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초기의 투쟁 ─ 연설의 중요성
1920년 2월 24일 열린 제1차 대집회에서 성공한 이후, 7일에 한 번 큰 대중집회를 열게 되었다. 우리는 항상 한 가지 불안에 시달렸다. 사람들이 많이 와서 우리의 말을 들어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당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전쟁책임에서 강화조약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선동의 목적에 부합되거나 이념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대부분 취급했다. 특히 강화조약에는 가장 큰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당시 베르사유 강화조약을 테마로 공개 대중집회를 연다는 것은 공화국에 대한 공격을 의미했다. 군중은 베르사유 조약이 치욕이자 굴욕이라는 것을, 사실 이 억지스러운 평화는 우리 민족의 처지로 볼 때는 전대미문의 약탈을 뜻한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도 않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이 가공할 파괴를 방지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당시 내게는 전쟁책임 문제가 밝혀져야 하고, 가능한 많은 대중에게 강화조약에 대한 지식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운동의 성공 전제였다. 대중들이 평화를 여전히 민주주의의 성과라고 보던 시절, 우리는 그에 저항해 사람들의 뇌리에 영원이 강화조약에 적대하는 자들로서 새겨야 했다. 이후 겉치레에서 혹독한 현실이 노골적인 증오를 드러냈을 때, 당시의 우리 태도가 상기되어 그들의 신뢰를 얻게 된 것이다.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은 여론의 감시자여서는 안 되고, 오히려 여론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대중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어야 했다.
당시 나는 짧은 기간에 중요한 사실을 배웠다. 즉 적의 수중에서 즉시 항변의 무기를 떨어뜨리게 하는 일이었다. 우리의 토론 상대인 연설자는 정해진 각본을 들고 나타났고, 각본에는 우리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되풀이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상대방의 선전이 훈련을 거쳤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선전을 단순히 무용지물로 했을 뿐 아니라, 드디어 선전의 주모자까지도 때려눕힐 방법을 찾아냈다.
어떤 연설 때에도 토론에 나올 것 같은 상대방의 반박내용이나 형식을 생각해 미리 분명히 정리해놓고, 그것을 다시 내 연설에서 재치있게 남김없이 물리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경우 예상되는 반박을 처음부터 제기해, 근거의 빈약함을 보여 주는 일이 효과적이다. 청중의 머릿속에 새겨진 의혹을 앞서 해결해 줄 때 쉽게 사로잡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세계대전의 참된 원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 베르사유 강화조약에 관한 강연을 가장 중대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그것을 수십 번이나 새로운 표현으로 거듭 강조했다. 그 결과 적어도 구 점에 관해서는 사람들 사이에 일정하고 명백한 통일적 견해가 퍼지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의 운동 최초의 당원을 얻었던 것이다.
그런 집회는 나 자신에게도 이로웠다. 나는 차츰 대중집회의 연사로 변해 갔던 것이다. 즉 수천 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회의장에 어울리는 호소력과 몸짓을 갖추게 된 것이다. 세계적으로 놀라운 모든 사건은 글로 씌어진 것이 아니라, 이야기된 내용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다.
부르주아적 지식계급은 이야기하는 내용에 의해 대중에게 영향을 주는 힘과 기술이 부족해, 항상 순수한 문필활동에만 열중하고, 연설에 의해 선동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포기하고 있다.
연설자는 주장하는 바를 대중이 어느 정도 이해하며 따라오는지, 또는 자기 말의 인상이나 효과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지 항상 표정으로 헤아릴 수 있으므로, 자기가 상대하고 있는 대중을 통해 계속 강연내용을 수정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필가는 독자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다.
강연이 행해지는 시간조차 효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내가 신출내기 시절 집회시간을 일요일 오전 10시로 정한 적이 있다. 결과는 참담했다. 홀은 꽉 찼지만 분위기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아무도 열중하지 않았다. 다른 때보다 연설을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같은 배역의 같은 연극을 오후 3시와 밤 8시에 관람할 경우, 사람들은 서로 다른 효과와 인상에 놀랄 것이다. 오후의 상연 인상이 밤의 인상만큼 크지 않음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영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는 중요하다. 극장에서는 배우가 오후에는 밤만큼 열심히 연기하지 아ㄶ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지만, 영화는 오후나 밤이나 똑같다.
인간의 의지력은 아침에는 자기와 다른 의도나 의견을 강요하려고 하는 시도에 대해 더할 수 없는 에너지로 저항하는 것 같다. 반면 밤에는 보다 강한 의지의 지배력에 더욱 쉽게 굴복한다. 그런 집회는 모두 분명히 두 종류의 대립하는 힘 사이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지배적인 使徒의 놀라운 웅변술은, 이미 가장 자연스럽게 저항력이 약화되어 있는 사람들을 정신적으로나 의지적으로나 완전히 긴장하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쉽게 새로운 의도에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카톨릭 교회는 신비로운 몽환상태, 타오르는 촛불, 香煙, 향로 따위를 같은 목적에 사용한다.
7장. 적색선전과의 투쟁
당시 나는 민주당,독일국가인민당,독일인민당,바이에른국민당 등의 집회에 나가 보았다. 이상하게 느낀 것은, 청중이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어김없이 그 당에 속한 자들 뿐이었다. 따분한 카드놀이 클럽과 비슷했다.
당시 우리의 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전술이 언제나 흔들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의지할 데도 없음을 보며 추격해 가는 것은 실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지지자들에게 우리 집회를 피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적으로 와서 우리 집회에 참가하는 자들이 늘었다. 우리 교설의 인상이 뚜렷했으므로, 그들의 지도자들은 차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국 그들은 테러로 저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계급의식에 눈뜬 프롤레타리아에게 일어나 우리 집회에 참석하라고 호소했다.
우리 집회장은 개회 45분 전 별안간 노동자로 가득 찼다. 그들은 화약통 같아서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반대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우리의 적으로 들어왔다가, 지지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들 교설의 정당성을 생각하며 사실상 비판적인 검토자가 되어 떠났다.
그러다가 나의 3시간에 걸친 강연 뒤 지지자나 적이나 차츰 하나의 열광적 대중으로 융합하게 되었다. 강제적으로 집회를 해산시키려고 하는 모든 신호는 소용없었다.
우리의 대회장에 입장할 때 "오늘은 결말을 짓고 말겠다!"라고 큰소리치는 자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두 마디도 하기 전에 벌써 회의장 입구에서 뻗어 버리고 만다.
1) 우리 경우는 이미 집회의 司會가 달랐다. 우리의 강연을 관대하게 봐 달라고 청하지도 않았고, 처음부터 장황한 토론을 보장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단호하게 집회의 지배자는 우리들이며, 따라서 우리가 가옥불가침권을 갖고 있으므로 감히 야유를 하거나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지체없이 쫓겨나리라는 것을 확실히 했다. 그리고 또 그런 자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어떤 책임도 거부해야 한다.
2) 우리는 대회장 곳곳에 엄격하게 조직된 경비(整理隊)를 세웠다. 정리대로서 원칙적으로 젊은이들로만 구성된 대회장 경비조직을 만들었다. 일부는 나의 군대 전우이며, 그 밖에는 새로 들어온 젊은 당원들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테러는 오직 테러에 의해서만 무찌를 수 있고, 또한 지상에서는 용기와 결단력이 있는 자가 항상 성과를 거두며, 우리는 매우 위대하고 숭고하며 강력한 이념을 위해 싸우므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바쳐 지킬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교육받아 온 자들이었다. 그들은 일단 이성이 입을 다물고 폭력이 마지막 결정을 내릴 경우에는 공격이 최고의 방어수단이며, 또한 우리의 정리대는 토론클럽이 아니라 끝까지 결연하게 싸우는 투쟁단체라는 평판을 무엇보다 앞에 내세워야 한다는 일관된 교육을 받아 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암호를 얼마나 동경했는가! 그들 종군세대는 부르주아적 무기력에 대해 얼마나 실망하고 분노했는가!
당시 내가 청년들에게 그들의 사명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또한 지상에서는 어떤 지식도 거기에 이바지하는 힘이 등장해 그것을 보호하고 방위하지 않는다면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며, 친절한 평화의 여신은 다만 전쟁의 신 곁에서 떠돌고, 평화의 대사업은 모두 힘의 비호와 원조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을 때, 그들이 눈을 빛내며 나를 본 것이 몇 번이었던가! 그것은 죽은 국가의 죽은 권위에 봉사하는 낡고 딱딱한 관리근성의 경화된 의미에서가 아니라, 개개인의 생명을 언제 어떤 장소에서나 항상 민족전체를 위해 바치려고 하는 의무를 생생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 청년들이 어떻게 싸웠던가! 그들은 말벌 떼처럼 집회의 방해자에게, 위세에 개의치 않고 달려들었다. 그들은 방해자가 아무리 강대해도 부상이나 유혈의 희생을 무릅쓰고 우리 운동의 거룩한 사명에 자유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위대한 사상으로 부풀어 있었다.
정리대 조직은 1920년 여름 이미 일정한 모양을 갖추엇다. 1921년 봄에는 차츰 百人隊로 편성되고, 그 자체가 다시 분대로 나뉘었다. 정리대는 긴급하게 필요했다. 집회활동이 계속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1920~1921년에 걸쳐 차츰 강력해져 가는 대중집회가 개최되고, 늘 같은 정경이 연출되었다. 즉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의 집회는 당시 이미 개회 전부터 초만원이어서, 경찰에 의해 해산되곤 했다.
정리대를 조직함으로써 우리는 심벌이 없다는 것이 불리했을 뿐 아니라, 장래를 위해서도 좋지 않음을 분명히 인식했다. 무엇보다도 당원에게 같은 당에 속해 있다는 외적 표시가 전혀 없다는 것이 불리했으나, 국제적 旗章에 대항할 만한 마지가 없다는 것은 장래를 위해 간과할 수 없었다.
심벌이 심리적으로 어떤 의의가 있는지, 나는 청년시절에 몇 번이나 인식하고, 또 감정적으로 이해할 기회를 가졌다. 세계대전 후 나는 베를린에서 왕궁과 루스트가르텐 앞에서 마르크시즘의 대중시위를 체험했다. 赤旗, 붉은 완장, 붉은 꽃의 大海가, 아마 12만 명이나 참가한 듯한 그 시위에 순수하게 외면적만으로도 강력한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같은 웅대하게 활동하는 광경에서 이루어지는 암시적 마력에 민중들이 얼마나 쉽게 굴복해 버리는지를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20년까지는 사실상 마르크시즘에 대항하고 그들과 세계관에서 상반되는 대립을 구상화하는 깃발은 없었다. 부르주아지는 정당정치에 있어서 보통 어떤 세계관도 지지하지 않고, 또 대표하지도 않았기에, 자기들만의 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심벌 문제에 몹시 고심했다. 새로운 깃발은 우리의 독자적인 투쟁의 심벌이어야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 포스터와 같은 효과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효과가 큰 記章은 상당히 많은 경우 어떤 운동에 대한 관심에 최초의 자극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백색은 자극적인 색깔이 아니다. 그것은 순결한 처녀단체에는 어울리지만, 혁명기의 혁신운동에는 부적합하다. 흑색은 현대적이지만 우리 운동의 지와 표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여러모로 시도해보고 마지막 모양을 그렸다. 붉은 바탕에 흰 원을 남기고, 중앙에 검은 하켄크로이츠를 그린 깃발이다. 하켄크로이츠는 게르만인이 청동시대부터 사용한 행운의 심벌이다.
정리대를 위한 완장도 곧 도안되었다. 당원장도 같은 기준에 따라 고안되었다. 1920년 한여름에 대중 앞에 새로운 깃발이 등장했다. 우리 운동에 멋지게 들어맞았다. 운동이 젊고 새로웠듯 깃발 또한 젊고 새로웠다. 이전에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그것은 마치 점화용 횃불 같은 효과가 있었다. 충성스런 여자 당원이 최초로 도안을 완성해 깃발을 인도했을 때, 우리 모두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더욱 확대해가는 정리대는 특히 운동의 새로운 심벌을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심벌의 독특한 색깔은 일찍이 독일민족을 위해 수많은 영예를 얻은 것으로서 우리에게 과거에 대한 찬미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우리 운동의 의도를 가장 훌륭하게 구체화한 것이었다. 우리는 국가사회주의자로서 우리 깃발 속에서 우리의 강령을 본다. 우리는 붉은 색 속에서 운동의 사회적 사상을, 흰색 속에서 국가주의적 사상을, 하켄크로이츠 속에서 아리아 인종의 승리를 위한 투쟁의 사명을, 그와 함께 그 자체가 영원한 반유대주의자였고, 또한 반유대주의적일 창조적인 활동 사상의 승리를 본다.
1920년 확대된 집회활동은 마침내 매주 2회씩 열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포스터는 사람들이 몰려들게 안내했고, 언제나 강당이 가득 찼다.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다가올 자유독일의 투사가 되기 위해 민족공동체로 돌아오는 길을 찾았다. 뮌헨의 대중은 우리를 알게 되었다. 1921년 겨울 우리는 벌서 뮌헨에서 강력한 당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1921년 2월 3일 목요일에 튀르크스 크로네를 빌렸다. 거대한 대회장이었고, 대단한 모험이었다. 강제해산 패거리들과 마주해 실패할 경우에는 우리가 매우 오랫동안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한 번이라도 강제해산을 당하면 우리의 후광은 일격으로 파괴되고, 상대방은 성공한 일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둘러 짤막한 포스터 문구를 구술해 오후에는 배포하기 위해 인쇄했다. 두 대의 트럭을 빌려 붉은 색으로 뒤덮었고, 우리의 깃발을 두 개 세우고, 트럭에 각각 15~20명의 당원이 탔다. 힘껏 달리며 포스터를 뿌렸다. 오늘 밤의 대중시위운동을 선전했다. 부르주아들은 붉은 색으로 꾸민 채 하켄크로이츠기를 펄럭이는 차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교외에서는 무수한 주먹이 휘둘러졌다.
대규모 집회는 대성공이었다. 5천 6백 장의 입장권이 팔렸고, 실업자와 고학생 및 우리 정리대까지 포함해 6천 5백 명이 모였던 것이다. 집회 주제는 '미래냐, 몰락이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미래가 바로 나의 눈앞에 있음을 확신하고 가슴이 설레었다. 두 시간 반 가량 연설했다. 처음 반 시간 후 집회가 대성공을 거두리라는 느낌을 가졌다. 몇천 명과의 개개인과 접촉이 이루어졌다. 한 시간 후부터는 박수가 자발적으로 터질 듯이 커져서 내 연설을 중단시키더니, 두 시간 뒤에는 다시 흥분이 가라앉았다. 생생히 새겨질 저 엄숙한 고요함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연설을 마쳤을 때, 갑자기 떠들썩해지더니 더할 수 없는 열정으로 '도이칠란트의 노래'를 부름으로써 집회는 살아난 듯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평범한 보통 정당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우리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집회성공이 단순히 아지랑이에 불과할 뿐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우리는 즉시 제2회 시위대회를 다음주로 정했다. 이번에도 역시 성공이었다. 다음주에 같은 형식으로 제3회 집회를 열었고, 거대한 튀르크스 크로네가 콩나물시루와 같았다.
그같은 성공은 우리의 적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21년 11월 4일 저녁 집회에 적색분자들이 다수의 노동자 대중을 보낼 계획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했다. "아마 오늘 처음으로 목숨을 걸고 운동에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죽어서 들려 나오지 않는 한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강당을 떠나서는 안 된다. 나도 강당에 남을 작정이며, 이중 누구도 나를 혼자 버려 두고 떠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만일 한 사람이라도 비겁한 행동을 할 경우, 나는 손수 그의 완장을 떼어 버리고 당원증도 빼앗아 버릴 것이다... 강제해산의 기미가 약간이라도 보이거든 즉시 전진할 것이며, 공격이야말로 최선의 방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고 말했다. 하일 삼창이 대답이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강당에 들어가 실제 내 눈으로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집회는 열렸다. 나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야유가 터졌다. 갑자기 한 남자가 의자 위에 올라 외쳤다. "자유다!" 그것을 신호로 전투가 개시되었다. 몇 초 사이에 회장 전체가 떠들고 절규하는 사람의 무리로 꽉 찼다. 수많은 맥주조끼가 포탄처럼 날았다. 난투극이 벌어지자마자 재빨리 나의 돌격대원은 공격해 들어갔다. 그들은 늑대처럼 8~11명씩 떼를 지어 적들 가운데로 돌진해 갔다. 적들을 차츰 강당에서 쫓아냈다. 5분이 지나자 그들 중 피투성이가 되지 않은 자를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 비로소 내가 진실로 알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선두에 나의 용감한 마류스, 오늘의 내 개인비서 헤스, 그 밖의 많은 사람이 이미 중상을 입었으면서도 두 발로 설 수 있는 한 몇 번이고 적을 공격했다.
대소동은 20분 동안 계속되었다. 700~800명은 족히 될 적이 50명도 채 안 되는 우리 쪽 사람들에 의해 대부분 강당에서 들려 나가고 계단에서 쫓겨났다. 다만 강당 왼쪽 구석에 아직 큰 무리가 버티고 선 채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갑자기 강당입구에서 연단을 향해 두 발의 피스톨이 발사되더니, 연이어 난사가 시작되었다. 누가 쏘았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 순간부터 피투성이가 된 우리 젊은이들의 분노가 한층 격렬해져서 드디어 최후의 방해자까지 압도해 강당에서 쫓아냈다.
우리의 지지자 대부분은 바로 붕대를 감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은 차에 실려 가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 자리의 지배자였다. 집회의 사회를 맡았던 헤르만 에서가 선언했다. "집회는 계속 됩니다. 보고자가 발언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집회에서의 싸움 이후, 정리대는 당시 얼마 안 되는 인원으로 감행한 영웅적인 돌격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돌격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1921년 말 독일에 불합리한 1천억 금마르크의 지불의무를 지운 파리협정이 런던협약이란 형태로 실현되게 되었다. ☞ 런던회의에서 독일에 할당된 배상금액을 1,320억 마르크로 결정함. 독일경제는 붕괴 직전에 달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함.
Sieg He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