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뮌헨
1912년 봄, 23살의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하고 독일 뮌헨에 왔다. 빈에 비하면 얼마나 다른가! 여러 종족이 사는 바빌론의 도시는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독일의 동맹정책을 오스트리아 시절부터 이미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베를린은 동맹국이 사실 약하고 그다지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동맹정책을 지지하기 위해 생각을 자제했을 것이다. 이는 일찍이 비스마르크 자신이 시작했던 일이고, 또 갑자기 중지하면 허점을 노리는 다른 나라들이 들고 일어날지도 모르는 데다가, 국내의 속물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민중들은 동맹국에 대해 위급할 때는 앞장서 힘껏 싸워 줄 수 있는 성실한 강국으로 보아도 좋다는 헛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람들은 오스트리아가 벌써 오래 전에 독일적 국가제도를 채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 오스트리아 국내사정이 갈수록 붕괴의 길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은 최소한 외견상으로는 독일 도시였다. 그러나 빈을 벗어나 슬라브 지역으로 갔을 때는 사정이 얼마나 달라져 있었던가!
몇 년이 지나 동맹이 실효를 발할 때가 오자,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에서 탈퇴하고, 이국동맹을 궁지에 버려 둔 채 마침내 적으로 돌아섰다. 사람들은 얼마나 분개했는지 모른다. 독일에 있어 삼국동맹의 가치는 바로 오스트리아에 있어서의 독일인의 우위를 확보하는 데 좌우된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사람들은 정말 슬라브적인 합스부르크 왕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공존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을까?
나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이탈리아인의 심한 경멸과 증오를 여러 번 빈에서 목격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수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의 자유와 독립에 대해 저지른 죄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따라서 이탈리아로서는 오스트리아와 공존하는 데 동맹이냐 전쟁이냐의 두 가지 가능성만이 있었다. 이탈리아는 전자(동맹)를 택했으므로 여유있게 후자(전쟁)를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대립이 심각해진 이후, 독일의 동맹정책은 무의미하고 위험했다.
자연은 가혹하기는 하나 현명한 방법으로 인구를 조절한다. 즉 온갖 재난을 만들어 그 속에서 살아남은 자에게만 생존권을 주는 것이다. 이로 인해 모든 종족이 강해진다. 인간은 어느 기간 동안은 존속유지의 의지라는 영원의 법칙에 반항할 수 있지만, 언젠가는 보복을 당한다. 더 강한 인종이 약자를 몰아내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토지의 수익력은 어느 정도 끌어올릴 수 있지만, 그것은 다만 일정 한도까지일 뿐 무한정은 아니다. 새로운 토지를 얻지 못하고는 국민의 미래를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독일에 있어서 건전한 영토확장정책을 실시하는 유일한 가능성은 유럽에서 새로운 토지를 획득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19세기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식민지 영역을 얻을 수 없었다. 따라서 힘든 투쟁으로 식민정책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 유럽에 획득할 영토가 있다면, 대체로 러시아의 희생만으로 가능했다.
이런 정책을 위해서는 물론 유럽에 단 하나의 동맹국, 즉 영국이 있었다. 영국과 동맹을 맺어야만 후방이 보호되고 새로운 게르만의 행군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어떤 희생이라도 치러야 했었다. 식민지와 해상세력을 단념하고 영국공업에 대해 경쟁을 삼가는 등 절대적으로 명백한 태도만이 이런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었다. 즉 세계무역과 식민지를 포기하고, 독일해군을 단념하며, 육군에 국가의 모든 권력기능을 집중해야 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은 의미가 없었다. 이 미라의 국가는 전쟁을 관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구적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독일과 동맹을 맺었던 것이고, 또한 그 평화는 영리하게도 서서히, 하지만 확실히 왕국 내의 독일주의를 완전히 없애는 데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에 대한 적합성 여부는 전적으로 독일적 요소의 유지라는 것에 의해 결정되었으므로, 해마다 독일주의가 점점 더 억압받는 것을 방관해서는 안 되었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세기의 전환기에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국에 대항해 러시아와 동맹을 체결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러시아에 대항해 영국과 동맹을 체결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느 경우나 전쟁을 각오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민족도 무력에 의한 경제정복을 영국인만큼 냉혹할 정도로 철저히 준비하고 또 후에 얼굴 두껍게 변호하지는 못했다. 영국정치의 특징은, 정치력에서 경제적 이익을 만들고 온갖 경제적 강권을 또다시 정치권력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영국이 인간적으로는 매우 소심하고, 경제정책의 옹호를 위해 피흘리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얼마나 큰 착각일까!
독일에서는 학교나 신문이나 만화잡지 등을 통해, 영국인이나 영국제국은 교활하고 동시에 인격적으로는 전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겁한 장사꾼이라고 은연중에 민중을 교육했다.
세기의 전환기에 삼국동맹의 가치는 심리적으로도 이미 사소한 것이었다. 동맹의 건실성이란 동맹국이 목적을 현상 그 자체의 유지에 제한할수록 그에 따라 감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개개의 조약국이 동맹에 의해 일정하고 명확하며 포괄적인 목적에 이른다는 기대를 가질 수만 있다면, 동맹은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1914년의 대전이 오스트리아에 의해 간접적으로 시작되고, 그에 따라 합스부르크 왕가도 참전해야 했던 것은 독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와 달리 만일 독일에서 대전이 시작되었다면, 독일은 고립된 상태였을 것이므로, 합스부르크 왕가는 절대로 전쟁에 참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참가하려는 생각조차 안 했으리라.
독일에서는 정치의 힘이 고조되었을 때 언제나 경제도 융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제가 우리 민족 생활의 유일한 내용이 되고, 그에 따라 이념적 덕성이 질식했을 때는 국가는 또 다시 붕괴되고, 마침내 경제도 파국에 이르렀다. 국가를 형성하거나 유지할 만한 힘은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능력과 의지에 좌우된다. 인간은 결코 경제를 위해서 일신을 희생하지는 않는다. 즉 인간은 상업을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위해서 죽는 것이다.
영국인이 민중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심리적으로 우수했다는 것은, 그들이 싸울 경우 어떤 동기부여를 했는지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 싸웠는데, 영국은 자유를 위해서, 그것도 자기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약소국가의 국민을 위해서 싸웠던 것이다.
1914년 아직 이상을 위해 싸운다고 확신하는 동안 독일민족의 태도는 확고했다. 그러나 하루하루의 빵을 위해 싸우게 되자마자 이 도박을 포기하고 말았다. 인간은 경제적인 이익 때문에 싸우는 순간부터 가능한 한 죽음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연약한 어머니도 자식을 살리려는 일념에 불탈 때는 영웅처럼 행동하기 마련이다.
1913~1914년 나는 처음으로 친지들 사이에서 독일국민의 장래가 마르크시즘의 절멸 문제에 달려 있다는 확신을 이야기했다.
5장. 세계대전
나는 어렸을 때부터 평화주의자는 아니었으므로, 아무리 그 방향으로 교육해 보려고 해도 헛수고로 끝날 뿐이었다. 그 즈음 발발한 보어전쟁은 내게 마치 여름날의 번갯불 같았다. 전보나 통신을 읽으며 멀리서나마 영웅적인 투쟁의 목격자로서 희열을 느꼈다.
러일전쟁 때 나는 상당히 성숙했으므로 보다 깊은 통찰력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민족적 이유에서 일본을 지지했다. 러시아의 패배 속에서 오스트리아 슬라브주의의 파멸을 보았던 것이다.
인간은 자기 염원대로 되기를 바라고 믿는다. 국민의 압도적 대다수는 장기간의 불안한 상태에 지친 지 오래였다. 사람들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간의 분쟁에 대한 평화적 조정 같은 것은 이미 전혀 믿지 않았고, 차라리 결정적 대결을 바라고 있었다. 나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老대국은 어쩔 수 없이 싸워야만 했다. 나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위해서는 싸우고 싶지 않았으나, 내 민족과 독일제국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처(夫妻)의 암살이 제1차 세계대전의 발화점이 되었다.
1914년 8월 3일, 나는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3세에게 직소해 바이에른 연대에 입대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이튿날 곧 청원의 회신을 받은 나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며칠 후 나는 군복을 입고 뮌헨을 떠났고, 약 6년 후에 군복을 벗었다.
플랑드르 지방의 밤은 습했고 매우 싸늘했다. 우리는 한밤중 내내 묵묵히 행진했다. 아침햇살이 비치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 우리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총성과 함께 소총탄환이 도발적으로 우리 대열의 습지에 와서 꽂혔다. 硝煙이 채 가시기도 전에 200명이 외치는 최초의 돌격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총성이 울려 댔다. 우리는 모두 눈에 불을 켜고 전진했다. 백병전이 벌어졌다... 나흘 후 우리는 복귀했다. 이땐 이미 걸음걸이조차 달라져, 17세의 소년들도 어른처럼 보였다. 그들은 정식으로 전투법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죽음이 어떤 것인지는 고참병과 똑같이 알고 있었다. 그것이 첫 전투였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갔다. 첫 전투의 기쁨이나 낭만도 이제는 죽음의 불안으로 질식하고 말았다. 각자가 자기보존 충동과 의무이행 사이에서 싸움을 해야 할 시기가 왔다. 나도 이 싸움을 피할 수 없었다.
어떤 세계관을 폭력으로 타도하고자 하는 온갖 시도는, 그 투쟁이 어떤 새로운 정신적 입장을 위한 공격이라는 형식을 취하지 않는 한 실패하고 만다. 상반된 두 가지 세계관이 싸울 경우, 이 잔학한 힘의 무기를 사정없이 이용해 그것을 지지한 측에 승리의 판정을 내린다. 이 점에서 지금까지 마르크시즘의 타도는 항상 실패했다. 비스마르크의 反사회주의 입법이 온갖 애를 썼는데도 결국 실패로 끝난 것도, 또한 실패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새로운 세계관의 고양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그 세계관의 발판이 없었던 것이다.
6장. 전시선전(戰時宣戰)
모든 정치적 사건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동안 나는 선전활동에 많은 흥미를 갖게 되었다. 나는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적 조직이 선전활동을 실로 노련한 기량으로 지배하고, 교묘히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그 무렵 나는 선전의 올바른 이용이 부르주아 정당에게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진정한 기술이라는 사실을 일찍부터 이해하고 배웠다.
사람들은 선전을 제대로 이용하면 큰 효과를 거둔다는 것을 전쟁 중에 비로소 이해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모든 것을 상대편에게 배워야만 했다. 그 점에 있어 우리 편의 활동은 매우 뒤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독일의 지도급 인사들이 태만하게 있는 동안, 나는 적의 선전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선전은 수단이며, 따라서 목적의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그 때문에 선전의 형식은, 그것이 봉사하는 목적을 돕는 데 적합해야 한다.
생존을 위해 싸우는 민족은 인도주의나 미학 따위를 고려해서는 안 된다. 인간생활 가운데 가장 아름답지 못한 것은 노예의 멍에를 목에 걸고 있는 일이다. 전쟁에 있어서의 선전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선전 또한 목적에 적합한 원칙에서만 고찰될 수 있었다. 무자비하기 이를 데 없는 무기도, 그것이 보다 신속한 승리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인도적이었다. 그리고 국민이 자유의 존엄성을 확보하도록 돕는 방법만이 美였다.
선전은 누구를 향해 해야 하는가? 지식층에 대해서인가, 아니면 교육수준이 낮은 대중에 대해서인가? 선전은 영원히 오직 대중에게만 필요한 것이다! 지식층에 대해서는 선전이 불필요하고, 그들에게는 학술적 교화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선전은 내용으로 보아 학문이라고 할 수 없다.
선전의 과제는 개개인의 학문적 인식이 아닌, 어떤 일정한 사실이나 필연성 등에 대중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선전은 먼저 대중의 시야에 미쳐야 한다. 따라서 그 기술은 뛰어난 방법으로 어떤 하나의 현실성, 과정의 필요성, 필요한 것의 정당성 등에 관한 일반적 확신이 가능하도록 하는 데만 존재한다. 그러나 선전은 그 자체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포스터처럼 대중의 주의를 환기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과제는 원래 학문적 경험이 있는 자라든가 교양을 구해 통찰을 얻고자 노력하는 자의 교화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감정에 호소하고, 이른바 지성에 대해서는 대폭적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선전은 모두 대중적이어야 하며, 그 지적 수준은 선전이 목표로 하는 대상 중 최하 부류까지도 알 수 있을 만큼 조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끌어들여야 할 대중의 수가 많을수록 순수한 지적 수준도 더욱 낮춰야만 한다.
대중의 감정적 관념을 파악하고, 심리적으로 정당한 형식에 의해 대중의 주의를 끌고, 그 마음속에 파고드는 것이 바로 선전의 기술이다. 현명한 체하는 우리의 동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어리석음과 자만심의 증거다.
만일 선전 기술에서 대중을 향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거기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이 생긴다. 즉 선전에 마치 학술적 교화처럼 다양성을 주는 것은 잘못이다. 대중의 수용능력은 크게 제한되어 있고, 이해력은 적으나 대신 망각력은 크다. 이 사실로 보아, 효과적인 선전은 특히 중요한 항목 몇 가지를 정해 무지한 사람도 의미를 깨닫게 될 때까지 그것을 거듭 설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원칙을 무시하면 선전은 효과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선전에서 표현의 선이 굵어질수록 전술의 형태는 심리적으로 더욱 건전해져야 한다. 예컨대 오스트리아나 독일의 만화선전이 그랬던 것처럼, 상대를 웃음거리로 만든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었다. 실제로 적과 부딪친 독일병사는 지금까지 자기들이 계몽해 온 것으로부터 속았다고 느낌으로써, 투쟁력이나 확고부동한 심적 자세를 강화하는 데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미국의 전시 선전은 심리적으로 정당했다. 그들은 자국민들에게 독일인을 야만인이라고 선전함으로써, 개개의 사병이 사전에 전쟁의 공포에 대해 마음을 가다듬어 환멸을 일으키지 않도록 배려했다. 지금 자기를 겨누고 있는 무기가 아무리 무서운 것이라도, 그들은 지금까지 자기들에게 주어진 계몽의 정당성을 재확인했고, 극악한 적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을 높이고, 아울러 정부의 주장이 옳다는 신념을 더욱 확고히 했던 것이다. 적의 무기의 가공할 효력이 야만스런 적의 잔혹함을 증거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병사는 자기 나라에서 거짓 정보를 들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 유감스럽게도 독일병사는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해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한 적이 아주 많았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를 선전 책임자로 임명한 결과이다.
가장 나쁜 것은, 전전활동 중 첫 번째 전제를 이해하지 못해, 선전의 모든 문제에 대해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전쟁의 책임소재에 대해 독일만이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변명은 잘못된 것이었다.
민중의 압도적인 다수는, 냉정한 숙고보다는 차라리 감정적으로 행동을 결정한다. 감정은 복잡하지 않으며, 매우 단순하고 폐쇄적이다. 그들의 감정에는 음영이 거의 없고, 오직 대립만 존재할 따름이다. 애정인가 증오인가, 긍정인가 부정인가, 진실인가 거짓인가 하는 것 뿐이다.
영국인은 대중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가공할 선전력으로 자기 나라의 도덕적 정의를 만들어 내고,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거짓말로 독일을 전쟁을 일으킨 유일한 책임자로 못박았다.
모든 선전공작의 독창성은 언제나 동시에 기초적 원칙이 예리하게 고려되지 않으면 성과를 올릴 수 없다. 선전은 짧게 제한하고, 계속 되풀이해야 한다. 끈질김이 성공에 이르는 첫 번째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전제가 된다. 선전 분야야말로 결코 탐미주의자나 우둔한 자에 의해 지도되어서는 안 된다. 선전의 조직과 내용이 대중의 요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면, 그것은 모든 통일성을 잃어 산만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선전은 대중에게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둔감함 때문에 하나의 일을 인식시키는 데도 언제나 일정한 시간을 요한다. 가장 간단한 개념이라도 몇천 번 되풀이하는 것만이 기억하게 만들 수 있는 길이다. 모든 광고는 상업분야든 정치분야든 꾸준함과 변치않는 통일성에 의해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7장. 혁명
1914년 우리가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전례가 없을 만큼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1918년 초 독일 혼성군단의 장거리 중포가 파리에 집중포격을 가하기 시작했을 때 프랑스는 무엇을 했던가? 후퇴를 서두르는 연대가 국민적 정열의 채찍질에 얼마나 격려를 받았던가! 패한 전선의 병사 가슴에 승리에 대한 궁극적인 신념을 심을 때는 바로 지금이라면서 선전을 하지 않았던가!
반면 독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아무 일도 없었다. 오히려 당시 나는 후방에서 온 신문에 실린 심리적인 대량학살을 보고 타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만일 내가 선전공작에 대해 무능한, 아니면 의욕이 결여되어 있는 자들의 위치에 대신 놓여 있었다면 전쟁의 운명을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운명은 내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전선에, 더구나 어떤 흑인병사라도 제멋대로 나를 죽일 수 있는 곳에 두었던 것이다. 나는 8배만 명 중의 한 사람일 뿐, 묵묵히 그 지위에서 의무를 이행하는 도리 밖에 없었던 것이다.
1915년 여름, 나는 처음으로 적의 선전물을 입수했다. 형식은 각양각색이었으나 내용은 대개 비슷했다. "독일의 궁핍은 더욱 심각해지고 승산은 점점 희박해져 가는데도 종전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민중은 평화를 애타게 원하지만, 군국주의와 황제가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 세계는 결코 독일민족과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유일한 책임자인 황제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은 평화로운 인류의 적이 배제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국민은 전쟁 종결 후 독일국민을 영구적인 세계평화에 가입시킬 것이다. 그것은 프로이센 군국주의를 섬멸하는 순간부터 확립될 것이다."
1916년 10월 7일, 나는 부상을 당했다. 후방으로 보내졌다가 독일로 후송되었다. 베를린 근교의 베리츠 병원에 도착했다. 전선에서 필요한 군인정신은 거기에서는 이미 통하지 않았다. 자신의 비겁에 대한 자랑이 넘쳤다. 착실한 병사들의 의식을 웃음거리로 여겼다. 비겁한 자의 지조 없음은 모범적인 것으로 치켜 올렸다. 나는 구역질이 났다.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베를린에 놀러 나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곤궁은 도처에 넘쳐 흘렀고, 수백만 명이 사는 도시는 기아로 고통받고 있었다.
내가 다 나아서 병원을 나와 보충대대로 전출되었을 때, 거기에는 불평불만과 험담만 있었다. 교관들은 전장에 가본 일이 없었다. 사무국은 유대인이 차지하고 있었고, 서기들도 거의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은 안전한 지위에 앉아 막강한 경제력으로 독일을 강탈하기 시작했다. 군수회사를 통해 국민적 자유경제를 압박하는 도구를 발견하고 있었고, 기업집중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1916~1917년에는 사실상 이미 모든 생산이 유대인의 금융지배 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민중의 증오는 도대체 누구에게 돌려지고 있었을까? 유대인이 독일국민에게서 훔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프로이센에 대항해 선동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일반의 주의를 자기에게서 타인에게로 돌리는 유대인의 천재적 트릭을 볼 수 있었다. 바이에른과 프로이센이 싸우는 동안 유대인은 양자를 코끝으로 다루고 있었다. 나는 독일종족의 이 불화를 견딜 수 없어서 전선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뮌헨에 도착한 뒤 곧 다시 지원했다. 1917년 초 나는 연대로 복귀했다.
1917년 말 러시아의 붕괴로 군대의 의기소침은 해소되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동부의 독일군은 3년 동안 러시아를 공격했다. 전쟁은 다시 독일의 승리로 돌아가리라는 확신이 군대 분위기를 주도했다. 특히 1917년 가을 이탈리아 전선의 붕괴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승리로 러시아의 전장 말고도 전선을 격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선에서는 종전을 위한 최후 준비를 시작하고, 서부전선으로 인원,물자를 끊임없이 수송하며 대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충격적이게도 독일에서는 군수공장의 동맹파업이 시작되었다. 병사는 승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데, 본국에서는 파업이라니! 그것이 적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겠는가?
독일이 승리를 획득한다 해도 본국에서는 혁명이 승리를 목전에 두었으므로, 승리한 군대가 나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더할 수 없이 교묘한 선전이 군대를 분산시키고 있는 동안, 영국,프랑스,미국의 신문은 "독일은 혁명 직전이다! 연합군은 반드시 승리한다!"라고 썼고, 이것은 불안했던 연합군을 도와 일으키는 데 가장 좋은 약이었다.
1918년 10월 13일 우리는 베르빅 남쪽 언덕에서 하룻밤 내내 맹렬한 가스 유탄 세례를 받았다. 즉사한 전우가 몇 명 있었다. 나는 15분마다 심한 부상으로 고통에 시달렸다. 아침이 되자 타는 듯 눈이 아팠다. 몇 시간 후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포메른의 파제발크 병원으로 후송되고, 거기에서 혁명을 체험해야만 했다.
11월이 되자 어느 정도 눈이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키르 군항에서 수병들이 전쟁반대 혁명을 외쳤다. 그들 중 전선에 나가 싸워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며칠 후 전국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전선으로부터는 굴욕적으로 항복을 생각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내 가슴 속에서 원흉에 대한 증오가 불탔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계약 따위는 없고, 다만 엄격한 양자택일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8장. 정치활동의 시작
1918년 11월 말, 나는 뮌헨으로 돌아왔다. 나의 연대 보충대로 갔으나, 보충대는 병사평의회 수중에 있었다. 1919년 3월, 정세는 불안정했고, 혁명의 확대는 불가피했다. 마침내 노동자 병사 평의회의 독재로 이어졌다. 유대인 지배로 인도된 것이다. 평의회에 의해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나는 보병 제2연대의 혁명경과조사위원회로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순수한 정치운동의 시작이었다. 수주일 후 나는 병사들에게 公民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강습회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거기서 두서너 명의 동료를 사귀게 되었다.
강습회 연사 중 한 명인 고트프리트 페더의 '이자 예속의 타파" 강연을 통해서 나는 생전 처음 국제금융과 대부자본의 원리적 설명을 들었다. 그는 국제금융과 대부자본의 투기적 성격을 단호히 규정하고, 이자라는 영구불변의 전제를 폭로했다. 그의 강연으로 인해 나는 비로소 신당수립을 위한 가장 본질적인 전제의 한 가지에 대한 길을 발견했다.
국민경제에서 주식자본을 날카롭게 분리함으로써 자본일반에 대한 싸움과 동시에 독립된 민족적 자기보존의 토대를 위협당하는 일 없이 독일경제의 국제화에 대항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페더의 강연 속에서 나는 다가올 투쟁에 대한 힘찬 표어를 감지했다. 이후의 발전은 당시 우리의 느낌이 얼마나 정당했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교활한 부르주아 정치가로부터 더 이상 조롱당하지 않는다.
강령입안자의 과제는 어떤 문제의 실행가능성에 대해 여러 가지 방향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를 명확히 하는 데 있다. 즉 그들은 방법보다는 목표에 관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어떤 이념의 원리적 정당성을 규정하는 거이지, 실행의 곤란함을 상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운동의 강령입안자는 목표를 확립해야 하며, 정치가는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방법이나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강령입안자의 자질은 목표의 정당성이나 인류의 발전에 미친 영향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장기적 안목으로 세운 계획은 훨씬 나중에 겨우 실현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그 이익은 후세에 비로소 도움이 되는 것으로, 그런 장기적인 계획보다는 맥주나 우유의 가격인하 쪽이 대중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 따라서 정치가의 대부분은 항상 어리석음이나 다름없는 일종의 자만 때문에 대중의 일시적 동정을 잃지 않으려고 장기적인 계획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미래를 위한 인간의 일이 클수록 현대로서는 그 일을 이해하는 일이 더욱 어렵고, 투쟁 또한 어려우며 성공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현대로부터는 이해를 받지 못하지만, 이념이나 이상을 위해 투쟁할 각오가 된 위대한 투쟁자는 그들 가운데서 헤아려질 수 있다. 그들은 언젠가는 민족의 마음에 새겨질 사람이다.
최선의 이념이라 해도 실상 그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그리고 국가사회주의자에게 있어서는 단 하나의 신조만 있다. 즉 민족과 조국이 그것이다. 우리의 투쟁목적은 우리 인종, 우리 민족의 존립과 증식의 확보, 자손들의 부양, 혈통의 순결성 유지, 조국의 자유와 독립에 있으며, 우리 민족이 만물의 창조주에게서 위탁받은 사명을 달성할 때까지 생육하는 데 있다.
모든 것은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어떤 이론도 죽은 신조로 고정될 수는 없다. 고트프리트 페더의 강연은 내가 철저하게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영역에 관계하게 만든 동기가 되었다. 나는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때 비로소 유대인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이해하게 되었다.국민경제에 대한 사회민주당의 투쟁이 그야말로 국제금융 및 주식자본의 지배를 위한 바탕을 마련하는 데 불과했음을 깨달았고, 아울러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비로소 올바르게 이해되었다.
어느 날 토론참가자 한 사람이 유대인을 위해 장황하게 변호하기 시작했다. 내가 항변하자 참가자 다수는 내 견해에 동조했다. 그 결과 나는 2~3일 후 소위 교육계 장교로서 뮌헨 연대에 편입되었다. 나는 열의와 애정을 갖고 가르쳤다. 내게 많은 청중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말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내게 그만큼 행복했던 임무는 없었다. 거기서 나는 훗날 새로운 운동의 핵심을 이룬, 같은 뜻을 가진 많은 전우를 만나게 되었다.
9장. 독일노동자당
어느 날 나는 독일노동자당이라는 단체에 대해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집회에 참석한 후 보고서를 작성해야만 했다. 그 집회에는 고트프리트 페더도 연설하게 되어 있었다. 집회에 갔을 때, 거기엔 주로 하층계급 사람들이 20~25명 출석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이나 비슷한 신당수립 과정이었다. 도처에 그런 단체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소리없이 사라지곤 했다.
자유토론시간에 한 교수가 고트프리트 페더의 논거에 의문을 제기했고, 바이에른이 프로이센에서 분리되도록 투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는 그의 의견에 반대해 얘기했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회의장에서 사라졌다. 내가 나오려고 할 때, 한 사나이가 다가와서 이름을 밝히고, 팸플릿을 건네며 읽어 달라고 간청했다.
나는 곧 그 일을 잊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당신을 독일노동자당에 가입시켰다.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으니, 다음주 수요일에 당의 위원회에 참석해 달라."는 내용의 엽서를 받고 놀랐다. 그와 같은 당원확보 방법에 나는 기가 막혔다. 나는 호기심에서 직접 설명하기 위해 정해진 날에 참석했다.
네 명의 젊은이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팸플릿 저자도 있었는데, 그들은 나를 환영해 주었다. 마침내 의장이 나타났는데, 전국적 조직의 의장은 할러이며, 뮌헨의 위원장은 안톤 트렉슬러였다. 아직 강령도, 전단도 없었다. 당원증도 없었다. 그저 훌륭한 신념과 좋은 의지가 있을 뿐이었다.
정치에 참여하겠다는 결심은 이미 오래 전에 했다. 단지 실행의 계기가 없었을 뿐이다. 나는 한 번 결심한 것을 나중에 번복하는 성격이 아니므로, 나의 결심은 확고한 것이 아니면 안 되었다. 나는 언제나 무엇이든 시작해 놓고 무엇 하나 실행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해 본능적인 혐오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가난하다는 것은 나로서는 아직은 감내하기 쉬웠다. 그러나 내가 무명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곤란한 일이었다. 나는 수백만 명 중의 한 사람, 즉 누구의 주의도 끌지 못하고 살다가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은 필시 곤란을 초래할 만한 조건이었다.
이른바 지식계급이란 원래 의무교육을 제대로 맏지 않고 필요한 지식이 주입되어 있지 않은 자를 매우 업신여기는 태도로 대하는 법이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다만 무엇을 배웠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교양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이틀에 걸쳐 고민을 거듭하고 심사숙고한 끝에, 마침내 나는 일보를 내디뎌야 한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나는 독일노동자당의 당원으로 등록하고, 번호 7이라고 기록된 임시 당원증을 받았다. ☞ 19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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