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성약의 형제단 회장이 논하는 유대인 - 디어본인디펜던트. 1921.5.14.
본 시리즈가 유대인 문제에 대해 전하는 내용 대부분은 유대인 사회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출처에서 나온 것들이다.
1900~1904년까지 성약의 형제단 회장을 지냈던 변호사 레오 레비는 이렇게 말했다. 출처는 성약의 형제단이 그의 사후 출간한 추모서다.
"유대인 문제의 핵심은 유대인이 너무 과도한 것들을 요구하고, 취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유대인이 다른 시민들 같이 적법한 테두리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조용히 살아왔다면 유대인 문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은 항상 사회적 지위를 원한다. 항상 사회의 지배적 위치에 오르는 것을 고집한다. 따라서 비유대인이 왜 유대인은 그토록 정상을 고집하고 또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하려는가를 알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또한 이런 과정에서 유대인에 대한 경계심을 품고 적대적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런 귀결인 것이다." - 레오 레비. 성약의 형제단이 출간한 그의 추모서. p101.
"동유럽으로부터의 대거 유대인 이민으로 인해 미국에서도 이제 유대인 문제는 중요한 이슈로 부상했다." - 레오 레비. <추모서> p59.
"선의로 유대인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취하며 또 이에 자부심을 갖는 이들이 많은데, 유대인 문제는 톨레랑스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 p98.
"유대교를 믿지 않는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니라는 관념만큼 오류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는 생각도 없을 것이다." -p185.
"유대인이 유대교를 믿어 유대인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 p189.
"유대교를 믿는 여러 민족 출신들이 모여 유대인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 p190.
"우리의 권익을 추구함에 있어서도 한 종교집단이 아니라 한 민족공동체란 차원에서 해나가야 한다." - p190~191.
"똑같은 종교를 믿는다고 한 민족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자는 유대교를 믿지 않아도 영원히 유대인으로 남는다." - p200.
레오 레비 추도서를 읽으면서 한 가지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유대인 특유의 이중성이다.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유대인은 유대인과 비유대인에게 다른 권고를 한다. 유대인 게토를 들어 비유대인의 인종편견을 비난하지만, 한편으로 유대인에겐 게토를 만들어 비유대인과 분리된 삶을 살도록 권고한다. 유대인을 배제시키려는 비유대인 사회를 비난하면서도, 유대인 사회로부터 비유대인을 배제시키는 것은 당연시한다. 그 어떤 종류라도 비유대인의 연대는 음해하고 파괴하려 하면서, 자신들의 연대는 강화하려 한다. 비유대인 사회는 항상 열려 있어야 하지만, 유대인 사회는 닫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상의 선택은 유대인학교에 보내는 것이다. 유대인 아동을 유대인학교에 보내 유대인으로 보전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유대인 아동들을 무분별하게 비유대인 아동들과 섞여 지내도록 내버려 두면 아이들이 성장한 뒤 우리 민족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 p255.
"예외가 있을 수 있으나 무용(武勇)은 유대인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역사적으로도 기독교도 사회와는 달리 유대인 사회에서 이러한 덕목이 일반적인 칭송의 대상이 된 적은 없었다. 대신 유대인에게 두드러지는 것은 위험에 대한 감지력과 이를 피하고자 하는 성격이다. 이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위험에 맞서는 것을 중요시하는 서구열강 사람들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 레오 레비. 성약의 형제단이 출간한 그의 추모서.
레오 레비는 이러한 유대인의 성격이 그들을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싸움은 잘할지 몰라도 유대인만큼 인내할 줄 몰라 결국엔 유대인보다 못하다는 얘기다.
"역사 속에서 여러 민족들이 전쟁과 정복으로 勇名을 얻었으나 그 결실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런 나라와 민족들은 예외없이 부패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인내할 줄 알기에 이런 운명으로부터 안전하다. 유대인이 이방민족들보다 위대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레오 레비.
최근 유대인 사회 지도자들이 본 시리즈가 지난 기사에서 유대인으로서 영국수상을 지냈던 디즈레일리의 입을 빌어 유대인을 "위험한 체제전복주의자"로 중상했다고 본지를 비난한 바 있다. 그렇다면 1844년에 출간된 디즈레일리의 소설 <코닝스비>에 실린 구절을 재고해보자.
"이제껏 유럽에서 일어났던 신흥사조운동들 중에 유대인이 주도하지 않은 것은 없었네. 최초의 예수회원도 유대인이었고, 지금 서유럽을 위기감에 빠뜨린 저 러시아의 기묘한 외교정책도 유대인이 꾸몄고 또 실행하는 것이지. 또한 영국에는 거의 알려진 바 없지만, 지금 독일에서 잉태되고 있는 저 막강한 혁명, 아니 두 번째의 종교개혁운동이라 할 만한 이 혁명도 유대인들에 의해 계획되고 있는 것이라네." - 디즈레일리. <코닝스비> 1844.
다음은 레오 레비의 언급이다.
"1848년 독일혁명의 주체는 두말할 나위 없이 유대인이었다. 혁명 실패 후 당국의 추적을 피해 이들의 상당수가 미국으로 피신해왔다." - p182.
이후 이 독일계 유대인들의 일부가 미국 최고의 금융가들이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월가 투자은행 쿤앤로엡의 공동창립자이자 제이콥 쉬프의 장인이었던 솔로몬 로엡이다.
유대인 레오 레비는 유대인 문제가 실존하는 문제이며, 없다가도 어디든 유대인이 들어오는 곳이면 어김없이 생겨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反유대주의가 정당하며, 소위 反유대주의적 주장들의 오류를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도 알았다. 무엇보다 그는 유대인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유대인이 유대인이기를 중단하고 선민의식을 포기하는데 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자신이 유대인이어서인지 그는 열방을 지배하도록 운명 지워진 자신들의 미래에 온 힘을 실어 준다. 유대인 문제를 둘러싼 여러 사실들에 대한 그의 냉정한 판단과 솔직한 생각이 돋보이지만, 결국 유대인이기 때문에 옳지 않은 길이라도 계속 가야 한다는 결론이다.
"우리는 우리의 특수성과 폐쇄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따지자면 이는 옳지 않은 일이다. 자격을 갖춘 비유대인이라면 얼마든지 우리의 단체들에 받아들이고 동등하게 대접해주어야 할 것이다. 단지 유대인이 아니라고 해서 이들을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이론상의 일일 뿐이다. 이론적으로 옳다고 해서 비유대인들을 계속 받아들이면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남아있지 못할 것이다. 옳든 그르든 그들과 우리 사이엔 분명한 선을 그어 놓아야 한다." - 레오 레비.
결국 유대인 문제는 엄연히 존재하나, 이에 대한 시정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도덕,이성,논리를 초월하는 그 어떤 목표의식이 잠재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 유대인에겐 도덕,이성,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당연히 양심의 가책도 안 받는다.
그러나 레오 레비가 동족인 유대인 편에서 자신의 생각을 개진한 것에 시비 걸 이유는 없다. 누구든 자신이 속한 민족에 충성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한심한 자들이 있다면, 자신들은 결코 유대민족의 일원이 될 수도 없으면서 사사건건 자신이 속한 민족의 이익에 반해 유대인의 앵무새 노릇을 하는 비유대인 전위들이다. 이들에게 유대인과 같은 민족의식의 1/10이라도 있었으면 좋을 것이다.
56. 유대인의 과오를 인정하는 오스카 레비 박사 - 디어본인디펜던트. 1921.4.30.
영국의 유대인 오스카 레비 박사는 의사이자 문필가로, 그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정직한 글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은 1920년 영국에서 출간된 옥스퍼드大 조지 피트 리버스 교수의 <러시아혁명의 세계사적 의미>라는 책의 서문으로 실려 있다. 이 책에서 리버스 교수는 러시아 공산혁명과 관련해 유대인의 핵심적 역할을 지적하고 있다. 먼저 리버스 교수의 글을 소개하고, 뒤이어 오스카 레비 박사의 답장을 살펴본다.
"서구의 일부 유대인들 사이에서 볼셰비즘에 반대하며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을 유대교의 이단아로 취급하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나, 집단적 차원에서 유대인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애국적이고 영적인 가치관들을 파괴하는 공산주의와 같은 유물적 사상을 전 세계를 상대로 전파해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현 볼셰비키 정권의 폭정에는 반대할지도 모르나 전 세계의 유대인들이 혁명 전부터 차르 정부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간주해 그를 끌어내리기 위한 공산혁명에 그들의 온 힘을 실어 주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릇된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그들이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항상 재난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어쩌면 방황하는 유대인의 저주인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 유대인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려 주는 이는 유대인 그 자신이다... 전쟁은 유대인의 최고 추수이며, 그중에서도 내전이 가장 큰 수확을 가져다 준다고 말했던 이도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또한 프랑스혁명으로 유대인들이 서유럽 국가들에서 동등한 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18세기에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도록 루소에게 영감을 준 이도 혹시 유대인이 아니었을까?
시온주의자인 칼렌 박사는 말한다. '1천년 동안 유럽에서 별종이라는 야멸찬 시선 하에 온갖 천대와 차별에 시달려 왔던 유대인은 18세기에 부상한 인간평등론을 온 가슴으로 받아들였고, 같은 이상을 품은 비유대인들과 함께 공화주의 해방운동에 열렬히 투신했다.'
인간평등의 잣대로 소유한 재물의 크기를 제시했던 이도 유대인 데이빗 리카르도였다. 그리고 리카르도의 국제자본주의가 아니었다면 칼 마르크스의 국제공산주의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유대인 모세스 헤스와 디즈레일리는 폴란드와 헝가리, 그리고 1848년 독일에서 공화주의혁명을 주도한 이들이 유대인이었음을 증언한다. 그리고 리카르도가 제시한 유물적 세계관의 선상에서 마르크스가 국제공산주의를, 역시 유대인인 페르디난드 라쌀이 사민주의를 창시했다.
유대인이 왜 태생적으로 공산주의인가를 설명해준 이도 유대인 오토 와이닝거였다. 공산주의는 국제적인 이념인 바, 사유재산, 특히 부동산 소유의 폐지를 주장하는데, 국제적인 유대인은 부동산 소유에 관심을 둔 적이 별로 없다. 대신 그들은 돈을 선호하며, 돈은 그들을 위해 권력의 도구 노릇을 톡톡히 해준다. 그러나 그런 돈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부가 유대인의 전제적 지배 아래 들어오면 폐지될 운명이다. 세계의 모든 부에 대한 전제적인 지배! 바로 이것이 금융 유대인과 공산주의 유대인의 공통된 지향점이다. 금융위기가 찾아 들면 실질적인 부의 소유자들은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 이때 금융 유대인들, 아니 고리대금업자들은 기꺼이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그리고 물론 여기에는 공짜가 없다." - 조지 피트 리버스. <러시아혁명의 세계사적 의미>. 1920.
다음부터는 오스카 레비 박사의 답장이다.
"먼저 책의 제목 <러시아혁명의 세계사적 의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세계대전의 숨겨진 목표들 가운데 하나였던 러시아혁명은 실로 향후 세계사의 행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대사건 중에 대사건이었으니까요. 당신이 아직 안개와 미스터리에 둘러싸여 있는 이 사건을 주목한 것은 대담한 일이었습니다. ..
더욱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사건을 둘러싼 근저에 대한 당신의 이해입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당신은 왜 볼셰비키들과 같은 광포하고 금수적인 세력이 승리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현재의 볼셰비키 정권이 2년 전보다 더욱 공고한 위치를 누리고 있는지, 또 왜 이 나라에서 폭정을 자행하는 볼셰비키 정권에 대한 지지가 늘어나고 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당신은 온당하게도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유대인을 지목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법입니다.
볼셰비즘은 하나의 신앙이자 종교입니다. 그리고 예언자 칼 마르크스의 붉은 깃발 아래 모여 있는 유대인들은 근대에 일어났던 모든 혁명들의 도안자,기술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붉은 십자군에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 어떻게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옳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대로 이 세상에서 유대인보다 더욱 불가사의하고 치명적이며, 따라서 더 흥미로운 민족도 없을 것입니다. 실로 유대인과 그들이 끼친 영향은 과거와 오늘을 이해하는 열쇠이며, 유대인 문제는 모든 정직한 사상가들에 의해 논의되어야 할 주제입니다.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유대인은 매우 민감한 집단입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유대인 문제에 접근하는 비유대인을 수상하게 여깁니다. 그들이 겪었던 여러 가지 험한 일들 탓인지, 그들은 항상 그들과 한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시각에 경도되어 있어, 그들에 대해 어느 비유대인이 조금이라도 비판적이면 그를 중세적 편견에 물들어 있는 편협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며 내심 적으로 간주합니다.
물론 당신의 책에도 유대인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인 시각이 녹아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당신은 금융과 산업에서 유대인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범세계적인 체제전복운동 역시 유대인이 주도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유대인의 국제금융과 칼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공산주의가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 양대 세력이 이 세상에 불러오는 모든 악과 비참한 현실을 들며 그 근원에 있는 유대인을 지목합니다.
이 때문에 이제 많은 유대인들이 당신을 모함하고 괴롭힐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유대인이지만 그러한 일에 동참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보다 나는, 당신의 생각과 감정을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이 격렬한 민족이 당신에게 가할 공격으로부터 당신을 방어해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제까지 유럽에서 발생한 세계사적 사건들 가운데 그 근원에 유대인이 있지 않았던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세계대전을 예로 들어봅시다. 이 전쟁의 명분과 이유가 무엇이었던지 다시 한 번 자문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것이 민족주의였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내 대답할 것입니다. 민족주의는 국제적 사조들의 창시자인 유대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국제자본주의와 국제공산주의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음을 지적한 것처럼, 민족우월주의도 결국엔 유대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선민신화의 창조자는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이 선민신화, 또는 민족우월주의가 여러 나라와 민족들을 감염시켰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러한 민족주의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 민족주의의 역사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유럽의 민족주의는 근대의 산물이고, 나폴레옹에 대한 항전에서 태동되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에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은 독일 종교개혁운동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럼 종교개혁의 또 다른 중요한 산물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개신교가 아니었나요? 개신교는 바로 유대인에 의해 발명되고, 웅변되고, 선전되어졌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유대인이 지난 전쟁을 만들어 낸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그저 농담이라고 생각지 말아주십시오. 바로 이 뒤에 거대한 진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로 생겨난 모든 세속적,유물적 사조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에 기반한 운동들의 근원에는 항상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이제 이 유대적인 사조,사상,이념들이 신을 잊고 살아가는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유대인이 비유대인에 항상 앞서간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유대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들의 영향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규명해 주의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과연 의식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일까 하는 점입니다.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악행이 악행인 줄을 아는 자는 최소한 선행이 무엇인지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잘못을 저지르는 자는 오직 그리스도의 자비와 용서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내 개인적 생각에 혁명적 유대인들은 무의식적인 범죄자들인 것 같습니다. 그들의 악행은 악의에서라기보다 자신들이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기인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에 있어 나 혼자 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기쁘기도 합니다. 당신 역시 유대인들도 어쩌면 그들 자신이 만든 사상과 이념들의 희생자들일지도 모른다는 시각을 이렇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릇된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그들이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항상 재난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어쩌면 방황하는 유대인의 저주일지도 모를 일이다.' 참으로 큰 진실을 담고 있는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이해의 경지에 도달한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차원에서 나는 당신을 천박한 반유대주의자로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천박한 반유대주의자이기는커녕 당신은 우리 민족에 대한 계몽된 비판자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에게 진정 합당한 것은 맹목적인 親유대주의나 자유주의적 관용이 아니라 계몽된 비판입니다.
당신은 물질적, 그리고 영적인 차원에서 세계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모두 유대인이 주도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유대인의 이런 파괴적인 행태가 유대인의 강렬한 이상주의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심오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 당신은 완벽하게 옳습니다.
한 가지 관념이나 이념에 사로잡힌 유대인은 그 외의 것들을 보지 않습니다. 이들의 뇌 우반구는 쌍둥이 형제인 좌반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유대인은 한 번 자신이 도출한 결론이 옳다고 판단하면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 원칙들에 따라 행동하고 계획을 실행해 나갑니다. 설령 그것이 반이성적,반사회적,반인륜적이라도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특성으로부터 그들의 신비에 가까운 추진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로운 추진력은 그 결말이 무엇이든 유대인을 끝까지 가도록 만들 것입니다.
지난 전쟁으로 독일을 선동한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기독교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던 사람들은 또 누구였습니까? 막후의 노회한 권력자들이 미소를 짓고 있는 가운데 누가 민중 앞에 나서 사회개혁을 부르짖었습니까? 이들 지식인,문인의 대부분이 프리드,페르나우,라츠코,그렐링 같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품은 이상과 원칙들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이들 역시 유대인의 혈통을 지닌 남자와 여자들이었습니다. 하스,레빈,룩셈부르크,랜다우어,쿠르트 아이즈너와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모세로부터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이사야로부터 아이즈너에 이르기까지, 실제와 이론에 있어서, 이상주의와 물질주의에 있어서, 철학과 정치에 있어서, 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전의 모습 그대로인 채로 그들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당산은 아마도 이렇게 반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상들은 잘못된 것들이다. 보라, 그릇된 이상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이 세상을 어디로 끌고 왔는지를. 유대인에게 합당한 것은 오직 그들이 3천년 동안 저질러 온 잘못들에 대한 공정한 재판 뿐이다. 언제까지 유대인은 우리들 위에 파괴적인 이상을 강요할 것인가? 얼마나 더 우리가 유대인들이 세상을 파괴하는 것을 감내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입니다. '당신이 전적으로 옳다. 우리 유대인은 할 말이 없다.' 이런 선상에서 반유대주의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단순한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혀 유대인을 비난하는 것이 아님을 기꺼이 인정할 것입니다.
우리 유대인은 너무도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잘못들로 인해 세상은 거짓과 아둔함과 광기로 가득 찬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신실한 마음으로 고백하건대, 오늘날 우리 유대인은 이 세상의 미혹자이자 파괴자이며, 방화범이자 사형집행인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새로운 천국으로 인도하겠노라고 약속했지만, 우리가 당신들을 정작 인도한 곳은 새로운 지옥일 뿐이었습니다.
그 동안 이 세상에서 진보란 것은 없었고, 특히 인류의 도덕적인 진보와 같은 것은 더욱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참된 진보를 가로막았던 것은 바로 우리의 파괴적인 도덕과 세계관이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보며 그 음침함에 몸서리를 칩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집필자의 정체를 알기에 나는 더욱 격하게 몸서리를 칠 수 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이상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과오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 유럽이 불타오르고, 곳곳에서 희생자들이 비명을 지르고, 대화재의 현장에서 개들이 울부짖고, 바로 그 자욱한 연기가 우리 대륙을 뒤덮고 있는 동안, 유대인의 일부는 유럽의 폐허에서 빠져 나와 동쪽 팔레스타인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햇볕을 즐기며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비참한 장면들을 외면해 버립니다.
그들의 귀에는 사람들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들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자신들이 망쳐 놓은 유럽에 대해 차갑게 식어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오직 자신의 고난과 슬픔만 애통해 할 뿐입니다... 사랑에 철저히 메말라 버렸으며, 가슴은 차갑게 식어 버렸고, 진정으로 옳은 싸움에는 싫증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우리 유대인 모두가 은행가는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볼셰비키들도 아닙니다. 또 아직은 우리 모두가 다 시온주의자들인 것도 아닙니다.
19세기 중반 유럽에는 볼셰비즘을 낳게 될 유대인의 자유주의에 맞섰던 두 명의 계몽된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독일 보수정당의 창설자였던 프리드리히 슈탈과, 영국 보수당의 수반이었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그들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인물들이 우리에게서 배출되어 대의,선,사랑,이상을 위한 싸움이 결국엔 이 세상을 악과 증오로 가득 찬 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악을 극복할 진정한 선, 증오를 극복할 진정한 사랑, 병든 세상에 대한 진정한 치유와 회복의 기운이 언젠가는 이스라엘의 한 복판으로부터 장엄하게 솟아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유대인들의 의무인 것입니다." - 오스카 레비. 1920년 7월.
57. 유대인과 미국의 통화제도 - 디어본인디펜던트. 1921.6.18.
미국금융에 대한 유대인의 통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들의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이라는 판에 박힌 소리는 사실이 아니다. 막강한 힘을 보유한 유대인 금융가들은 미국과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만의 국제적 의제를 추구하는 세력이라는 데서 이 나라에 많은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한다.
미국의 주요 유대인 금융가들 중에서 미국에서 태어난 이는 거의 없다. 이들 대부분은 외국에서 태어난 이민1세대 유대인으로, 이들이 이 나라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것도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국제적 커넥션 덕분이다. 유대국제금융은 그들이 추진하는 세계적 의제에 있어 하나의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서로 긴밀히 협력한다. 특히 비유대인 자본과의 경쟁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없이 그러하다.
지난 세기를 거쳐 현재까지 미국에서 활동해온 유대인 금융가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어거스트 벨몬트, 제이콥 쉬프, 워버그 형제, 오토 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들이다.
미국에 가장 먼저 뿌리를 내린 유대인 금융가 어거스트 벨몬트(쇤베르크)는 유대국제금융의 성지인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로스차일드 가문의 후견 아래 성장했다. 그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국 대리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1837년 이 나라에 건너왔다. 금융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정치에도 깊이 관여한 그는 1860~1872년까지 전국민주당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충직한 업무수행 덕분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투자에서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제이콥 쉬프는 프랑크푸르트가 세계에 내보낸 또 한 명의 유대인 금융가로 그의 아버지 역시 로스차일드 가문의 대리인이었다.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은행업무를 익힌 그는 1865년 미국에 건너왔다. 쉬프는 미국의 철도,은행,보험,전신산업에 독일의 유대자본을 끌어들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쉬프는 쿤앤로엡의 창립자 중 한 명인 솔로몬 로엡의 딸 테레사 로엡과 결혼해 1875년 쿤앤로엡의 최고경영자가 되었다.
제이콥 쉬프 역시 유대적 의제 차원에서 이 나라의 정치에 자주 관여했는데, 미국의 국익과는 상관없이 러시아와의 통상조약을 폐기시킨 일에도 그의 역할이 컸다. 그는 또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지원했는데, 전후 일본이 그의 기대만큼 순종적이지 않아 일본에 좋지 않은 감정을 품게 되었다.
오토 칸은 쿤앤로엡의 파트너로 제이콥 쉬프의 동료다. 그는 국제정치 무대의 막후에서 일반인은 알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유대인 금융가다. 이상한 것은 현재까지 그의 국적이 어디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개종 유대인임에도 이를 비난하는 유대인 사회의 목소리가 전혀 없다는 점도 흥미롭다. 만약 그의 개종이 신실한 것이었다면, 엄격한 제이콥 쉬프가 그에게 쿤앤로엡의 실무경영을 맡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868년 독일에서 태어난 폴 워버그는 쿤앤로엡 파트너로, 1902년 渡美해 1911년 미국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미국에 온 이유를 이 나라의 통화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의 말처럼 그를 빼놓고는 현재 이 나라에서 가동되고 있는 통화시스템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일하지 않고 돈을 버는, 아니 취하는 이들 중에는 두 부류가 있다.
1) 시스템은 건드리지 않고 그 안에서 돈을 취하는 부류.
2) 돈이 만들어지는 시스템 자체를 창조하거나 조종해 돈을 취하는 부류.
독일 함부르크의 유서 깊은 유대인 금융가문 워버그家의 일원인 폴 워버그는 후자에 속한다. 그는 그저 금고에 돈을 채우는 일보다는 돈이 발행되고 유통되는 시스템을 이해하고 또 조작할 줄 아는 금융가다. 폴 워버그의 증조부가 국제무역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함부르크에서 금융업을 시작한 때는 17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워버그 은행가문은 전쟁 전까지는 비중이 인지되지 않았던 가문으로, 지난 전쟁 동안 이 가문의 형제들이 적대국이었던 미국과 독일의 정부에서 각각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주목을 요하는 일이다. 폴 워버그는 1895년 솔로몬 로엡의 딸과 결혼했으니, 제이콥 쉬프와는 동서지간이다. 한편 폴 워버그의 동생 필릭스 워버그는 제이콥 쉬프의 사위다.
미국에 온 이후 폴 워버그는 당시 이 나라의 금융과 통화시스템을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보고, 이를 자신의 비전대로 개혁할 의지를 품게 되었다고 한다. 신참 외국 이민자 치고 참으로 원대한 포부가 아닌가?
유대인에게 한 가지 이점으로 작용하는 것은, 그들이 제3자적 시각을 견지한다는 것이다. 애국적,전통적,관습적 이유에서 그 나라의 국민들이 보고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이런 요소들에서 자유로운 유대인은 보고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비유대인 개개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고 있는 동안, 유대인은 한 발짝 물러서서, 마치 벌집을 관찰하듯, 열심히 일에 집중하는 비유대인들을 보며 여러 사실들을 알아낸다. 물론 이러한 한발 물러선 시각은 체제의 개선이나 개혁에 필수적이다. 문제는 이러한 거시적 차원의 시각이 소수의 이익을 위한 만인의 착취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1914년 상원청문회에서 폴 워버그는 자신의 이력을 기술한 바 있다.
폴 워버그 : 워버그은행에서 은행업무를 배운 뒤 나는 영국에 건너가 2년간 살았습니다. 처음엔 몬태규회사에서 일했고, 그 다음에는 주식중개인으로 일하며 배웠습니다. 이후 난 프랑스에 살면서 한 러시아은행의 파리지점에서 일했습니다. 이후 함부르크에 돌아가 1년간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인도,중국,일본을 여행했습니다. 미국엔 1893년에 처음 왔습니다. 잠시 머물다 함부르크에 돌아가 한 금융회사의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그 회사에서는 1902년까지 일했습니다. 1902년 미국으로 이주해 쿤앤로엡의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난 쿤앤로엡 창립자인 솔로몬 로엡의 사위입니다. 미국이주를 결정한 것도 그 분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솔로몬 로엡의 딸과는 1895년 결혼했는데, 이후 매년 미국을 방문해 수개월씩 머물렀습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나는 이 나라의 통화체제가 매우 낙후되어 있음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나는 일반금리가 상승하면 콜금리가 아무런 중앙적 통제도 없이 요동치는 것을 보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이에 대한 기고문을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 갓 이민 온 사람으로서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었기에 그냥 책상서랍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1906년 금융공황이 일어났고, 한 신문사가 이 문제를 짚어 보는 와중에 나의 기고문이 발표된 것입니다. 기고문의 제목은 <우리 나라 금융시스템의 문제점>이었습니다. 이후 많은 이들이 나의 글을 칭찬하며 본인으로부터 더 많은 얘기를 듣길 원했습니다. 연방준비은행제도에 대한 나의 아이디어는 이때부터 발전된 것입니다. 미국시민권은 1911년에 취득했습니다.
브리스토우 : 渡美 후 미국시민이 되는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까?
폴 워버그 : 독일이 조국인 사람으로서 독일국적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조국을 잊지 못해 그 나라의 국적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만큼 새 조국에도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일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덧붙이자면, 내가 미국인이 되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이 나라를 위해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통화제도의 개혁 말씀입니다. 본인은 이 일을 나의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1906년부터 개혁안을 구상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서 이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완전한 미국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브리스토우 : 이 나라의 통화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미국인이 되었다는 것입니까? 좋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통화제도의 개혁을 주장해 왔습니까?
폴 워버그 : 1906년부터입니다.
브리스토우 : 귀하는 통화제도개혁에 대한 귀하의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 외부에 알렸습니까?
폴 워버그 : 주로 집필활동을 통해서요.
브리스토우 : 혹시 귀하는 상원 통화문제특별위원회와 연결되어 있었습니까?
폴 워버그 : 아뇨, 직접적으로는 아니었습니다.
브리스토우 : 통화문제특위의 보고서 작성에 자문을 제공한 적이 있습니까?
폴 워버그 : 있습니다. 올드리치 상원의원의 요청에 따라 여러 번 조언을 제공했습니다.
브리스토우 : 올드리치 법안을 준비하는 데도 관여했습니까?
폴 워버그 : 예.
브리스토우 : 어떤 역할이었습니까?
폴 워버그 : 글쎄요, 난 그저 최선의 조언을 제공했을 뿐입니다.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은 미국정부 안에서 자본과 대기업 이익을 대변해온 정치인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또한 그는 실로 금융,국제무역,관세문제에 있어 미국의회 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다. 안타까운 것은 이 나라의 번영이 대자본과 대기업의 번영과 직결되어 있다는 믿음 때문인지, 그가 이들 이익집단의 입장 외에는 다른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런 위상의 넬슨 올드리치가 폴 워버그에게 자문을 구했다는 것은 이 분야에 있어 폴 워버그의 전문성과 판단력을 공인해주는 증거일 것이다. 만약 뉴욕의 특정세력이 폴 워버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도록 넬슨 올드리치와 그의 통화문제특위에 입김을 넣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한편 폴 워버그의 청문회 증언에는 누락된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1916년 <레슬리 위크>에서 언론인 버티 포브스(포브스 매거진 창립자)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1910년 11월 말, 폴 워버그와 넬슨 올드리치 등이 제킬 아일랜드라는 조지아 주의 한 휴양지에서 비밀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모임에는 몇몇 뉴욕 은행가들과 미국 재무성차관도 참석했다고 한다.
다음은 버티 포브스의 기사다.
"이 나라의 정상급 은행가 몇 명이 한밤중에 개인소유 객차들에 나눠 타고 뉴욕에서 몰래 빠져 나와 남부의 한 외딴 섬에 들어가 일주일을 머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이들이 유지했던 보안이 얼마나 철저했던지 이들의 시중을 들었던 휴양지 직원들도 이들의 정체를 전혀 알지 못했다. 미국금융 역사상 가장 기이하고 비밀스런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모든 일은 극도의 보안 속에서 이루어졌다. 대중은 그들이 뭘 하려는지 알지도, 알 수도 없었다. 출발지인 뉴욕에서 올드리치 상원의원은 참석자 개개인에게 할당된 비밀객차에 오르는 즉시 얼굴이 노출되지 않도록 창문 가리개를 내려 줄 것을 주문했다. 신출귀몰한 뉴욕의 특종기자들이라도 냄새조차 맡을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열차는 출발해 남쪽으로 달렸다.
목적지에 도착한 참석자들은 그들만을 위해 별도로 준비된 플랫폼에 내렸다. 배를 타고 섬으로 향하는 중에도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뱃사공들이 이들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임을 눈치 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윽고 참석자들은 제킬 아일랜드의 적막한 부두에 내렸다. 무인도였던 이 섬에는 작은 휴양지가 있을 뿐이었는데, 여기에 대여섯 명의 종업원들이 일하고 있었다. "하인들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면 절대로 안 되오."라고 올드리치 상원의원이 주의를 주었다. "저들을 어떻게 속이죠?"라고 한 참석자가 묻자,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다. "이렇게 합시다."라고 한 참석자가 나섰다. "서로 이름만 부르고 성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맙시다." 모두가 동의했다.
그리하여 이 섬에 모무는 동안 로드아일랜드의 제왕이자 미국상원의 실제 중의 실제인 올드리치 의원은 그저 넬슨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국제투자은행 쿤앤로엡에 속한 조용하고 학구적인 풍모의 신사 폴 워버그는 폴로 통하게 되었다.
넬슨은 해리,프랭크,폴, 그리고 피아트에게 목표가 왼수되기 전까지 그들은 나머지 세상과 격리된 채 이 섬에서 지내게 될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들의 목표란 유럽통화체제의 장점들이 살아 있는 동시에 미국적인 요소들을 감안한 이 나라 최적의 통화시스템을 고안해내는 것이었다." - 버티 포브스. <레슬리 위크> 1916.
버티 포브스는 당시의 폴 워버그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독일 억양으로 말하며 관용구적 영어에 서툴렀던 그는 아직 미국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했던 외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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