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어미는 죽었다."


"..."


세상에 이런 뭣 같은 상황이 또 있나.


슬슬 식량이 떨어져가는 참이라 수색을 나온 참에, 광신도와 맞닥드려 그대로 잡혀버리다니.


아무도 오지 않는 어두운 폐건물 지하, 도와줄 사람은 없다. 손발이 묶여있어서 저항도 불가능하다.


'시발...'


나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광신도가 입을 열었다.


"물론, 나도 어미를 잃었지."


"뭐 새삼스러운 일이라고 굳이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세상이 방사능에 절여지고 나서 꼬박 반세기가 지났다, 그동안 가족 모두가 무사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신기한 일이다.


-까앙!


광신도는 들고 있던 방망이로 바닥을 내리쳤다.


"......"


내가 숨을 삼키는 사이, 놈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구는 죽었다. 모든 숨 붙은 것들의 어머니를 잃었으니, 우린 고아다."


나는 고개를 들어 광신도를 바라보았다.


중절모, 사제복, 가죽구두... 고풍스러운 옷차림을 몽땅 검은색으로 물들인, 빼빼 마른 남자였다.


내가 듣고 있는건지 아닌지는 신경도 쓰지 않는걸까, 놈을 입을 멈추지 않았다.


"우린 너무 어리석었어. 하늘을 날고, 버튼 하나로 수백만 명을 죽이는, 상상도 못 할 엄청난 기계들을 만들어냈지."


나는 놈이 얘기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묶인 손으로 바닥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그래서 결과는? 창세 이래로 지금 같은 시대가 있었나?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숨 쉴때 방독면 필터가 필요한 시대가? 우린 잊어버렸던 거야."


그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마저 입을 열었다.


"아무리 대단한 도구들을 끼고 기세등등해 봐야,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이라는 걸 말이야. 다른 모든 짐승처럼 말이지."


"딴소리하지 말고, 핵심만 말해라."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아마 돌조각 비슷한 것이겠지.


나는 그것을 쥐고서 밧줄에 대고 힘껏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젠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저 광신도의 말에 어울려줘야 했다.


"본론? 처음에 말했잖나, 우린 모두 고아라고."


광신도가 어이없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우리의 먼 조상이 바다를 헤엄쳐 다닐 때부터 우리를 키워주신 어머니...가이아를 망쳐버렸지. 우리가 죽인 거야."


'에코 파시스트였나.'


이런 족속들이야 흔했다. 인류가 지구를 망쳤다. 그러니 인간은 죽어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을 납치해 죽이는 놈들. 살아남으려면, 빨리 밧줄을 풀고 탈출해야 했다.


돌조각을 잡은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지구에 속죄하기 위해 날 죽이시겠다? 지구가 좋아할 게 벌써 눈에 선하군."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속죄란 말인가, 내가 보기엔 그건 그냥 눈 돌리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광신도...로 보이는 남자의 대답이 나를 놀라게 했다.


"아니, 난 널 죽이지 않을 거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이나 그런 걸 속죄라고 하겠지."


"..."


눈 앞의 광신도가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아니, 애초에 저런 말을 하는 광신도가 있을까. 애초에 방금 날 죽일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


돌조각을 잡은 손이 느슨해졌다.


"그럼...왜 날 납치했지?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나?"


"원한은 없다. 대신 제안이 있지."


"제안?"


말을 마친 남자가 안주머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남자는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나에게 보여줬다.


"이게 뭔지 알겠나?"


"...일단은."


"실제로 본 적은 있고?"


"...설마."


설마, 애당초 이제 와선 아무도 이런 걸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이런 말을 하는 나도, 포장지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본 게 전부니까.


남자가 내민 것은 새빨갛고, 둥글고, 표면은 왁스라도 바른 듯 반질거리는 과일. 사과였다.


"세상에..."


무심코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정신을 차린 뒤에도 좀처럼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어디서 구했나, 왜 이걸 내게 보여주는 건가,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았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어 남자에게 말했다.


"...모조품인가?"


내 말이 웃겼는지, 남자는 배를 잡고 한참을 웃고선 말했다.


"아니."


"아..."


나는 남자의 손에 들린 사과에서 차마 눈을 떼지 못했다.


"먹어 볼 텐가?"


남자가 말했다.


"어."


나는 남자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대답했다.


"하하하! 어지간히 먹고 싶었나 보군, 자."


나는 남자가 내민 사과를 향해 목을 뻗었다.


혀가 매끈한 껍질에 닿을 때쯤, 나는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


한동안 나도, 남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으적으적 사과를 씹어먹는 소리만이 지하를 울렸다.


나는 입안의 사과를 수십번도 더 씹으며 맛을 본 뒤에야 삼켰다.


"맛있는데."


"그렇지."


"과일 통조림이랑은 차원이 다르군."


"아무렴."


짧은 몇 마디 대화가 오갔다.


"더 먹고 싶어지는 맛이구만."


진심이었다. 저 사과 하나에 내가 가진 통조림을 전부 갖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겠지, 자."


-툭.


남자가 내 앞에 작은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내가 이게 뭐냐는 의문을 담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그는 웃음기 섞인 말투로 말했다.


"사과나무 씨앗."


"지금 장난하나?"


씨앗이라니? 이게 총을 원하는 사람에게 쇳덩이를 주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난 처음부터 진지했다만."


그는 뭐가 이상하냐는 듯 말했다.


"먹고 싶으면, 자네가 길러서 먹는 게 상책 아닌가, 매년 수확할 수도 있고...남의 수확물을 얻어먹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


우습게도, 날 납치한 이 괴상한 남자에게 한 방 먹여줄 말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건 그렇고 수확물이라니? 방금 내가 먹은 사과를 자기가 직접 키웠다는 건가? 진심으로?


"이게 내가 자네를 여기 데려온 이유라네."


"나보고 과일밭 일구라고..."


"과수원."


그가 단어를 정정했다.


"...과수원 일구라고 권유하는 게?"


"음...어느 정도는?"


"이런 미친새..."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하나?"


약삭빠른 남자는 내가 뭐라 따지기도 전에 선수를 치고 말했다.


"뭐?"


"지구가 죽었다는 얘기, 못 들은 건가?"


"아까 전 인류를 고아로 만든 패드립 말이로군, 똑똑히 들었지. 그래서 뭐?"


"다시 살려보자는 말이네."


남자의 뜬금없는 말에 머리가 아파져 왔다. 대체 지구를 구하는 것과 사과가 무슨 상관이며, 상관이 있다고 해도 둘이서 뭘 어쩔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내 생각을 다 꿰뚫고 있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아무리 지상에 방사능이 심하다지만, 수십 년만 더 지나면 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걸세, 더티 밤에서 뿜어져 나오는 방사능도 결국은 반감기가 오게 돼 있거든."


남자는 내가 먹었던 사과를 아삭, 하고 베어 물고는 마저 말했다.


"하지만 그걸로 능사가 아니지, 지구를 살리려면 결국은 붕괴된 생태계를 되살려야 하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


"..."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인류가 대대손손 먹을 만큼의 통조림을 가지고 있었다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못하지. 결국 언젠가는 자연에서 살아갈 자원을 얻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음?"


"생태계를 복구시켜야 하니까 나보고 나무를 심으라는 거 아니야, 겸사겸사 과일도 따 먹고."


"굉장히 축약시키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네."


"허..."


헛웃음이 다 나왔다.


"그럼, 난 그냥 보내주는 건가?"


"당연하지, 죽은 사람이 나무를 어떻게 심나?"


그는 아예 내 뒤로 돌아가 나를 묶은 밧줄을 풀어주었다.


밧줄이 반쯤 잘려있는 걸 봤으니 내가 탈출을 시도했던 걸 알았을 텐데, 그는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았다.


"자, 일어나게."


"...끙, 차."


뻔뻔하긴.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키우는 방법은 주머니 안에 든 쪽지를 확인하고, 알고 있겠지만 방사능 수치가 높은 곳에서는..."


"하나만 묻자."


나는 그의 말을 자르고서 말했다.


"만약 내가 이 일을 없던 셈 치고 넘어가면 어쩌려고 그러지? 그럼 네 장대한 계획도 다 헛수고잖나."


"..."


"내가 이 씨앗을 팔아서 그냥 과일주스 한 캔 사 먹는데 보탤 수도 있는거 아닌가?"


"흠, 일리 있군."


"애초에 이런 식으로..."


"하지만 난 확신한다네, 자넨 이 씨앗을 심게 될 거야."


남자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성경에 나와있기를, 아담과 하와는 세상 모든 걸 가지고 있었지, 단 한 가지 빼고."


"한가지...?"


"바로 선악과. 에덴동산에서 지고의 행복을 누리던 그들도 결국 유혹을 참지 못하고 선악과를 먹어버리고 말았지."


"그리고 결국 쫓겨났고."


성경은 펴본 적도 없는 자신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모든 걸 가졌던 그들도 그럴진대, 하물며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우리는 어떻겠나?"


히죽, 남자가 웃었다.


"..."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 이제 슬슬 가보게. 나는 다음 손님을 기다려야 하니 말이야."


"설마...지금까지 여기서 계속 사람들을 잡아 와서 권유했던 건가?"


내가 물었다.


"당연하지, 지구를 살린다고 하지 않았나. 동참하는 사람은 많을수록 좋지."


그가 답했다.


"하, 그것도 그렇군."


나는 그의 초연한 태도에 무심코 웃어버리고 말았다. 왠지 그에 대해선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확하면 다시 오게. 맛이나 보지."


"어련하겠어."


나는 그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흔치 않은 맑은 날씨였다.


"...별 신기한 일도 다 겪네."


나는 방독면을 고쳐 쓰고 숨을 들이마셨다.


필터를 통과한 짙은 소독약 냄새의 공기도, 입안에서 풍기는 달콤한 사과 내음이 섞이니 견딜 만 했다.


"...갈까."


나는 은신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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