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image.php?id=2caddf25e4de21b67dba&no=24b0d769e1d32ca73fed84fa11d02831150e3d5bd66e1c599a53538ed3f12cc7640f61fa73d99cd8a464bc537c611df67911c7958c409ccbbe134251c71e1c638c6fada03ba249023d87e9d400e480228ae0686d33f351c470f48dbc0af86ae08520f5c8

2033년. 서울 수도권 지하철.

세계에서 제일 광범위한 지하철 중 하나이자 한때 세계 2위의 통행량과 역 수를 자랑하던 곳.


10년 전, 세상은 대충 망했다. 3차 세계대전의 개전 2년차가 되던 해에 핵전쟁이 일어나서 전세계가 잿더미로 변했다. 왜 갑자기 일어났는지,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주 전장이었던 한반도도 이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서울과 수도권을 포함해 남한의 주요 도시는 북한을 포함한 각국에서 서로를 향해 쏜 장거리 미사일들과 핵미사일들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다. 아마도 북한에서 온 것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한때 세계 2위의 인구를 자랑하던 대도시권인 수도권에 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대피를 가기 이전에 몰살당했다.

허나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운이 그냥 좋았거나, 피폭되지 않은 지역에 있었거나, 지하로 도피한 사람들이었다. 수도권 사방에 흩어져 살아남은 사람들은 방사능 낙진과 추위, 그리고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지 알 수 없는 괴기스러운 생명체들을 피해 지하, 그 중에서도 한때 세계에서 제일 크고 통행량이 많은 역 중 하나였던 수도권 지하철로 모였다.

여기서 정말로 놀라운 사실이 있다. 알다시피 수도권 전철은 그렇게 깊은 편이 아니라서 비록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 강화된 문을 설치해놨어도 핵전쟁 시 방공호로는 그렇게 적합하지 않다. 지반이 붕괴되기도 쉽고, 설사 폭발을 견딘다 하더라도 방사능, 오염, 추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피한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금도 방사능으로 찌든 지상의 온갖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어째서일까?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없다.

어쨌든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이 잿더미가 되고 물자가 끊기고 사회체제가 완전히 붕괴된 상태에서 이들은 살기 위해 뭉쳐야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나 둘씩 모여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했고, 공동체들은 또다시 뭉쳐 더 큰 공동체를 이루었다. 커지면서 공동체간의 무역도 형성되었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여러 위협에 맞서 자신들을 지켜내야 했다. 보급은 언제 끊길지 모르고, 자기들끼리 살기 위해 약탈을 일삼는 자들도 등장했으며, 괴기스러운 생명체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들은 또다시 뭉쳐 일종의 여러 연맹을 이루었다. 어쩌면 또다시 대한민국이 지하에서 재건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서로 고립된 환경에서 수많은 연맹과 공동체들이 하나로 다시 뭉치기란 쉽지 않았다. 고립된 환경, 보급, 서로 다른 경제 체계도 문제였지만, 각 세력들의 서로 반대되는 의견이나 이념 때문인 것도 컸다. 큼직한 세력들은 저마다 자기들이 지하철도를 이끌어야 된다고 내세웠으며, 사회주의나 자유시장주의 등 과거에서 다시 일어서거나 색다른 사상들도 나타나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극렬 국수주의와 사이비 종교를 내세우는 세력들도 있었다. 결국 수도권 지하철은 몇 안되는 강대국과 여러 군소 세력들로 분리된 채로 남았다.

메트로에 제일 번성하는 세력을 꼽아보자면 2호선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옛 삼성 그룹의 인력이 역 인구를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는 자유시장주의의 ‘삼성 동맹’과 경의선을 따라 구 북한 난민들과 중국군 잔당들이 모여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한 ‘경의선 소비에트’가 있겠다만 그 외에도 군소 세력들이 꽤나 있는 편이라 두 강대국 사이에서 이리저리 박쥐짓을 하며 살아가는 역들도 많이 있다.




내 이름은 이현, 나이는 23세다. 전쟁이 터지고 지하로 누나와 여동생과 함께 내려왔을 때 나는 꽤 어린 편에 속했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역은 ‘까치산 연합’ 소속의 2호선 신정네거리역, 즉 서울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으며, 약 350여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이 곳은 별 특산물이 없지만 공간이 넓고 그럭저럭 쾌적한 편이라 사람들이 자주 이민오기도 한다.

그리고 내 직업은.. 일단 여러 가지가 있다. 주로 하는 일은 무역 및 보급으로, 이웃 역들을 정기적으로 오가며 물건을 사고 팔며, 때에 따라서 훨씬 멀리까지 가서 여러 소식들을 전해올 수 있다. 그러나 내 꿈은 고작 일개 잡상인이 아니다, 나는 언젠가 충분한 돈을 모아 무장한 뒤 지상에 나가 직접 물자를 구해온다는 큰 꿈을 꾸고 있다. 그래, 댁들이 죽고 싶어 안달난 놈들이라고 허구한 날 까는 지상 탐사원 말이야.

한때 이 역은 언제나 밝은 형광등의 하얀 불빛이 밝혀주었지만 지금은 희미한 붉은 빛을 내는 램프들과 비상용 전등들이 어두운 역 안을 비춘다. 승강장의 철도를 주위로 사고를 줄이기 위해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애초에 무의미해진 지금은 터널간의 자유로운 출입을 위해 유리문의 수를 줄여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하였다.

또.. 입학한지 3년만에 강제적 중퇴를 당하긴 했다만 나름 사학과 학생이었던지라 가끔 학교에 찾아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돕기도 한다. 애들을 보니 희망이 나면서도 꽤 암울했다. 벌써부터 염세주의에 찌든 아이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는 내가 화이트보드를 붙잡고 아이들에게 한반도의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해서 가르치는 도중 한 아이가 말했다. “다 망했는데 자랑스러워해서 뭐해요?”

내가 내 귀로 직접 들었다지만 충격으로 인해 잠시 동안 말문이 막혔고, 이를 얼버무리기 위해 억지 미소를 지은 뒤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 한다고 말해주어 일단락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 나나 다른 어른들도 그런 비관적인 생각이 날 수 밖에 없는 환경인데 누가 애들을 탓하랴. 애초에 나도 지하철 1.5세대인 걸. 다만 미래의 세대가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릴까 봐 두려울 뿐이다.

동료들과 주변 역들에서 보급품을 가져오는 일을 마친 뒤, 보통 저녁 7시마다 역 거주민들에게 단체로 지급되는 저녁을 먹었다. 오늘도 이끼가 들어간 버섯 죽이 나왔다. 우린 저녁을 마치고, 양계장을 관리하는 일을 한 뒤, 난로에 모여 잡담을 나누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비교적 자유로운 날이다.

몇 시간 뒤, 나는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누군가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보초를 서길 자원했고. 터널 앞의 초소 안에 K1A 기관단총을 쥐고 앉아서 합판으로 만든 벽을 멍하게 쳐다보며 여러 생각을 하고 있었다.

뒤편에서는 또 배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동체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원시 공산주의 사회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사회체제가 붕괴한 상태에서 소규모 공동체에서 살아가니 딱히 특별한 얘기는 아니다. 과거 원시시대에는 자연의 위력이나 외부의 위해로부터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하여 집단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자연스럽게 소유와 분배가 평등해지는 것이 잦았다. 지금이 딱 그 상황이다.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 등을 따르는 진짜 사회주의 연맹에 대해서도 들어보았다. 이런 사회주의적 역은 과거의 NL 계열의 정치나 민간 단체들이 전신이 된 것들이 많다.

문득 초소 뒤에 있는 벤치에서 두 명의 중년 사내들이 흥미로운 대화를 하고 있었다. 강 넘어 북쪽 어딘가에 네 개의 역을 차지하고 있는 과격 순혈주의자들인 ‘환 제국'에 대한 내용이었다. 사실 순혈주의 외에도 한때 한민족이 아시아를 호령했다는 이상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이 많은데, 인터넷이 있었던 시절에는 이들을 “환빠”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으리라.


“그 친구가 그쪽 역에서 본 게 뭔지 아나? 뭔 역이었는지는 까먹었는데 말이야..”

짧은 수염을 가진 사내가 약간의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깡패 놈들이 조선족 젊은이를 낄낄거리면서 구타하고 있더라고. 아니 글쎄, 얼마나 쳐 맞았는지 피투성이에 소리를 지를 기색도 없이 신음만 내고 있었다는 거야. 사람이 꽤 많이 있었지만 그 놈들이 두려워서 아무도 선득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니까. ”

“그런 소식은 그 쪽에서 지겹도록 들어봤지.” 키가 작고 수염이 없는 사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진 영토라고는 역 세 개밖에 없는 주제에 중국까지 진출해서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는 개소리를 하는 놈팡이들에게 뭘 바라나.”

“놈들이 그런 소리를 해댄다는 게 사실인가? 어이가 없군. 뭐 근데, 사실 여기서 역 세 개면 꽤 많은 편 아닌가? 게다가 놈들이 어디서 그런 무기를 다 구했는지 꽤 무장되어 있어서 아무도 선득 덤비려고 하지 못하고 말이야..”

“거 참.. 이태원이나 고속터미널역 같이 외국인들 많은 곳은 그 놈들을 어떻게 생각할려나? 주한미군도 꽤 많다는데.”

짧은 수염을 가진 사내가 헛웃음을 짓더니 자기가 말한 것에 자기가 의문을 품었는지 찡그리며 말했다.

“혹시 놈들 말이야, 백인들도 싫어하나?”

“그렇게 비뚤어진 정신머리를 가졌으니 당연하겠지.”

“도적들 빨갱이, 극우, 변종 인간들 광신도랑 사이비 종교에, 환빠에.. 세상이 망하니까 별 신기한 놈들이 등장하는군. 한민족이 뭉치기 쉬운 민족이라고 들어보았건만.. 쯧쯧..”

짧은 수염을 가진 사내가 혀를 끌끌 찼다.

“흠, 벌써 시간이 지나버렸군. 할게 태산이니 얼른 가지.”

그리고 둘은 짐을 챙기더니 벤치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걸어갔다.

문득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10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초소에서 서 있었을 뿐 별로 한 게 없는데 오늘 따라 피곤함이 몰려와 내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한때 가게들이 들어서 있었을 복도 주변에는 텐트와 판자지 여러 개가 모여 있는 일종의 판자촌이 형성되었다.

걷다 보니 13살쯤 되는 아이가 아빠에게 다른 지역의 상황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그러더니 북한의 상황에 대해서도 물었다.

“글쎄.. 내가 듣기로는 평양 지하철이 세계에서 제일 깊은 곳 중 하나라고 들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사람이 모여사는건 당연하겠지. 오히려 우리가 이런 얕은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게 기적이야.”

아빠가 답했다. 그리고 잠깐 옆을 바라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진짜 중요한 것은 말이야, 어떻게 살아가냐는 거지.”

‘집’으로 향했다. 집이라고 해 봤자 판자를 덕지덕지 붙여 만든 삐걱거리는 판자집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가족이 많은 경우에는 가게에서 살기도 하는 듯 했다.

누나는 자고 있고, 여동생인 18살 아영이가 안에서 홀로 앉아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문득 우리 ‘집’의 뒤편에서 웃음소리를 포함해 무슨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기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해 나오지 않겠냐고 아영이에게 물었다.

"오랜만의 구경거리인데 안 나올래?"

“아니, 또 연주하는 거잖아. 피곤해.”

아영이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어쨌든 나는 잠깐 나와보고 싶어 뒤쪽으로 가보니, 판자촌 사이의 복도의 비어있는 공간에 (‘광장’이라고도 불린다) 사람들이 희미한 붉은 빛을 내는 램프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기타 연주를 듣고 있었다. 어린아이들도 여러 명 보였다. 램프 옆에 모자를 쓴 김씨 아저씨가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50대에 키가 약간 크며, 나이보다 좀 젊어 보이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내다. 김씨 아저씨가 노래를 멈추고 다른 노래를 연주할 준비를 했다.

다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문득 저 구석에서 나보다 살짝 어려 보이는 낯선 젊은이와 흰 머리를 가진 노인이 서서 대화를 하는 것이 보였다.

“..그나저나 들으셨어요? 안 그래도 5호선 북쪽에서 들려오는 전염병 소식 때문에 흉흉한데 동쪽 어딘가에 화재가 생겨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답니다. 온갖 안 좋은 소식들이 곳곳에서 들려오는데 이러다가 이미 한번 망했는데 전부 다 망하는 게 아닌 건지 두려워요.”

노인이 고개를 올리며 말했다.

“하아.. 그래도 이렇게 우리가 살아있는 것도 하나님에게 감사드릴 일들이겠지. 이러한 때일수록..”

“하나님?”

젊은이가 노인의 말을 끊고 헛웃음을 지으며 콧방귀를 꿨다.

“그딴거 없어요. 수억 명이 서로 핵 맞고 죽어가는 동안 그 영감은 위에서 뭐하고 있었는데요? 그거 아세요? 제가 어렸을 때 제 가족은 저기 위에서 다 죽었어요.”

젊은이가 위를 가리키며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 전쟁을 일으킨 것도 결국은 우리 인간들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살아남았고. 이렇게 얕은 곳에서 추위와 방사능을 충분히 버티고 있는 것도 기적 아닌가..”

노인이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전쟁 나는 동안 신은 저기 위해서 뭐하고 있었냐고요? 그리고 하루하루를 지옥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세요. 우리 역은 천국인 편이잖아요.”

젊은이가 흥분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빠르게 말했다.

“구석에 처박혀 이끼와 쥐로 연명하는 사람들은요? 전염병으로 몰살당한 사람들은요? 어린 나이에 납치당해 삼성의 부자놈들 노리개로 쓰인 애들 이야기는 들어보셨어요?”

그리고 한숨을 쉬더니 앞을 바라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신에게 용서를 빌기 전에 신이 우리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겁니다.”

노인이 말했다.

“자네 말이 틀린 건 아닐세. 하지만.. 어차피 지옥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면은 그래도 절망보다는 차라리 헛된 희망을 가지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났지 않을까?”

그때 김씨 아저씨가 다시 말했다. 이번 곡은 김동률이라는 가수의 ‘오래된 노래’라고 한다. 잠깐 동안은 말 그대로 적어도 30년이나 된 오래된 노래라서 그렇게 말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제목이 오래된 노래였다.

“우연히 찾아낸 낡은 테잎 속에 노랠 들었어..”

몇몇 관중들은 노래에 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문득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쳐다보는 아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이들이 크면 또 지하철의 삶을 책임져야겠지..

10분 동안 계속 음악을 듣다가 어느새 피곤해진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누나와 아영이 둘 다 조용하게 자고 있었고, 침낭을 깔고 천장의 백열전등을 껐다. 자면서도 계속해서 잔잔한 기타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복잡한 생각에 젖어 있다가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니체가 옳았을지도 모르겠구만.."

- dc official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