가졌던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네."
디즈레일리가 유대인을 한 종교의 신자로 언급한 것은 이 부분 뿐이고, 나머지 경우에는 유대인을 한 민족으로 지칭하고 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과 영국 및 스페인 연합군이 싸웠던 반도전쟁(1808~1814) 동안 시도니아의 부친은 여러 나라들을 상대로 군수계약을 따내 아주 큰돈을 벌었다." 유대인들에게 전쟁은 최고의 추수라는 통설은 엄연한 사실이다.
"시도니아의 부친은 자본을 워털루 차관에 쏟아 부었고, 이 전투가 영국의 승리로 끝났을 때 그는 유럽 최고 차본가 반열에 올라 있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프랑스,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 모두가 그에게 손을 벌렸다. 그는 오직 스페인만 외면했다." 이것이 유대인 디즈레일리가 기술하는 전쟁과 평화 시의 유대인 자본가의 모습이다. 전쟁으로 돈을 벌고, 이 돈을 전쟁이 끝난 뒤의 재건사업에 빌려 주는 것이 유대인 자본가, 혹은 국제금융가의 진면목이다.
"10년 동안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 덕분에 시도니아의 부친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 형제나 친척 등 믿을 만한 사람들로 하여금 은행을 열게 했다. 그리하여 그는 세계 돈 시장의 군주가 되었으며, 따라서 그 외의 모든 것들에 대한 군주도 되었다." 칭송조만 빼면, 유대인 국제금융가들에 대한 비유대인들의 묘사와 다를 바 없다.
디즈레일리는 유대인이 예수회에도 침투해 있었음을 드러낸다. "부친이 어린 시도니아의 교육을 모든 세상사와 학문에 정통했던 가정교사에게 맡겼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레벨로라는 이름의 가정교사는 혁명 전에는 예수회 단원이었고, 혁명 후에는 자유주의 운동가였다. 그리고 그는 스페인 의회의 의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레벨로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어린 시도니아에게서 유대민족 특유의 지적 조숙함을 발견했다."
이후 시도니아는 학습과 방대한 여행경험을 통해 세상사의 비밀들과 내막을 터득하기에 이른다. 즉 세상에 대해 그 어떤 환상도 품지 않는 인물이 되었다는 얘기다.
"유럽의 군주들 중에서 시도니아만큼 많은 비밀공작원을 부렸던 이는 없었다. 시도니아의 공작원들은 각국에서 암약했다. 그는 세계의 반체제 인사들과 교류했다... 그는 특히 보통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사와 진실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디즈레일리가 그리고 있는 시도니아라는 인물은 돈이라는 가장 치사한 권력으로 인간의 모든 동기와 욕망을 아우르는 유대인 국제금융가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마치 시온의정서 차원의 음모자를 연상케 한다. 사실 세계에는 시도니아와 같은 유대인이 한두 명 뿐만이 아니다.
한편 시도니아는 영국에서 유대인이 겪는 차별에 대해 얘기한다. 권력의 찬탈과 지배를 획책하며 한편에서는 동정심에 호소하는 꼴이라니! '우리 불쌍한 유대인들'을 외치는 뉴욕 백만장자 유대인들의 손끝에 이 나라의 입법자들과 대통령이 놀아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어쨌든 시도니아는 차별받는 유대인과 혁명의 관계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멸시와 천대를 감내하기보다는 자신의 재산과 생명이 위협에 처하게 되더라도 혁명을 원하는 것이며, 따라서 평등과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것이라네." 여기서 우리는 시온의정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자유주의를 떠올려 봄직하다. 의정서에 의하면, 자유주의는 어떤 생산적인 결과도 낳지 않는다. 단지 자유주의가 기존의 권력과 사회체제를 무너뜨리는데 매우 유용한 도구임을 의정서가 강조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체제 전복적인 자유주의를 유대인은 어떻게 비유대인 사회에서 배양하고 확산시킬까? "보수당이 중요한 선거에서 패배하는 까닭은 유대인들이 반대편에 힘을 몰아주기 때문이라네. 교회가 자유주의에 물든 한 대학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없음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가? 돈 많은 유대인들이 즉각 나서 그 대학을 살려 내는 것이라네... 그리고 세대가 바뀔 때마다 그들은 더욱 강력해지고, 그들을 적대시하는 사회에 더욱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네."
디즈레일리는 1844년에 이 글을 썼다. 그의 예언은 과연 옳았을까? 이는 오늘날 전 세계를 무대로 활개치고 있는 유대인 급진주의자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시도니아는 계속 말한다. "나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들에 꼭 개입하는 것이 내 일이라네. 그러나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와 전쟁을 벌이려 한다는 신문기사 따위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지. 오직 어느 나라의 군주가 큰돈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귀띔을 받았을 때야 나는 진정 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알아차리지."
소설 <코닝스비>에서 시도니아는 어떤 관직도 맡고 있지 않다. 당시만 해도 자신을 유대인으로 밝히는 유대인이 전면에 나서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대인은 오랫동안 막후에서 주요 국가들의 국사와 국제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보이지 않는 유대인의 힘이 겉으로 드러나는 유대인의 힘보다 더 강한 것임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이 근래 들어 여러 공직에 올라 전면에서 활동하는 일이 잦아진 것은 유대인의 막후 권력이 더욱 강해졌음을 의미한다.
"몇 년 전 러시아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적이 있었다네. 그 때까지 러시아의 조정은 우리 가문과 거래를 했던 적이 없었지. 그들은 대개 네덜란드를 통해 차관을 조달하곤 했네. 사실 러시아는 폴란드에 사는 우리의 불쌍한 동포들을 핍박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우리는 그들을 곱게 보지 않았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끌려 로마노프 가문과 시도니아 가문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즉시 나는 러시아의 재무장관과 면담했지. 캥크린 백작이 재무상이었는데, 그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유대인이었네... 그런데 차관의 조건을 논의하다보니 스페인과 관련된 어떤 문제가 대두되었지. 그래서 나는 러시아에서 스페인으로 향했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은 맨디자발 경이었어. 스페인의 수상으로 그는 아라곤 출신의 비밀유대인이었다네... 그런데 마드리드에서 논의된 사항들 중에는 프랑스의 동의를 요하는 부분이 있었어. 그리하여 나는 또 파리에 가서 프랑스의 총리와 만났다네. 나폴레옹 치하에서 육군원수를 지내기도 했던 이 인물 역시 유대인의 혈통을 지녔지... 이 모든 논의 끝에 우리는 이 사안을 해결하려면 중재적인 역할을 해줄 제3의 열강을 끌어들일 필요를 느꼈어. 그리하여 우리는 프로이센으로 눈을 돌렸지. 며칠 후 프랑스 총리와 면담요청을 받은 프로이센 대사가 우리의 회의에 참석했네. 그런데 프로이센 대사 아르님 백작도 유대인이었다네."
이어지는 시도니아의 고백은 모든 사람들이 꼭 명심하고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친애하는 코닝스비여, 그러므로 세계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들은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들이 결정하는 것이라네."
마지막으로 디즈레일리가 시도니아의 입을 빌어 한 말들 가운데 가장 의미심장한 것일지도 모를 다음과 같은 발언을 소개한다. "이제껏 유럽에서 일어났던 신흥사조운동들 중에 유대인이 주도하지 않은 것은 없었네. 최초의 예수회도 유대인이었고, 지금 서유럽을 위기감으로 빠뜨린 저 러시아의 기묘한 외교정책도 유대인이 꾸몄고 또 실행하는 것이지. 또한 영국에는 거의 알려진 바 없지만, 지금 독일에서 잉태되고 있는 막강한 혁명, 아니 두 번째의 종교개혁 운동이라 할 만한 이 혁명도 유대인들에 의해 계획되고 있는 것이라네."
유대인들은 시온의정서가 악의적인 날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럼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글도 반유대주의자들의 날조물인가? 전 세계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는 이 유대인이 그의 동포들을 악의적인 의도에서 위험한 집단으로 왜곡 묘사한 것인가?
디즈레일리는 1844년에 출간된 <코닝스비>에서 어떻게 1848년의 독일혁명을 예언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유대인이고, 독일혁명의 기획자도 유대인이며, 혁명의 목적과 목표가 유대적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유대인 문제 시리즈를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느 말도 디즈레일리의 말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38. 유대인에 저항하다 무릎 꿇은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 - 디어본인디펜던트. 1921.1.15.
윌리엄 태프트(1909~1913 재임) 前대통령은 너무 호인이라, 그에게 세상은 동의할 것은 많고, 반대할 것은 거의 없는 곳이다. 이러한 예스맨 기질은 물론 인생을 편히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와 화합은 분쟁의 소지가 제거된 뒤에야 찾아오는 법이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식의 태도는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껏 본지에 대한 유대인 사회 자체의 항의공세로는 부족함을 느꼈던지, 최근 들어 그들 대신 앞에 나서 본지를 공격하고 유대인을 보호해줄 비유대인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러시아에서처럼 비유대인이 다시 한 번 유대인을 위해 총대를 메는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유대인들이 윌리엄 태프트에게 접근한 것이 작년(1920) 11월로 보인다.
그런데 태프트가 이후 발표한 성명문을 봤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가 본지의 유대인 문제 관련기사들을 읽어본 일이 없으며, 본 시리즈에 대한 그의 시각이 거의 유대인들에게서 나온 것이 자명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태프트는 성숙한 결론에 도달한 사람마냥 작년 12월 23일 시카고 라쌀호텔에서 열린 성약의 형제단 모임에서 본지의 유대인 문제 시리즈를 바보같은 짓으로 폄하한 것이다. 그의 연설에는 이 시리즈가 왜 바보같은 짓인지, 이 시리즈의 오류가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사실 태프트가 자신의 연설문을 직접 작성했는지도 의문이다. 어느 랍비가 써준 것을 대독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태프트의 연설은 유대인의 시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날 태프트는 유대인의 메가폰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태프트는 종교적,인종적 차별에 반대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같은 입장일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이라는 집단이 야기하는 부정적 영향이 엄연한 현실인데, 국가와 사회공동체를 위해 이를 조명하고 이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 종교적,인종적 차별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태프트와 유대인들 사이의 그 일은 그의 대통령 재임시절(1909~1913)로 거슬러 올라간다. 워싱턴 유대인 로비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대통령이나 대통령이 될 만한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로비가 태프트를 과소 평가했는지 대통령이 되기 전 양자관계는 딱히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대통령이 된 후 유대인들과 충돌하는 일이 있었고, 한때 유대인 사회는 그를 비우호적 인물로 간주했다. 그러나 결국 태프트는 유대인에게 무릎을 꿇을 수 박에 없었고, 이후 유대인에게 고분고분한 태도를 견지해 왔다.
태프트와 유대인 사이에서 있었던 그 일이란 미국의 국익과는 상관없이 유대인의 요구에 따라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 왔던 다른 나라를 적대시하게 되었던 적잖은 사례들 가운데 하나와 관련된 것이다.
근래 공산혁명으로 끝내 유대인에게 무릎을 꿇은 러시아는 이미 수백 년 동안 유대인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 온 나라였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유대인 거주지역을 제한하되, 제국에서 가장 비옥한 영토를 유대인 거주지역으로 할당하는 등 최대한 원만한 해법을 지향해 왔다. 더욱이 거주지역 제한법의 느슨한 집행으로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거주지역 밖에 살면서 러시아의 곡물과 주류 유통을 장악하고, 또 언론계에 진출해 반정부여론을 주도했다. 그러던 중 유대인의 농민착취에 대한 반감이 증폭되자, 러시아로부터 유대인 박해라는 비명이 들려오기에 이른 것이다. 공산화된 러시아에서 유대인은 이제 박해라는 비명을 지르지 않고서도 마음껏 농민을 착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유대인이라는 신분제약에 구애받지 않고 러시아라는 광대한 나라가 제공하는 풍부한 돈벌이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러시아와 독일 유대인들이 미국에 이민와서 최소한의 기간에 시민권을 취득한 뒤 다시 러시아에 들어가 미국인 신분으로 돈벌이를 하는 일들이 잦아졌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이러한 국적세탁에 개의치 않았고, 그들을 법률상 계속 유대인으로 취급했다. 그러자 러시아 정부가 미국인을 차별한다는 민원이 미국 국무성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정부는 존 포스터 주러시아 대사에게 이 문제를 살펴볼 것을 지시했다.
1880년에 제출된 보고서에서 존 포스터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진정한 미국인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부당대우와 같은 것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단순히 사업적 차원에서 미국국적을 취득한 러시아,독일 출신 유대인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같은 시기 미국에선 언론에 의해 反러시아 캠페인이 한창이었다. 러시아가 미국인을 차별하고 있으며, 특히 자국 거주 유대인들에게 지옥 같은 삶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러시아의 주요 도시들에는 법적으로 허용된 유대인 인구를 상회하는 숫자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예컨대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법적 한도는 1,500명이나 실제로는 3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러시아의 수도에서 당국에 등록된 유대인학교는 하나 뿐이지만 실제로는 4천 명의 유대인 아동들이 무허가 유대인학교들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의 유력 일간지에는 유대인 편집자들과 기자들이 예외없이 발견됩니다." - 존 포스터 보고서. 1880.
만약 러시아가 유대인에게 지옥같은 곳이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비방과 흑색선전이 끊임없이 이어져 결국 러시아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상이 치유불능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물론 이 모두의 목표는 차르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고, 러시아를 국제무대에서 고립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미국의 유대인들은 미국이 러시아와 맺은 모든 조약들을 폐기,처분할 것까지 요구했다. 미국 입장에선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 아래서 재무장관을 지냈던 제임스 블레인은 유대인의 대거 미국이민에 대해 "호의를 베푼 결과가 미국의 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쓴 바 있다. 유대인 문제에서 역시 자유롭지 않은 처지의 미국이 러시아에게 유대인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모양이 된 것이다.
미국대사와의 회견에서 러시아의 외무장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러시아의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미국의 발전에 기여한다면 그 숫자는 많을수록 좋을 겁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목적이 미국인들을 착취하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역사가 거듭 입증해온 것이 하나 있다면, 유대인이 일하는 자가 아니라, 남이 일한 결실을 챙기는 자라는 것이다. 유대인의 대거 미국이민에 대한 30~40년 전의 미국 정치가들의 견해는 대개 부정적인 것이었다.
유대인의 反러시아 프로파간다 캠페인은 태프트 대통령 재임시절에도 한창 진행 중이었고, 워싱턴에서 유대민족의 대사관 노릇을 하는 유대인 로비는 태프트를 움직여 러시아를 최대한 압박하려 했다. 1832년에 체결된 미국-러시아 통상조약이 80년 동안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을 증진시켜 왔고, 미국과 러시아가 이제껏 아무런 문제없이 선린우호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러한 조약을 폐기하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는 터무니없는 거라고 태프트는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추가로 태프트에게 외국이민자를 상대로 영어시험을 실시해야 한다는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것도 요구했다. 미국에 대한 유대인의 계획에 있어 유대인의 제약없는 대량이민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일들로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채근에 시달린 태프트 대통령은 마침내 미국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들에게 면담을 제안했다. 1911년 2월 15일 백악관에서 제이콥 쉬프, 제이콥 퍼스, 루이스 마셜, 아돌프 크라우스, 시몬 울프, 헨리 골드포겔(판사)과 만났다. 사실 이 날의 면담은 논의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웠다. 태프트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러시아와의 통상조약을 놓고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었다.
태프트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상대로 미리 준비한 연설문을 읽었다. 요지는 미국의 국익상 러시아와의 통상조약 폐기는 고려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편 태프트는 러시아 유대인의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민은 환영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탁자를 탕탕 두들겨 가며 협박조의 언사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데 익숙했던 유대인 지도자들은 아마 사람 좋기로 소문난 태프트를 쉽사리 요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 대통령의 빈틈을 허락하지 않는 분명한 의사표시는 그들을 놀라고 분노하게 했다.
연설문 낭독이 끝나자 유대인 지도자들이 불만을 표시했으나, 시종일관 냉정하고 절제된 태도를 유지했던 태프트는 동요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이들에게 록힐 주러시아 미국대사의 편지를 전달했다. 편지는 러시아 정부의 자국 내 유대인에 대한 처우와 관련해 서구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몇 마디 덕담을 끝으로 회담을 끝냈다.
백악관을 떠나면서 제이콥 쉬프는 대통령과의 악수를 거부했다. 다음날 태프트가 말했다. "어제 쉬프 씨가 단단히 화가 났더구먼." 이는 사실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백악관 계단을 내려오며 제이콥 쉬프는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내뱉었다고 한다. "이건 선전포고야!"
사실 유대인들이 미국-러시아 통상조약 폐기를 강요했던 데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음모가 있었다. 통상조약이 폐기되면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무역을 중계하는 역할이 독일 유대인들의 수중에 떨어질게 자명했다. 이는 엄청난 이권과 더불어 러시아에 대한 국제유대인의 증대된 영향력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있어 미국과 러시아는 똑같은 피해자였다.
제이콥 쉬프는 러시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산 인물이다. 이날 이후 전국 유대인 단체들에 명령이 떨어졌고, 제이콥 쉬프는 거대한 자금을 풀었다. 미국 연방 상하의원들에 대한 미국-러시아 통상조약 폐기 청원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 어떤 의원도 빼놓지 않았다.
의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청원공세가 진행되고 있었던 시기 유대인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언론은 태프트 대통령에 대해 한결같이 비판적인 논조를 유지했고, 특히 유대인의 지역사회 언론은 심한 표현들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회담이 있었던 날로부터 약 10개월 후인 1911년 12월 13일, 상하원을 포함한 미국의회는 러시아와의 통상조약을 폐기할 것을 대통령에게 명령하기에 이른다. 국제유대인이 승리한 것이다. 유대인이 자금과 조직력으로 미국 국익에 합치하는 정책을 폐기하도록 만든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연히 태프트는 재선에 실패했다. 한편 유대인 언론의 집중표적이 되었던 또 하나의 인물이 태프트의 최측근이자 광산재벌 존 해이즈 해먼드였는데, 그의 죄 역시 통상조약 폐기에 반대했고, 유대인에 대한 러시아 차르 정부의 시각을 공유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1912년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성약의 형제단 지도부가 백악관에 모여 유대인의 권익보호를 위해 그해 가장 큰일을 한 비유대인에 준다는 공로상을 태프트 대통령에게 수여한 것이다. 수여식에 이어 백악관 앞뜰에서 촬영된 사진을 보면 유대인 유력인사들에 둘러싸여 있는 대통령은 그다지 밝은 표정이 아니다.
이후 유대인들은 대통령이 통상조약과 같은 기능을 발휘하는 모종의 협정을 러시아와 맺지 않을까 감시의 눈초리를 떼지 않았다. 대통령의 일정 중에 불분명한 구석이 있는 경우에는 유대인들의 추궁이 뒤따랐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통상조약 폐기 후 미국과 러시아 간의 중계무역권은 예상대로 독일 유대인들의 차지가 되었고, 따라서 이들은 러시아에 대해 더 큰 지렛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전 세계에 대한 국제유대인의 제국주의적 의제들에는 엄청난 돈이 소요된다. 그리고 유대인은 이 비용을 비유대인들이 지불하게 만든다. 결국 미국을 비롯한 서방 유대인의 反러시아 캠페인은 로마노프 왕가의 몰살과 러시아의 공산화에서 결실을 맺었다.
한때 굳건한 태도로 유대인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했던 태프트가 요즘엔 유대인을 위한 인간메가폰 노릇을 하고 있으니 씁쓸한 일이다.
39. 유대인의 압력에 굽히지 않았던《뉴욕헤럴드》 - 디어본인디펜던트. 1921.2.05.
비판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접하는 유대인의 본능적인 첫 반응은 폭력 아니면 폭력을 전제로 한 협박이다. 만약 유대인의 눈에 박힌 대상이 사업체인 경우 유대인이 항상 쓰는 수법은 보이콧이다. 보이콧 공세는 먼저 표적 사업체에 대해 부정적 인상을 퍼뜨리는 언론의 노력에서 출발한다. 유대인 보이콧은 사업체나 상품에서 그치지 않고, 상품을 사용하는 소비자에 대한 보이콧으로 이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세기 말 뉴욕 유대인들의 3년간에 걸친, 90년 역사의 <New York Herald>에 대한 보이콧 사건은 되짚어 볼 만하다. 리빙스턴을 찾기 위해 헨리 스탠리를 아프리카에 보낸 것도 뉴욕헤럴드였고, 지네트 대장이 이끄는 북극탐험대를 후원한 것도 뉴욕헤럴드였다. 대서양횡단 전신 케이블을 설치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신문사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뉴욕헤럴드의 가장 의미있는 공적은 유대인들의 압력에 맞서 언론사의 독립성을 수호했다는 것이다. 이 신문사의 논조는 매수나 압력의 대상이 아니었다.
1910년 당시 유대인 금융가들은 멕시코 정부의 채권을 아무 것도 모르는 미국인들에게 대량 매도할 생각이었는데, 뉴욕헤럴드가 멕시코에서 곧 혁명이 일어날 것임을 보도했다. 유대인 금융가들이 격노했음은 물론이다.
이런 가운데 뉴욕 유대인들이 품은 불타는 야망 하나가 있었는데, 유대인을 뉴욕시장 자리에 앉히는 것이었다. 뉴욕의 유대인 부호들이 모여 각 뉴욕 신문사들에 유대인 시장후보를 지지해줄 것을 요구하는 비밀편지를 보냈다. 신문사 사주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뉴욕헤럴드 편집자들이 편지를 프랑스에 머물던 사주 제임스 고든 베넷에게 전신으로 보냈다. 편지를 읽은 베넷은 다음과 같이 회신했다. "편지를 지상 공개하라!"
유대인 부호들의 오만함이 묻어 있는 편지는 뉴욕헤럴드의 사설을 통해 공개되었고, 뉴욕 시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뉴욕헤럴드는 사설을 통해 언론은 특정 이익집단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 존재함을 강조하며, 유대인들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유대인 부호들이 입에 거품을 물었음은 물론이다.
유대인 부호들의 뉴욕헤럴드 광고 보이콧이 시작되었다. 일심동체가 된 듯 유대인 광고주들은 일제히 뉴욕헤럴드로부터 광고를 거둬들였다. 그러나 베넷은 버텼고, 결국은 승리했다. 베넷은 1918년 세상을 떠났다.
한편 유대인들은 베넷이 죽은 후 다시 한 번 뉴욕헤럴드를 표적으로 비공개 보이콧에 돌입했다. 결국 프랭크 먼시가 뉴욕헤럴드를 인수했고, 그는 놀랍게도 뉴욕헤럴드를 뉴욕선으로 개명함으로써 용감했던 신문의 명맥을 끊어 놓았다. 베넷의 신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함께 일했던 언론인들도 모두 흩어졌다.
무엇이든 뉴욕에서 나오는 것은 두 번 세 번 검증하고 생각해봐야 한다. 뉴욕에서 나오는 그 무엇이든 이 나라 사람들의 의식과 사고방식을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유대인 정부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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