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잇키는 1883년 니가타현 사도 섬에서 태어났어.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와 동갑이지. 1868년 천황 신정부가 에도 막부와 격돌한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가 승리하고, 봉건시기가 끝나 개혁의 물길이 치솟았어. 자유민권운동도 그 중 하나의 조류였지. 자유민권운동은 70년대 입헌 정치와 민주주의를 요구한 사회운동이야. 자유민권운동은 89년 헌법공포와 청일전쟁의 여파로, 소위 말하는 큰정부가 대두되어 사그라들기 시작했어. 하지만 자유민권운동의 여파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였지. 자유민권운동에 가담하였던 기타 잇키의 아버지와 숙부들처럼 말이야. 기타 잇키는 사도 섬에서 자랐어. 사도 섬은 일본의 봉건시대 역사에서 유배지로 유명해. 지금도 '작은 일본'이라 불릴 정도로 내지와는 다른, 섬의 고유한 문화를 형성해 왔어. 기타가 천황중심적 만세일계에 비판적이였던 건 섬의 문화도 한몫했을 것이야. 10대 말기부터 대중매체를 통해 섬 밖의 개혁의 조류를 접하고, 22세 상경하여 와세다 대학의 청강생으로 6개월 간 공부했던 기타는 사회주의 사상을 비롯한 국가주의, 자유주의, 낭만주의 등등의 각종 사상 세계를 접하게 되지. 그가 집중적으로 비판했던 건 국체론이였어. 국체론은 천황가 전설에 기인한 존황 복고주의 운동이라고 볼수 있어. 절대적인 천황을 기치로 만세일계를 세우자는 주장이였지. 그는 천황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어. 오히려 그의 세계관에서는 천황도 한 역할을 했지. 그는 국가사회주의(라살레)자이자 원류 파시스트야. 사회주의에 매료됬지만 동시에 국가주의에도 매료되었지. 국가체제를 부정하는 일반의 사회주의자들을 동시에 비판했어. 그는 그의 사상을 '순정사회주의'로 이름지었어. 순정사회주의의 원리는 일반 사회주의와 다르지 않아. 단, 그 방식에는 국가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지. 국가간의 전쟁, 제국주의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나라만이 세계 연방을 세울 수 있어. 이 때의 발전단계는 소아(개인), 대아(국가), 무아(국제 연방)이고, 사회진화론적 방안을 채용했지. 쉽게 말해서 소아는 대아 안에서 발현되고, 그 대아가 충돌하여 무아를 이루어야 한다는 소리야. 이 내용이 담긴 책이 바로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지. 순정사회주의 세계관에서도 천황은 있어. 단, 모든 주권의 결정체가 아닌 헌법 기관 수준에 그쳤지. 대아의 아래에 있다는 소리야. 국가가 천황의 소유물 따위가 절대 아니란 것이지. 오히려 천황은 국가를 위해 봉사자가 되어야 해. 이것이 바로 천황주권의 이름 아래 온갖 부를 누리며 신민을 착취하던 타락한 자본가들과 정치인에 대한 응징 명분이 되는 것이야. 다시 말해, 천황이 혁명의 정신적 기치로 작용하는 것이지. 국가를 위한 혁명 말이야. 이런 쇼킹한 사상은 당연히 탄압받았겠지?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는 정부로부터 발매 금지가 되고, 그는 중국 혁명에 눈을 돌려 쑨원과 쑹자오런 같은 중국 혁명가들에게 접근했어. 중국이 '동양적 군주정'의 완벽한 모델로써 일본의 든든한 반서양 우방국이 될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좌절했어. 5.4운동으로 인하여 중국에서 반일 기조가 더욱 커졌기 때문이지. 돌아온 기타는 국가개조론자가 되었어. 혁명을 일으키고, 천황의 이름을 빌려 계엄을 선포한 다음 개혁을 추진하길 원했지. 내부적으로는 화족제 폐지, 보통선거, 사유재산 제한, 생산수단 국유화, 노동권 향상, 인권의 확립 등을 기치로 세우면서, 외적으로는 아시아 통합의 기치를 부르짖는 거야. 그럼 혁명을 일으키는 주체는 누굴까? 바로 일본의 청년 장교들이였어. 군 관료중에서도 실무 계급 말이야. 더욱 급진적이고도 현 체제에 염세적이며 실력까지 겸비한 자들이지. 기타는 그런 자들을 원했어. 청년 장교들도 기타의 개혁에 심정적으로 동조하였고, 36년 2월 그들은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 대대적인 쿠테타를 일으켰지. 2.26 사건이야. 하지만 2.26사건은 군사 원로 몇몇이 죽는 것에 그쳤어. 무엇보다 쇼와 천황이 이 행위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천황은 그들에게 해산을 명했어. 게다가 쿠테타 장교들은 기타의 말을 왜곡하고 있었어. 그들은 소위 '황도파'라고 불리고 있었던, 복고적인 천황주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이였지. 이런 사람들이 천황의 말을 무시할 수 있었을까? 결국 2.26 사건은 진압되었고, 기타는 이들에게 사상적 명분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총살형에 처해졌지. 황도파도 예외는 아니였어. 황도파는 숙청을 당해 정계에서 밀려났고, 이후 반 황도파 파벌이였던 '통제파'가 군의 실권을 장악하였지. 도조 히데키 알지? 통제파 군부출신 총리 말이야. 오늘날 와서는 기타가 극우 파시스트로 매도되는 느낌이 없지않아 싶어 이야기를 해보는데, 천황기관설은 그때 당시 일본에서 하나님 없는 기독교와 같은 쇼킹 그 자체적인 급진사상이였어. 세상에 어느 일본 극우가 천황을 국가의 봉사자로 매도해? 여담으로, 2.26 사건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 정신적 기치는 그대로 군 내부에 녹아내렸어. 특히나 2.26사건 여파로 좌천된 일본 군인들이 만주에서 복무함에 따라, 이들을 중심으로 '만주인맥'이 형성되었지. 주만 일본군이나 만주군들이 이 사상적 조류를 어느정도 느끼고 동조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만주군에서 복무한 박정희가 5․16 쿠데타 직전 “2․26 사건 때 일본의 젊은 우국 군인들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궐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어나 확 뒤집어엎어야 할 것이 아닌가?” 라고 말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2.26사건이 단순히 실패한 쿠테타라고 보기에는 너무 어불성설일거 같아.
출처: 나치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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