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를 쌓는 것보다 지키는게 어렵다
2024/04/17 미분류
한국 현대사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 중 하나가 있다면은, 815나 한국전쟁도 있지만은 70년대의 핵무기 개발 사업을 중요하게 봅니다. 왜 그러냐면은, 한국이 핵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단순히 국방상 북한을 압도하느냐, 마느냐 하는 차원을 넘어서, 서방으로부터 축적한 자본을 방어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서방세계, 특히 금융가들은 국가의 부를 빼먹는데 있어서 일정한 패턴을 보여왔읍니다. 일단은 국가주도 하에 대기업을 성장시켜 경제개발을 성취하게 하고, 경제개발이 성취된 연후에는 시장개방압력을 넣어 경제자유화, 금융자유화를 시키고, 그렇게 해서 국민이 피땀흘려 만들어낸 기업들을 서구의 소수 금융가의 손에 집중시키는 전략입니다. 역사적으로 볼때 독일 나치스의 경제부흥도 그렇고 이태리 팟시스트의 경제부흥도 그러한 수순을 따라갔읍니다. 물론 힛트러나 뭇소리니가 무슨 금융가의 지령을 받아서 경제개발을 했다는게 아니라, 패전의 결과로 죽쒀서 개를 준 꼴이되었든 것입니다.
금융가들에게는 조국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활동기반으로 삼는 아메리카조차도 이들에게는 착취의 대상이 될 뿐이었읍니다. 얼마전에 대화를 나누다 미국의 뉴딜정책에 대한 얘기가 나왔었는데, 뉴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치스는 뉴딜정책을 보고서 루즈벨트가 대공황을 극복한 방법은 옳았으나 금융세력을 손보지 못한것은 착오이다, 이렇게 말했다는데, 루즈벨트가 그걸 몰라서 금융세력을 건들지 않았겠읍니까? 애초에 금융세력에게 나라를 갖다 바치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도 은행가들을 건들지는 않았든 것입니다.
여하간 이러한 력사를 상기해 본다면은, 우리 한국의 현대사도 명쾌하게 설명이 되지요. 어떤 사람들은 전두환 정권 시대에 한국사회가 급성장해서 잘먹고 잘살았으니 좋았다, 이후에 나타난 민주정부가 일을 잘못해서 나라를 망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역사를 전체로서 보지 않고 일회적인 사건들에만 매달리니 이런 헛소리를 해대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을 전개한 정권이 김대중 시대였읍니까, 뭐 노무현 시대였읍니까? 유신 말기, 특히 신군부 집권 이후로 차근차근 준비해 왔던 것이지요. 겉보기 진보냐, 보수냐 이런 것만 생각하면 한국사회의 일관된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박정희가 이런 큰 구상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것은 모르겠읍니다만은, 적어도 대한민국의 역대 정권들 중에서는 가장 주권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것만은 사실로보입니다. 핵개발도 단순히 대북관계에서의 우위라는 표면적인 의도를 넘어서, 미국놈들을 믿지 못하겠으니 우리식대로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보아야 될 것입니다. 미국은 핵개발이 성공하면 첫째로는 한국시장에서 미국 군산복합체의 지속적인 이익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동아지아에서 힘의 균형이 어그러져 미국의 안정적 동북아정책에 위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고, 셋째로는 한국의 주권이 시장개방과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걸림될이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를 저지했다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김대중이는 이당시에 박현채의 대중경제론을 가지고 나와서, 박정희가 종속경제, 식민지적 경제운영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는데, 박정희 시대 경제개발은 상공부나 경제기획원, 그도 아니면 박정희 개인이 결단해서 한 것이지, 무슨 미국이 시켜서 한것이 아닙니다. 박정희정권시기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 혹은 반(半) 식민지에 처해있었는데, 무슨 무기국산화를 하고 핵개발을 할 수 있었겠읍니까?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자립경제가 이상향은 아니지만, 적어도 70년대에 이르러 한국의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던 리승만시대에 비하면 상당한 수준의 자립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될 것입니다.
이것이 전두환시대를 거쳐 김영삼에 이르러서 OECD에 가입한다는 둥 말같잖은 명분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한국의 자본이 점점 서구 금융가들의 손아귀에 묶여버린 것이지요. 내가 민주화 했다는 것들 같잖게 보는게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힛트러도 뭇소리니도 결정적인 국면에 미국의 도전에서 패해서 금융가들에게 나라를 가져다 줄 수 밖에 없었는데, 만일 박정희의 핵개발 시도가 성공했다면은,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줄달음하는 한국의 흐름을 저지하거나 적어도 지연시킬 수는 있었을 것이라 봅니다.
민주화는 산업화의 결과물을 착취하는 것
2023/11/07 미분류
얼마전에 류시민이가 티비에 나와서, 요즘 리돼남들은 문제가 있어도 항의하거나 저항하지 못하고 불평불만만 한다, 이러면서 헛소리를 하더군요 류시민이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읍니다만, 사회 현안에 냉소주의로 일관하는 것만큼이나,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식하게 사회를 바꾸겠다고 불길에 뛰어드는 청년다운 열정도 경계해야 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류시민이를 비롯한 소위 586세대, 민주화를 주도한 노인네들이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력사를 보게 되면 특정 시대에 주술적인 힘을 가진 단어들이 전면에 부상하는 것을 보게되는데, 70~80년대에 대중을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민주주의니 민주화니 하는 것이었읍니다. 사람들은 이 마법의 주문만 달달 외우고, 이 주문이 시키는대로만 하면 이상적인 락원이 올 것이라고, 아무런 의심도 판단도 하지 않고 이 길을 따라 온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장점이라는 비판과 회의라는 대명제는, 적어도 민주주의의 절대성이라는 대전제 아래서만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서구는 어떠한 역사적 경험의 축적 속에서 민주주의가 필요했으며 어떻게 그것을 이루었고 그 결과 어떤 모양새가 되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미국문화를 타고 들어온 서구세계의 아름다운 겉모양만 믿고 따랐을 뿐이었읍니다. 미국화에 반대한다는 소위 좌경세력들도 력사관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읍니다. 이들 또한 변증법 운운하는 사관에 의해 민주화가 되고 사회가 한번 파탄이 나야지 사회주의가 온다는 믿음을 고수하였고 야당의 뿔죠아 리버럴세력과 신성동맹을 체결한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 눈으로, 자기 머리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한다는 서구 계몽주의의 비판적 사고란 이들에게 없었읍니다. 다만 서구에서 들어오는 각종 유행식 조류들 중에서 미국의 것을 취할 것이냐 소련의 것을 취할 것이냐 하는 생각만 했던 것입니다. 나름대로 주체의식을 가졌다는 자들도, 북괴의 이론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했지,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려하지는 못했읍니다. 그저 청년다운 순진한 반항의식에 최면이 걸려 조국과 민족을 씹창내 놓은 것이 이들의 인생이었읍니다. 그 결과가 이른바 87체제로, 그들이 꿈에 그리던 민주화가 찾아온 해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이 사태를 아주 감상적인 자유의 순간으로 낭만적으로 묘사하는데,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입만 벌리면 떠들던 민주화가 오고나서 이루어진 것이 무엇이 있읍니까?
자유가 왔읍니까, 평등한 세상이 왔읍니까? 자유란 껍데기 뿐이요, 그저 기업에 의해 조작된 소비의 자유, 욕망의 노예화만을 불러왔을 따름이요, 인간의 물질에 대한 종속 속물근성만을 심화시켜왔을 뿐입니다. 언론이니 미디어는 언론의 자유라는 명분 아래 추잡한 신변잡기식 보도, 선정적 보도만을 일삼아 국민대중의 눈과 귀를 가리거나, 소수 엘리트가 주도하는 서구 미디어의 보도만을 무비판적으로 받아쓰기식 정보전달에 일관할 뿐입니다. 정계에서는 진실로 국가 민족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사회적 모순의 본질에는 눈을 돌리고 정쟁을 위한 정쟁, 토론을 위한 토론, 득표를 위한 근시안적 투쟁에 여념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게 어디 한국에서 처음 일어난 일이라면 민주주의의 실험은 취지는 좋았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고 이해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들은 이미 60년대부터 영미불을 비롯한 선진제국에서는 이미 일상화된 현상이며, 소위 민주화 운동가들이 자신의 리념에 대해 조금만 더 냉정한 시각을 견지했더라면 막을 수도 있었던 일들입니다. 그런 모순에는 눈을 가리고 선진제국의 프로파간다에 심취해, 서구의 력사가들 사상가들의 허구에 가득찬 력사소설만 읽고서 사회운동을 벌이니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입니다.
세계 다른 나라들을 보아도 그렇지만, 민주화란 다른게 아니라 산업화해서 이룬 부를 소수 특권층이 빼먹는 과정에 다름 아닙니다. 카리스마적 군주적 지도자가 나타나 강력한 통제정책으로 국가의 부를 증대시켜 놓으면,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통제시스템을 해체시켜 기생충들이 그 부를 다 파먹어 병신국가로 만들어놓을때 쓰는 카드가 민주화인 것입니다. 이는 서구에 있어서도 프랑스혁명이니 명예혁명이니 바이마르혁명이니 이런 유사 혁명과정을 통해 이미 밝혀진 자명한 것입니다. 그와 똑같은 일이 한국에서도 벌어졌던 것이고, 그 결정적 분기점이 87년이다 - 이렇게 볼 수 있읍니다. (물론 그 전 정부가 멀쩡했다면 87체제도 오지 않았겠지요. 우하하) 저번 글에 IMF다, FTA다 이런게 민주화에 따른 필연이라 말했는데 같은 맥락입니다. 민주화의 민은 대다수 대중이 아니라 대중의 얼굴을 가장한 익명의 특권층이라는 것을 정작 민주화운동가들은 몰랐던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 하나 국가주권을 팔아넘길 비옥한 토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걸 아직도 모르는 류시민 같은 잡것들이 설치니 나라에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류시민같은 자들이야 기득권에 봉사하면서 한자리라도 챙겼으니 내 인생은 성공했다, 이렇게 자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자와 그 자의 친구들이 낳은 사생아인 리돼남 리돼녀들의 미래는 참으로 비참하기 이를데 없읍니다. 염치가 있다면 하루빨리 관짝에 들어가 자식세대의 부양의 의무를 덜어주는 것이 이 민주화 세대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역사적 사명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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