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투쟁     

Mein Kampf   


아돌프 히틀러



저자서문

 1924년 4월 1일, 나는 뮌헨 국민재판소에서 금고형을 선고받고 란츠베르크 요새 감옥에 수감되었다. 거기에서 나는 느낀 바가 있어 저작에 착수했다. 우리 운동의 목표와 발전상을 두 권의 책으로 쓰기로 결심했다. 나는 우리 운동에 종사한, 그리고 더욱 철저한 계몽을 바라는 우리 운동의 지지자들을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

 글보다는 말이 사람을 설득시키는 데는 더욱 효과적이며, 세계의 모든 위대한 운동은 위대한 문필가가 아니라 위대한 연설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敎說을 일관적,통일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원칙적인 것이 글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두 권의 책을 우리가 함께 수행해 나가는 사업의 초석으로 삼고자 한다.

 


제1부

     

 1장. 生家에서


 나는 인 강변의 부라우나우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낀다. 이 작은 도시는 독일인이 이루고 있는 두 개의 국가의 국경에 위치하고, 적어도 이 두 개 국가의 재합병이야말로 우리 청년들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실현해야 할 일생의 과업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독일-오스트리아는 모국인 大독일로 복귀해야만 한다. 동일한 피는 공통된 국가를 필요로 한다.

 자손을 공통된 국가 안에 살게 하지 못하는 한, 독일민족은 식민정책 활동에 대한 도덕적 권리(?)를 획득할 수 없다. 독일의 영역이 독일인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모두 수용하고 그들의 식량을 확보하지 못할 때 비로소 자국민이 곤궁하다는 이유로 국외의 영토를 획득하는 도덕적 권리(?)가 주어질 것이다.

 혈통은 바이에른이고 국적은 오스트리아인 나의 양친은 지난 세기의 80년대 후반에 이 작은 도시에 살았었다. 아버지는 직무에 충실한 세관관리였고, 당시 오스트리아 세관관리의 운명은 곧잘 방랑자라고 일컬어졌다.

 아버지는 아들도 자기처럼 관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관리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12세 때 아버지는 나의 그림공부를 금지해 버렸다. 나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림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게으름을 부리자, 학교성적은 극과 극을 달렸다. 그러나 지리,세계사 두 과목만은 반에서 단연 으뜸이었다.

 舊오스트리아는 다민족 국가였다. 舊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독일인의 언어투쟁에는 투쟁자,기회주의자,반역자 세 부류가 있었다.

 역사교육의 목적은 결코 역사상의 연대나 사건을 외우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으로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실제에 적응시키는 힘을 발견해 내는 데 있다. 독서나 학습의 기술도 본질적인 것을 취하는 대신 비본질적인 것은 잊어버려야 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내가 일찍이 역사에 관해서 한 사람의 교사를 얻은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이후 나의 전생애에 걸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린츠 실업학교 당시 나의 스승이던 레오폴트 페치 박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에게는 하나의 역사관이 이상적 상태로 구체화되어 있었다.  그는 현재에서 과거를 해명하고, 과거에서 현재에 대한 인과관계를 추출해내는 방법을 알았기에, 당시 우리가 궁금해 하던 시사문제의 모든 것을 제대로 설명해 주었다. 우리의 작은 국가주의적 열광이 그에게는 교육수단이 되었다. 그런 교사 밑에서 독일역사를 공부한 내가, 독일민족의 운명을 무참히 짓밟은 지배왕국에 대해 어찌 적개심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합스부르크 왕가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체코化했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 독일주의가 가장 증오하는 적인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총탄으로 암살한 것은 영원한 정의와 가차없이 보복을 내리는 신의 강한 주먹이었다.

 나는 12세 때 비로소 극장에서 <빌헬름 텔>을 보았다. 그리고 두어 달 후 <로엔그린>을 보았는데, 그것이 내가 최초로 본 오페라로, 단번에 매료되었다. 13세 때 아버지가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희망대로 내게 관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키는 것을 의무로 삼았다. 그러던 차에 나는 폐결핵 진단을 받았고, 의사는 어머니에게 장차 내가 사무실처럼 폐쇄된 공간에서 일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했다. 덕분에 나는 1년 동안 실업학교를 휴학해야만 했고, 마침내 어머니는 미술학교로 옮기는 것을 승낙했다. 그러나 어머니도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약간의 유산과 고아연금만으로는 생활하기 힘들었으므로 나는 빵을 얻기 위해 일해야만 했다. 옷가지만 든 트렁크와 마음속의 굳은 의지를 간직하고 나는 빈으로 떠났다.


 2장. 빈 시절의 修業과 고난


 어머니가 병상에 있을 때 나는 미술학교 시험을 치르러 빈으로 갔다. 입학시험 합격을 확신했기에, 불합격 통지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즉시 학장을 찾아가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나의 그림을 보고 화가로서는 부적합하지만 건축분야에는 재능이 있어 보인다면서 건축과를 지망하라고 권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세 번째로 빈에 갔는데, 이번에는 5년을 머물렀고, 빈곤과 비참함을 겪었다. 노동자로, 3류 화가로 빵을 얻기 위해 애썼다. 굶주림은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는 유일한 내 친구였고, 모든 일에 충실히 뒤따라오는 존재였다. 책을 사거나 오페라 극장에 다녀온 다음이면 여러 날 배고픔을 견뎌야 했다. 그 무렵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식비를 아껴 오페라를 구경하는 것을 제외하면 일과 책만이 나의 유일한 삶이었다. 닥치는 대로 많은 책을 읽었다. 그 몇 년 동안은 오늘날까지도 내게 실력을 공급하는 지식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 시절에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했다.

 나는 일반적으로 모든 창조적 사상은 청년시대에 나타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청년의 창조성은 건축자재나 미래의 계획을 공급하고, 그런 바탕 위에서 더 지혜로운 어른이 그것을 다듬어 건물을 짓는 것이다.

 힘겨운 투쟁은 때때로 동정심을 잃게 한다. 고통스러운 생존경쟁이 뒤에 남겨진 자의 비참함에 대한 배려를 잊게 만드는 것이다. 비로소 나는 인간속성에 대해 알고, 헛되고 조잡한 외관과 내부의 본질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빈은 세기가 바뀌고 나서 사회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뒤떨어지는 도시로 변했다. 빛나는 부와 혐오스러운 빈곤이 뚜렷이 엇갈리고 있었다.

 사회문제를 연구하는 데 빈만큼 좋은 도시는 독일에는 달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속아서는 안 된다. 사회연구는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아서는 안 된다. 문제의 핵심까지 파고 들어갈 수 없다. 독사에 물려 질식해 죽을 뻔한 경험을 해 보지 못한 자는 독사의 이빨에 대해 결코 알 수가 없다. 사회연구에는 피상적인 잡담이나 그릇된 감상도 해롭다. 그저 스쳐 지나고 말기 때문이다.

 세인들이 사회적 곤궁에 무관심한 것만큼 가혹한 것을 나는 일찍이 본 일이 없다. 직관이 결여된 이해력으로서는 쉽사리 파악할 수 없다.

 사회적 활동이란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회복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당시 빈의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주택의 비참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모든 고난과 불행, 그리고 비극은 절망과 타락에서 비롯된다. 생존경쟁이라는 힘든 투쟁에서 만일 내가 연약한 감수성에 빠졌다면, 나는 타락과 절망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그같은 상태를 개선하는 데는 오로지 두 길 밖에 없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었다. 즉 우리의 발전에 보다 나은 기초를 만드는 가장 절실한 사회적 책임과, 이에 대응해서 개선하기 힘든 괴물을 타도할 단호한 결심이 그것이다.

 나는 빈에서 삶을 위해 고투하는 동안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았다. 즉 사회적 활동이란 결코 무의미한 자선사업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참된 사회적 활동이란 개인을 타락시키거나 적어도 정도에서 이탈시키는 우리의 경제적,문화적 생활의 조직 속에 뿌리박고 있는 오류를 근절하는 데 있다는 것을 분명히 파악했다.

 어떤 민족을 국민화하는 데는 먼저 각 개인을 교육할 수 있는 토대로 건전한 사회조건을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다. 문화와 교육을 통해서 자기 조국의 문화적,경제적,정치적 위대함을 충분히 아는 자가 아니면 민족의 일원으로서 내적인 긍지를 획득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1909~1910년에는 이미 보조 노동자 노릇을 벗어나, 나는 도안가 겸 수채화가로서 자립해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빵을 얻으려고 그림을 그렸고, 기쁨을 얻기 위해서 공부했다.

 정치란 일반적인 이성이 있는 모든 인간의 자명한 의무로 느껴졌다. 정치에 대해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비평이나 불평을 할 권리를 상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정치에 관해서도 나는 많이 읽고 많이 배웠다.

 독서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1) 독서는 개인의 소질과 능력을 끌어내고 인격형성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 조력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독서는 자기 직업에 필요한 도구나 자재를 공급해야 한다.

 2) 독서는 일반적인 세계상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독서는 세계상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억의 혼란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올바른 독서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떤 책을 읽더라도 유용성과 가치를 따져 볼 것이다. 독서로 인해 빈 생활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매우 가치있는 시절이었다. 일상생활 경험은 여러 문제를 항상 새롭게 연구해야 한다는 자극을 주었다.

 나는 건축업에 종사할 때 처음으로 사회민주당원과 대면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국민은 자본가 계급이 만들어 낸 것이고, 조국이란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기 위한 부르주아의 도구이며, 법률의 권위란 프롤레타리아를 탄압하는 수단이고, 학교는 노예와 그 소유자를 사육하기 위한 시설이며, 종교는 착취당하도록 운명 지어진 민중을 백치로 만드는 수단이고, 도덕은 어리석은 양들의 순종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대중의 심리란 대개 어중간하고 유약한 것에 대해서는 감수성이 둔하기 마련이다. 마치 여성과 같다. 여성들의 정신적 감각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적인 동경이라는 근거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약한 자를 지배하기보다는 강한 자에게 굴복하는 것을 더욱 즐긴다. 복종하는 사람보다는 지배하는 사람을 더 좋아하고, 해방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적을 용서하지 않는 교설에 의해 한층 만족을 느낀다.

 대중은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자유를 주면 이내 버림받을 것 같은 불안을 느낀다. 그들은 파렴치한 정신적 테러에도 무감각하며, 인간적인 자유가 몹시 학대받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교설 속에 숨어 있는 광기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목적이 확실한 힘과 잔학성 앞에 언제나 무릎을 꿇는 것이다.

 나는 대중이나 개인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테러의 의미도 알게 되었다. 공장,집회,집단시위에서의 테러는, 같은 정도로 대항해 오지 않는 한 반드시 성공한다.

 만일 노동조합운동이 국민의 중심을 이루는 계급의 지위개선을 목적으로 하고 실행했다면, 그것은 反국가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적 활동이다. 노조운동은 사회적 전제를 만들어 내는 것을 돕고, 그것이 없다면 국민교육은 결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조운동은 사회적 암을 제거함으로써 정신적,육체적 민족통일체의 보편적 건강에 공헌하면서 최후의 공적을 획득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조의 필요성 여부 문제는 사실상 불필요한 것이다. ☞ 계급투쟁의 도구라는 마르크스주의적 노조관과 대조적임.

 고용주들이 사회에 대한 이해,정의감,공정성이 결여된 한, 그들에게 고용된 민족의 일원이 탐욕,몰상식에 대항해 일반의 이익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그들 자신의 권리일 뿐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

 20세기 초부터 노조운동은 종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변해버렸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사회민주당 정책의 세력권으로 들어가, 마침내 계급투쟁의 도구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유대인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내게 특별한 느낌을 불러일으킨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하기 힘들다. 14~15세 때 비로소 정치적으로 유대인이라는 말을 들었다. 린츠에는 소수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수세기 동안 그들의 외모는 유럽화되고 인간답게 보였으므로, 사실 나는 그들을 완전한 독일인으로 생각했다. 당시 200만 빈 시민 중 유대인이 20만 명에 이르렀지만, 나는 그들을 식별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反유대주의에 대한 생각이 변해갔다. 이 전환 때문에 나는 최대의 내면적,정신적 갈등을 겪었다. 몇 개월 동안 이성과 감성의 격투 끝에 간신이 이성이 승리하기 시작했다. 이후 감성은 이성의 가장 충실한 안내자이자 충고자가 되었다.

 빈에서는 매우 광범위한 운동인 유대주의(시오니즘)가 유대인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유대인의 민족성을 무엇보다 확실히 증명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유대인들이 사실상 시오니스트들을 거부한 것은 그들이 유대인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공공연하게 유대교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비실제적이며 위험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이 실제적으로 한편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유대주의 유대인(시오니스트)과 자유주의 유대인 사이의 위장투쟁은 곧 우리의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철두철미하게 거짓이며, 언제나 주장하는 유대인의 도덕적 고상함과 순수성에도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후 나는 여러 번 카프탄을 입은 자의 냄새 때문에 불쾌했다. 게다가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더러웠고 외모도 초라했다. 육체적 불결 이상으로, 유대인의 도덕적 오점을 발견했을 때는 혐오감정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형식의 것이든 문화생활의 형식에서 부정하거나 파렴치한 일이 일어났다면, 적어도 거기에 유대인이 관계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신문,예술,문학,연극 등 여러 분야의 활동을 통해 내 눈에 비친 유대인들의 행태는 일찍이 민중에게 감염되었던 페스트보다 더 무서운 질병이었다. 이 해악이 얼마나 많이 만들어지고 또 뿌려졌던가!

 모든 문학적 오점, 예술상의 허섭스레기, 연극의 엉터리 작품의 9할이 국내인구의 1%도 안 되는 민족의 채무에 귀착한다는 사실은 간단히 부정할 수 없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세계적 신문을 그런 관점에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신문 편집자는 유대인이었다. 이제 나는 신문의 자유주의적 논조를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공격에 대한 회답의 정중함도, 공격을 묵살하는 태도도 영리하고 비열한 계교로 보였다. 화려한 劇評은 언제나 유대인 작가에 관한 것이었고, 오직 독일인에게만 악평을 퍼부었다. 빌헬름2세를 가볍게 물어뜯는 음흉함도 프랑스 문화나 문명을 칭찬하는 것과 마찬가지 수단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설의 전체적인 의미는 명백히 독일인에게 유해한 것이고 의도적인 것이었다.

 대도시의 폐물인 증오스러운 매음굴의 포주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을 때는 전율을 느꼈으나, 다음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이미 나는 유대인 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았다. 유대인이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오랜 동안의 내면적 갈등도 그와 함께 끝났다.

 사회민주당의 신문을 유대인이 지배하게 된 내막을 나는 차차 알게 되었다. 나는 발행인을 비롯해 기사 공급자들이 모두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손에 들어오는 사회민주당위 팸플릿의 편집자 이름을 조사했는데, 역시 모두가 유대인이었다. 나는 모든 지도자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의회의원, 노동조합 서기, 어떤 조직의 의장, 가두시위 선동자 등 거의 대부분이 선택된 민족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나는 드디어 우리 민족의 유혹자를 완전히 알게 되었다. 나는 차츰 그들의 독자적 교설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나의 내심의 확신을 위해 투쟁할 때의 무기로 삼았다. 따라서 싸우면 승리는 언제나 나의 것이었다. 투쟁할수록 그들의 궤변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처음엔 상대의 우둔함을 이용하지만, 피할 길이 없게 되면 간단히 자기를 바보처럼 보이게 한다.

 유대인은 어제의 일은 모두 잊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낡고 어처구니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되풀이한다. 나는 때때로 멍해졌다. 그들의 매끄러운 언변과 거짓말 중 어느 쪽에 더 놀라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악마와도 같은 유혹자의 교활함에 희생된 자들을 누가 저주할 수 있겠는가? 이 궤변적인 거짓말에 이기는 것이 나 자신에게도 얼마나 힘든 일이었던가!

 노동자 친구들과 매일 접촉하면서 나는 놀랄 만한 변절성을 발견했다. 인간이라는 것은 혼자서 지껄이고 있으면 언제나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갖기 마련이지만, 대중의 세력권에 들어가면 어째서 그렇게 갑자기 이성을 잃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절망했다.

 일상적 경험이 동기가 되어, 이제 나는 마르크스 교설의 원천 자체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내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가장 큰 전환의 시기가 닥쳐왔다. 나는 연약한 시민에서 열광적인 反유대주의자가 되었다. 내가 인류역사의 오랜 기간에 걸쳐 유대민족의 활동을 연구하고 관찰했을 때, 갑자기 걱정스러운 문제가 생겼다. 즉 신비한 운명이 우리 불쌍한 인간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이 소민족의 마지막 승리를 영원불변의 정의로 바라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문제였다. 내가 마르크시즘에 침잠해서 유대민족의 활동을 냉정한 시각으로 철저히 관찰하는 동안에, 운명이 내게 그 답을 주었다.

 마르크시즘이라는 유대적 교설은 자연의 귀족주의적 원리를 거부하고 힘과 권력이라는 영원한 특권 대신 대중의 수와 그들의 공허한 중량을 존중한다. 마르크시즘은 그처럼 인간에게 있어서 개성의 가치를 부정하고 민족과 인종의 중요성에 異論을 제기함, 그와 함께 인간성에서 그 존립과 문화의 가능성을 빼앗으려고 한다.

 유대인이 마르크시즘적인 신조의 도움을 받아서 이 세계의 여러 민족을 이긴다면 그들의 왕관은 인류의 죽음을 상징하는 花冠이 될 것이고, 또한 이 행성은 태고 때와 마찬가지로 인류가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우주의 에테르 속을 회전할 것이다.

 영원한 자연은 그 법칙을 위반하는 자를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날 내가 유대인과 투쟁하는 것은 전지전능한 조물주의 뜻이라고 믿으며, 동시에 나의 主의 일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확신한다.


 3장. 빈 시절의 정치적 고찰


 나는 오늘날 인간이 특수한 재능을 갖고 있지 않는 한 30세 이전엔 공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게 좋다고 확신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무렵에 이르러서야 일반적으로 토대가 잡히고, 또 여러 정치문제를 음미하고 그에 대한 독자적 입장을 결정적으로 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는 언제나 공통의 문화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조건을 극복하는 것만이 문제였다. 무엇보다도 독일제국은 소수의 이민족을 제외하면 한 민족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정반대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헝가리를 제외하면, 각 민족에게 자신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정치적 기억은 거의 없거나 희미해진 상태였다. 대신 각 지방에서 민족주의적 세력이 대두하고 왕국의 변두리에 민족국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그런 세력을 지배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통일적인 민족국가는 주민의 자연적인 타성 및 그와 결합된 저항력에 의해서 때로 놀랄 만큼 장기간에 걸쳐 내부적으로 붕괴하는 일 없이 혹독한 행정이나 지배에 견뎌 낼 수 있다.

 20세가 되기 전 나는 프란첸스링크에 있는 의사당에서 방청기회를 가졌는데,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나는 아주 옛날부터 의회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제도 자체를 증오했던 것은 아니다. 도대체 민족자치보다 더 수준 높은 형식이 있을 수 있는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스트리아 의회의 적이었다. 의회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는 그 이상으로 쓸모가 없었다.

 우선 무엇보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개개인이 책임감이라는 것을 명백히 상실했다는 점이었다. 의회가 무엇을 결의하든, 아무도 그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고, 또 책임을 묻는 사람도 없었다. 책임감이라는 것은 원래 개인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지도적인 정치가의 과제는 창조적 사상이나 계획을 만들어 내는 데 있지 않을까? 또한 그의 임무는 우둔한 양 떼를 자기의 창조적 사상이나 계획으로 설득하는 일이 아닐까? 많은 사람을 개종시키지 못하는 지도자는 곧 무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이 군중이 적어도 그 성과의 위대성이 나타나기 전에 이념을 이해했던 일이 일찍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이 세상의 모든 독창적인 사업이란 군중의 타성에 대한 천재의 눈에 보이는 항의가 아닐까?

 다수결이란는 의회주의 원리는 개인의 권리를 부정하고, 대신 그때그때 군중의 수로 대치함으로써 자연의 귀족주의적인 근본법칙에 반하고 있다.

 중대한 행동을 취할 경우 정치적 사기꾼들은 항상 조심스레 다수자의 협력을 간청한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포기한다. 이 경우 다수는 우둔한 자의 대표일 뿐만 아니라 비겁한 자의 대표이기도 한 것이다.

 신앙상의 태도결정이 교육의 결과이고, 종교상의 요구 자체가 인간의 내심에 잠자고 있는 데 불과한 것 같이, 대중의 정치의견도 또한 종종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하고 철저한 가공을 마음과 이성에 베푼 궁극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나 정부는 다만 그때그때의 다수의지를 집행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정부의 정치적 능력을 다수자의 의지에 순응하거나 다수자를 자기에게 끌어들이는 기술에 의해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정부는 그와 함께 사실상의 통치자의 위치에서 그때그때의 다수자에 대해 구걸하는 자의 위치로까지 전락한다.

 결코 똑똑하다고 할 수 없는 모든 선거인의 투표용지에서 정치가가 동시에 100명이나 탄생한다는 등의 희망적인 사고는 하지 말기 바란다. 보통선거에서 천재가 탄생하리라는 난센스에는 아무리 날카롭게 대항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떤 국민 속에서 모든 것이 정화될 정도의 긴 기간 동안에 한 번쯤은 진정한 정치가가 나오는 법이지만, 동시에 100명이나 그 이상이 생겨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수결적 유대적 민주주의는 말할 수 없이 부정직하고, 특히 햇빛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만 환영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립하는 것이 게르만적 민주주의인데, 게르만적 민주주의는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을 완전히 인수할 의무를 지고 있는 지도자를 자유롭게 선택한다. 거기에는 개인의 문제에 대한 다수결은 없고, 다만 자기결단에 대한 능력과 생명을 거는 오직 한 사람의 지배가 있을 뿐이다.

 국가의 권위는 그것이 민족의 이해에 들어맞고, 적어도 민족에게 해가 되지 않을 경우에만 존경과 지지를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 붕괴되어야 할 권력이 합법적 수단을 쓰는 한 투쟁은 합법적인 수단으로 행해질 것이다. 그러나 압제자가 비합법적 수단으로 나온다면, 비합법적 수단에서 후퇴할 필요는 없다.

 인간존재의 최고목적은 국가,정부의 유지에 있는 게 아니라, 종족보존에 있다. 일단 종족이 압박을 받든가 절멸될 위기에 처했을 때는, 합법성의 문제는 이미 부차적 역할만 할 뿐이다. 압박받는 자의 자기보존충동이 온갖 무기를 갖고 싸우는 형태는 언제나 더할 수 없이 높고 정당하다. 이 원칙이 승인됨으로써 지상의 여러 민족이 내적,외적 노예화에 반대하는 자유의 투쟁이 힘차게 역사 속에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국가의 권리 위에 존재한다. 자신의 존재를 위해 싸울 각오나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영원히 공정한 섭리가 이미 종말을 정해 놓고 있다. 이 세상은 비겁한 민족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 자기 존재를 위해 싸울 각오와 능력이 없는 자에겐 죽음 뿐이다.

 전제정치가 이른바 합법성의 탈을 쓰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는 오스트리아의 예가 다시 한 번 분명하고 철저하게 보여 주었다. 당시 합법적인 국가권력은 대다수의 비독일인으로 이루어진 의회의 반독일적 기반과 마찬가지로 비독일적 왕가의 기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안경을 쓴 이론가는 언제나 민족을 위해서보다는 학설을 위해 기꺼이 죽을 것이다. 그는 인간이 우선 법률을 만들었으므로 인간은 법률을 위해 사는 것으로 확신한다. 의회는 해마다 독일민족을 멸망시키는 체제로 서서히 바뀌어 갔다. 결정적인 위기에서 구하는 모든 시도는 이 제도를 없애는 것 외에는 거의 성공 가능성이 없었다.

 오늘날 문필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자만에 빠진 모든 사람은,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은 결코 펜으로 인도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 펜에는 언제나 혁명을 이론적으로 기초하는 일만 남아 있다. 그러나 종교적,정치적 방법으로 위대한 역사적인 사태를 일으킨 힘은, 언제나 직접 입에서 나온 말의 마력 뿐이었다.

 언제나 연설의 힘에 의해서만 대다수의 민중을 움직일 수 있다. 따라서 위대한 목표를 가진 운동은 민중과 폭넓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어떤 문제라도 우선 이런 관점에서 음미하고, 또 이런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감소시키거나 혹은 약화시킬지도 모르는 것은 모두 피해야만 한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를 슬라브 국가로 만들기로 결정하자 여러 종교단체를 기만적인 투쟁에 이용했다. 체코의 주임사제나 사목을 이용했던 것은, 오스트리아의 전반적인 슬라브화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에 불과했다.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독일의 부흥이나 융성을 따로 시도한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고 또 불가능한 것이다.

 정당은 종교문제가 자기인종의 관습이나 도덕을 파괴하지 않는 한, 어떤 종교문제에도 관여해서는 안 된다. 정치지도자에게는 자기민족의 종교적 교의나 제도가 언제나 불가침의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정치가가 아니라, 종교개혁자가 되어야 한다.

 대중심리를 좀더 잘 파악하라. 보통 성과를 얻으려면 심리적 고려에서도 결코 대중에게 둘이나 그 이상의 적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투쟁력을 완전히 분열시킨다. 그 이유만으로도 운동의 칼끝은 단 하나의 적에게 향해야 한다. 어떤 정당이 무슨 일을 결정할 때, 실제로 달성할 수 없는 지극히 사소한 것까지 욕심내는 만물박사 같은 인간에 의해 지도되는 것 이상으로 정당에 위험한 것은 없다. ☞ 전략은 집중이다.

 사람들은 교훈을 잊기 위해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은 사정이 달라져서 역사의 영원한 진리는 이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믿기 위함도 아니다. 사람들은 바로 역사에서 현재를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를 성취하지 못하는 자가 정치지도자라고 자처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은 자기도취에 빠진 공상적인 바보이며, 설령 아무리 좋은 뜻을 갖고 있다 해도 그것이 실제적 무능함을 대신할 수는 없다.

 기독교사회당은 올바른 길을 택하긴 했으나, 목적에 관한 명백한 인식이 결핍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 구제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던 것은 목적이 불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사회당이 오스트리아를 구제하려면 장차 국가해체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던 상황에서 인종원리의 입장에 서지 말아야 했다. 온갖 분열적 요소를 도외시하고, 대신 모든 것을 통일하는 관점을 강조해야만 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눈에 띄는 인종집단 때문에 나는 불쾌했다. 체코인,폴란드인,헝가리인,루마니아인,세르비아인,그루지야인 등 여러 민족의 혼합은 혐오스러웠다. 특히 인류의 영원한 박테리아는 더욱 불쾌했다. 유대인, 또 유대인이었다. 내게는 이 거대한 도시가 인종적 신성모독의 권화처럼 보였다. 내가 이 도시에 오래 살수록 독일문화를 침식하기 시작한 이민족의 혼합에 대한 증오의 감정은 고조되어 갔다. 그런데도 이 국가가 오랫동안 지속되리라는 생각은 나로서는 우습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독일인이면서 조국에 속하지 못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각하는 사람만이,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소년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는 동경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빈은 가장 고생한 곳이지만, 내게 인생의 바탕을 이루게 해준 학교였다. 나는 소년시절에 빈에 와서, 조용하고 깊은 사색을 하는 진지한 어른으로 성장해 이 도시를 떠났다. 나는 빈에서 세계관의 기초를 확립하고 정치지식의 토대를 세웠으므로, 이후로는 그 세부적인 문제를 풍요롭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과제였다. 빈에서 5년이 안 되어, 지금은 위대한 단체가 된 나치스(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의 원칙에 속한 문제에 대해 내가 맨 처음 학습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