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붕괴의 원인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일의 붕괴가 주로 일반적인 경제적 궁핍 및 그로 인해 야기된 결과 때문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이는 모든 개인에게 파국을 이해하기 위한 그럴듯한 이유가 된다. 대중은 붕괴를 정치적,문화적,도덕적 견지에서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일을 구제하는 데 있어 경제는 제2~3의 역할 밖에 할 수 없고, 정치적,논리적,도덕적,혈연적인 요소야말로 제1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오늘날의 불행의 원인이 이해되며, 따라서 치료방법도 발견될 것이다.
붕괴의 원인을 군대의 패배에 돌리는 것은 그야말로 유대적인 뻔뻔함이다. 패전은 원인이 아니라, 여러 원인에서 생긴 한 결과에 불과하다. 독일군의 조직과 지휘는 지상 최강이었다. 이 군대가 붕괴했다는 것은 다른 범죄의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유대인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목숨 걸고 싸운 군인들을 비난하고, 붕괴 책임을 지우려고 무수한 거짓을 꾸며 댔다. 그들은 루덴도르프 장군을 세계대전 패배의 책임자로 낙인 찍음으로써, 조국의 반역자를 적발할 힘을 가진 오직 한 명의 탄핵자로부터 도덕적 정의라는 무기를 박탈했던 것이다.
신문은 현실적으로 상당한 나이가 된 사람들에 대해 교육의 연장이라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신문의 독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그룹으로 분류될 수 있다.
1) 읽은 것을 모두 믿는 사람들 - 수적으로 최대 그룹인 대중이다. 스스로 생각할 만한 능력이 없으며,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다소 무능하고 무지해서 인쇄된 모든 것을 믿는다. 이들에게 신문의 영향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2) 어떤 것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 - 수적으로 매우 적다. 그들 중 일부는 원래 첫째 그룹에 속했으나 오랫동안 환멸을 겪은 후 이제는 인쇄물이라면 무엇이든 믿지 못하게 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다루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정치적인 일에 대해서는 무익한 인간이다.
3) 읽은 것을 비판적으로 음미한 이후에 판단하는 사람들 - 숫자가 가장 적다. 타고난 소질과 교육에 의해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이 있으므로,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가지려 노력하고, 또 자신이 아는 지식을 극히 근본적으로 음미한 뒤 결론을 내리는, 정신적으로 세련된 두뇌의 소유자들이다. 이들은 저널리스트 따위는 어쩌다 진실을 말할 뿐인 사기꾼으로 간주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그런 뛰어난 인간가치는 그 지능에 있는 것이지, 수에 있는 것은 아니다.
대중의 투표결과가 모든 일을 결정하는 오늘날 결정적인 가치는 그야말로 최대다수의 그룹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첫째 그룹, 즉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가볍게 믿는 자의 무리인 것이다.
국가와 국민에게 있어 가장 유익한 일은, 사람들이 보다 저열하고 무지한, 또는 악의에 찬 교육자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문제에 대한 현상의 제거가 아니라, 원인에 대한 투쟁이 중요하다. 인간은 결과를 종종 너무 늦게 알아챈다.
오직 하나의 과제에 한정시켜 집중하라. 마치 그것의 해결에 생사가 걸려 있는 것처럼 주의시켜야 한다. 오직 그런 경우에만 한 민족이 위대한 일이나 노고를 기꺼이 맞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원칙은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목표를 향해 접근하려는 노력은 하나의 기술이며, 이 행로를 극복하기 위해 때로는 최후의 힘까지도 바쳐야만 한다. 절대로 그것도 하나의 과제라는 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결함있는 인간이 결함있는 자손을 생식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은 가장 명석한 이성의 요구이며, 그것이 계속 수행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인간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100년의 일시적인 고통은 수천 년의 고통을 미리 방지할 수 있고 또 방지할 것이다. 이 세계는 힘이 넘치는 완전한 사람의 것이며, 나약하고 불완전한 사람의 것은 아니다.
신교,구교 양파가 제각기 새로운 신자를 끌어들이려고 아시아,아프리카에서의 선교활동에 주력하고 있는 동안 유럽의 수백만, 나아가서는 수천만의 착실한 신자를 잃어버리고 있다. 국민대중은 철학자의 집합이 아니다. 대중에게는 흔히 신앙이 윤리적 태도의 유일한 기초다.
타협정책은 비스마르크의 "정치는 가능한 것에 대한 기술이다."라는 견해와 일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비스마르크와 이후의 독일수상 사이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비스마르크는 이 명제로 일정한 정치목표를 달성하는 데 모든 가능한 수단을 사용하고, 또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려 한 것 뿐이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는 정치사상이라든가 혹은 정치적 목표조차 구태여 가질 필요가 없으며, 그 필요성에서 자유로이 해방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11장. 민족과 인종
매일의 빵을 위한 투쟁은 모든 약한 자와 병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한 자를 패배자로 만들지만, 한편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의 투쟁은 가장 강하고 튼튼한 것에게만 생식할 권리나 그 가능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투쟁은 변함없이 종의 건전함과 저항력을 촉진하는 수단이 되며, 따라서 그 종의 진화의 원인이다.
자연은 약한 개체와 강한 개체의 결합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열등한 민족과 우수한 민족의 결합 또한 바라지 않는다. 그런 결합으로 인해 오랜 세월에 걸친 자연의 노력이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역사적 경험은 이같은 것에 대해 무수한 예를 보여 준다. 놀랄 정도로 명석한 아리아 인종이 보다 열등한 민족과 혼혈한 결과 문명의 주도권자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참으로 명료하게 제시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이 열등한 유색인종과는 거의 섞이지 않은 게르만적 요소로 구성된 북아메리카의 경우, 수 차례 광범위하게 원주민과 혼혈한 라틴계 이주민으로 구성된 중앙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와 비교해서 훨씬 우수한 인간성과 문화를 갖고 있다. ☞ 점 관점.
어떤 관념이 인류의 생성과 존재에 대한 전제를 정복하지는 못한다. 관념 자체가 인간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없다면 이 세계에 인간의 관념 같은 것은 존재할 수가 없으며, 관념 자체는 언제나 인간의 존재에 의해서, 또한 인간 존재의 전제조건을 만든 모든 법칙에 제약받고 있는 것이다. 모든 관념은 인간에게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서, 인간의 정신적인 상상력,창조력 덕분에 관념도 존재할 수가 있다.
싫든 좋든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한다는 것을 굳은 의지로 결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살기를 원하는 자는 마땅히 싸워야 한다. 이 영원한 투쟁의 세계에서 싸우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살 가치가 없다.
우리가 오늘날 인류문화에 대해, 즉 예술,과학,기술의 성과로 보는 것은 모두 한결같이 아리아 인종의 창조적 소산이다. 아리아 인종은 지적 능력보다는 오히려 자기 능력의 일부를 사회를 위해 기꺼이 바치는 점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다. 오늘날 아리아 인종이 세계에서 그처럼 높은 지위에 있는 원인은, 다른 민족의 이기적 관념에 대립해 이상주의적 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생활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것은, 모든 희생정신 중 가장 값진 것이다. 이같은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근본적인 태도를 에고이즘이나 이기주의와 구별해서 이상주의라고 부른다. 참된 이상주의는 개인의 관심이나 생명을 전체사회에 종속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주의만이 인간에게 힘과 강력한 특권을 부여한다.
에고이즘이 어떤 민족의 지배자가 된다면 질서의식은 희미해지고, 부지런히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중에 인간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확실히 후세 사람들조차도 자기 이익에만 급급했던 사람은 잊어버리고, 자기 행복을 포기한 영웅을 칭찬하는 것이다.
아리아 인종과 가장 대조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은 유대인이다. 세계의 어느 민족도 유대인 이상으로 자기보존 충동이 강하게 발달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서는 유대인이 현존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 이미 충분한 증거가 된다. 과거 2천 년 동안에 내면적 소질이나 성격 등에서 유대민족만큼 적은 변화를 보인 민족은 없을 것이다.
유대인은 오늘날 현명함의 전형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지성은 스스로 진화한 결과가 아니라, 다른 민족을 모범으로 한 實物敎授의 결과다.
유대인은 아예 자신의 문화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적 작업의 기초를 언제나 다른 민족으로부터 얻었다. 그들의 지성은 모든 시대를 통해 주변문화권에 의거해서 발달했다. 결코 그 반대의 과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대민족의 자기보존 충동이 뛰어나게 강했다 해도, 문화민족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전제, 즉 이상주의적 태도는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유대인의 투쟁과정 혹은 그들이 이웃에게서 강탈하는 경우에 보이는 단결심을 보고 그들에게 어떤 종류의 전형적이 희생이 존재한다고 추론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다. 그런 경우에도 유대인을 이끄는 것은 역시 개개의 노골적인 에고이즘이다.
유대인은 어떤 문화형성력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성은 결코 건설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도리어 파괴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유대인에 의해 인류의 진보가 이루어진 적은 없고, 오히려 그들을 무시함으로써 진보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유대인은 지금껏 일정한 영역의 경계를 가진 국가를 소유한 적이 없고 또한 고유의 문화도 갖지 못했으므로 그들을 유목민족으로 보는 관념이 생겼는데, 이는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유대인은 유목민이 아니고 늘 다른 민족의 체내에 사는 기생충일 뿐이다. 더구나 그들이 종종 지금까지 살고 있던 생활권을 버린 것은, 자의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때에 따라 악용한 숙주민족에 의해 추방을 당했기 때문이다.
다른 국민 및 다른 국가의 체내에 사는 기생충으로서의 유대인의 삶에는 분명 어떤 특성이 있다. 일찍이 쇼펜하우어로 하여금 유대인을 거짓말의 명수라고 부르게 한 것이다. 유대인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북극인이 살기 위해 따뜻한 옷을 입기를 강요당하는 것과 같다.
다른 민족 내부에서의 유대인의 삶은, 그들이 하나의 민족이 아닌, 특수하기는 하지만 하나의 종교공동체라는 여론을 일반에게 성공적으로 환기시켰을 경우에만 계속 보증된다. 그러나 이는 가장 큰 거짓말이다. 그들이 다른 민족의 기생충으로서 생존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유한 존재양식을 포기해야만 한다.
유대인은 항상 일정한 인종적 특성을 구비한 민족이며, 결코 종파는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생활의 필요에 따라 자신을 향한 불쾌한 주의를 현혹시키는 수단을 이미 일찍부터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종교공동체라는, 남에게서 훔친 개념을 은근히 흘리는 수단 말고 목적에 더 알맞고 더 해롭지 않은 수단이 또 있었을까?
원래 그들은 자기의 존재양식 때문에 이상주의를 어떤 형식으로도 소유하지 못하며, 따라서 피안에 대한 신앙도 그들과는 완전히 무관하다는 점만으로 유대인은 종교제도를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어떤 형식일지라도 사후의 생명에 대한 확신을 결여한 종교는, 아리안 인종의 견해로는 생각할 수 없다. 실제로 <탈무드>는 피안의 준비를 위한 서적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 그것도 유익한 삶을 위한 서적에 불과하다.
유대교의 교의는 유대인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한 것, 유대인 상호간의 교재, 비유대인과의 교재 등의 규제하기 위한 명령이다. 여기에서 윤리적 문제는 다루어지지 않고, 극단적으로 겸손한 경제적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
그들의 삶은 이 세상의 것에 지나지 않고, 그들의 정신은 기독교와는 내면적으로 전혀 무관하며, 그러한 본질은 그리스도에게조차 그렇게 생각되었다. 물론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각을 유대민족에게 감추지 않았으며, 필요한 때는 신전에서 당시에도 변함없이 종교를 돈 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던 인류의 적을 채찍질해 쫓았다.
유대인이란 하나의 인종이 아니고 하나의 종파라는 이 최초이자 최대의 거짓말 위해, 피할 수 없는 귀결로 더욱 계속되는 거짓말이 누적되어 간다.
수백만에 이르는 많은 인간이 공장노동자로 일하며 그날그날의 빵을 얻기 위해 농촌에서 대도시로 끊임없이 이주해왔다. 이 새로운 계급의 노동 및 생활상은 비참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옛 직공이나 농부의 노동방법을 기계적인 새로운 형식으로 전용하는 것부터가 잘 되지 않았다. 새로운 노동방법에서는 시간이 점점 중시되었다. 옛날에는 하루 14시간의 노동도 묵묵히 견뎠지만, 오늘날처럼 1분도 최대한 이용하는 시대에는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은 확실하다.
시골에서 사회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고용주와 고용인이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식사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변화가 생겼다. 이제는 모든 영역에서 고용인과 고용주의 분리가 이루어진 듯하다. 사람들이 기계공업에 냉담한 태도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유대인은 이 새로운 계급이 경제변화로부터 빠져 나와 발전해 나가는 즉시 이미 자신이 더욱 전진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선도력을 확실히 발견하고 있다. 그들은 처음 부르주아 계급을 봉건세계의 城을 파괴하는 철퇴로 이용했으나, 이제는 노동자를 부르주아 계급을 궤멸하는 데 이용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부르주아 계급의 그늘에서 시민권을 몰래 수중에 넣는 방법을 알았는데, 지금은 노동자의 생존투쟁 속에서 자신이 지배자가 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노동자에게 접근해 그들의 운명을 동정하는 것처럼 가장하거나, 그 비참하고 가난한 처지에 분개하는 것처럼 가장한 후에 신뢰를 얻는다. 그들은 끝없는 교활성으로 아리아라면 누구에게나 내재해 있는 사회정의에 대한 욕구를 행복한 사람들에 대한 증오로까지 높이며, 그런 때 사회적 폐해를 제거하기 위한 투쟁에 대해 매우 확실한 세계관적 낙인을 찍는다. 그들은 마르크시즘의 이론을 창시한다.
그들은 마르크시즘이 무수한 사회정의 주장과 굳게 통합되어 있다고 언명함으로써 이론보급을 촉진시키는 동시에, 반대로 성실한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주장을 따를 것을 끈질기게 촉구한다. 행해질 때부터 이미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마르크시즘 속에는 참으로 악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노동자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사실은 모든 비유대 민족의 노예화, 나아가 절멸을 꾀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운동은 선전운동이다. 유대인들은 서서히 노동조합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가는데, 이는 아주 쉬운 일이다. 그들에게 사회적 결함을 실제로 제거하는 것 따위는 문제가 아니며, 다만 그들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경제적 돌격대에게 국민경제의 독립을 무너뜨리기 위한 교육을 시키는 것만이 목적이다.
건전한 사회정책의 지도란 끊임없이 국민건강 유지, 독립된 국민경제 보존 원칙을 조정하는 것인데, 투쟁하는 유대인에게는 이 두 가지 관점이 무시될 뿐 아니라, 그런 관점의 배제야말로 그들의 생활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독립된 국민경제의 유지가 아니라, 그 파멸을 바란다. 그들은 건전하고 용기있는 종족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하고 억압할 수 있는 어리석은 국민을 원한다.
대중의 통찰력이 오늘날과 같이 대단치 않고 국가도 무관심한 이상, 대중은 변함없이 맨 먼저 경제문제에 대해 극히 파렴치한 약속을 앞세우는 자를 따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은 거의 달인의 경지에 있다. 실제로 유대인은 국민에게 신의 은총이어야 할 노동조합을 통해 국가경제의 기초를 파괴하고, 동시에 정치적 조직화도 진행한다.
만일 우리가 독일이 붕괴된 모든 원인을 우리 자신의 시각으로 살펴본다면, 최후의 그리고 결정적인 원인으로 인종문제, 특히 유대인의 위험을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남을 것이다. 전쟁패배가 우리를 파멸시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쟁패배를 준비하고 있던 무력에 의해 파괴된 것이다. 그 힘은 수십 년 전부터 계획적으로 우리 민족에게서 정치적,도덕적 본능과 힘을 빼앗았는데, 오직 그것만이 민족생존을 가능케 하며 또한 권리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상의 모든 것은 개선되어야 한다. 패배는 후일 모든 승리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 순수한 피가 보존되어 있는 한, 모든 패전은 후일의 高揚의 원인이 되며, 모든 곤란은 인간의 힘의 원천이 되고, 모든 억압은 새로운 정신적 재건에 힘을 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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