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유물론적 대상, 객관성을 가진 개체로 분석해 객관적 관념론을 주장했다. 이것이 쇼펜하우어 철학이 가진 사실상 거의 유일한 문제점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지, 또는 욕망은 주체가 직접 생성해낸 주관적 대상의 의미를 가진다. 자아라는 존재에 대한 고정된 인식이 주체의 역할을 수행해 의지를 가지게 되며 지성이라는 성질이 그것을 표상시켜 인식하도록 만든다.
의지란 고정된 존재인식의 욕망이다.
댓글 3
쇼펜하우어도 객관을 아예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겠지. 솔직히 객관이 이토록 편리하건만 어찌 포기하는가? 이미 메타적으로 접근하느라 전적인 실재론 또는 유물론까지 포기해놓고, 관념에 있어서까지 일체의 객관을 포기한다는 것은, 조악한 비유겠으나 진심으로 고통을 포기하고 선악을 포기하고 자유의지를 포기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이론상, 형식적으로 그리 선언한다 한들 그것에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가? 이러니 실제가 어떻든 간에 차라리 물리주의를 미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Gnostic(gnostic)2023-03-13 18:11:00
답글
객관적 관념론도 어떤 면에서 보면 이토록 편리한 주관을 포기하는 것으로 귀결됨. 좋은 예시가 사변적 실재론. 객관과 주관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함.
칸트적 입장에서 보면 나도 객관을 완전히 포기하는건 아니고.
정신병걸린원숭이(jehoshvahtheatheist)2023-03-13 18:21:00
답글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이래서 내가 메타적 접근을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역설을 맞닥뜨리고 마니. 너는 이미 미친 자들을 보고서도 미칠까봐 무섭지도 않은가. 미치는 식으로, 치매식으로 변질되는 게 꼭 나쁜 건지도 알 수 없고 인간이란 게 이미 허상에 집착하는 미친 원숭이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다... 지금도 나도 모르게 또 삼천포에 빠질 뻔했다. 어차피 주관 객관 개념을 실질적으로 실천적으로 포기하기 어렵다면, 찜찜하더라도 그냥 보류하다가 제 명에 죽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쇼펜하우어도 객관을 아예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겠지. 솔직히 객관이 이토록 편리하건만 어찌 포기하는가? 이미 메타적으로 접근하느라 전적인 실재론 또는 유물론까지 포기해놓고, 관념에 있어서까지 일체의 객관을 포기한다는 것은, 조악한 비유겠으나 진심으로 고통을 포기하고 선악을 포기하고 자유의지를 포기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이론상, 형식적으로 그리 선언한다 한들 그것에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가? 이러니 실제가 어떻든 간에 차라리 물리주의를 미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객관적 관념론도 어떤 면에서 보면 이토록 편리한 주관을 포기하는 것으로 귀결됨. 좋은 예시가 사변적 실재론. 객관과 주관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함. 칸트적 입장에서 보면 나도 객관을 완전히 포기하는건 아니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이래서 내가 메타적 접근을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역설을 맞닥뜨리고 마니. 너는 이미 미친 자들을 보고서도 미칠까봐 무섭지도 않은가. 미치는 식으로, 치매식으로 변질되는 게 꼭 나쁜 건지도 알 수 없고 인간이란 게 이미 허상에 집착하는 미친 원숭이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다... 지금도 나도 모르게 또 삼천포에 빠질 뻔했다. 어차피 주관 객관 개념을 실질적으로 실천적으로 포기하기 어렵다면, 찜찜하더라도 그냥 보류하다가 제 명에 죽는 것이 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