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을 불사르던 ICBM들의 노여움도 잊혀지고, 대통령들의 지하 방공호도 기나긴 세월 속에 묻혀버린. 그리고 그런 것들에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생존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시대에
한 낡아빠진 비틀 한 대가 사막을 주행하고 있었다.
서스펜션은 주저앉기 일보 직전에, 본래 베이지색이어야 했던 겉은 녹슬었고, 측면의 유리창들은 모두 깨져 철제 그물망으로 얼기설기하게 기워놓은 이 차량과 주인이 이 근방에 자리하고 있는 유일한 여관에 도달한 것은 새벽녁이었다.
그가 도달한 것을 본 주인장은 여관의 2층으로 올라가 급하게 자신의 자동소총을 빼들어 사격을 가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왼쪽 창문에서 삐져나와 문짝에 걸린 대구경 리볼버가 그를 정확히 겨눠 순식간에 쓰러뜨렸다.
-탕!-
주인장의 몸에 큼지막한 바람구멍이 생기고, 시체가 피를 흘리며 바닥으로 떨어지자 비틀의 주인은 안심하듯이 차에서 내린 뒤. 떨어진 시체를 뒤져 약간의 베가스 칩(Vegas Chip)과 자동소총을 챙기고는 주인을 잃은 여관의 안으로 당당히 들어갔다.
"어서 옵쇼."
카운터에는 썩은 미소를 짓고 염소 수염을 길러 비열해 보이는 인상의 탄 피부 대머리 사내가 있었다. 비틀의 주인은 이놈조차도 처리할까 생각했지만 곧 생각을 접었고, 순순히 값을 지불하기로 했다.
"1박에 식사 포함, 값은 이 정도면 되나?"
생각을 마친 그는 방금 전에 여관의 주인장에게서 강탈한 50칩 중 5칩을 내밀어 값을 치르려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합죠, 그나저나 주인장이 죽었으니 이 가게는.. 제가 가지겠군요. 이거 은인께 감사를 어찌해야 하나."
그러려던 도중, 합법적으로 - 물론 법 같은 건 없다. -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될 좋은 기회가 눈 앞에 생겨났다. 이는 이용해먹지 않는 놈이 바보였고, 그는 이 기회를 써먹기로 했다.
"5칩만 깎아주게, 감사는 이걸로 받지."
"헤헤.. 아무렴요, 1층 5번방 키입니다."
방에 들어간 비틀의 주인은 나무 침대에 앉아 주인장의 시체에서 강탈한 자동소총을 분해하여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것은 분명 칼라시니코프처럼 생겼지만 칼라시니코프가 아니외다, 전혀 다른 소총인 것이다.
그는 그 즉시 호주머니에서 두꺼운 양장본 공책과 만년필을 꺼내 이 총의 구조와 사용 탄약을 상세히 기록하고 외형을 따라 공책에 그려넣었고, 마지막에는 총기의 부품들을 샅샅히 뒤져 찾아낸 이름. 'SA Vz.58' 을 가장 큰 글씨로 적어내렸다.
이 탓에 이름이랄게 딱히 없던 비틀의 주인은 이 세계, 트럼프랜드(Trumpland) 서쪽 황무지의 사람들에게 '무기 기록자' 라고 불렸으며. 그 자신 또한 이미 멸망해버린 옛 시대의 무기들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이 별명을 마음에 들어했다.
"오늘의 기록은 이걸로 끝, 지난번에 주웠던 잡종 K2 소총은 여기로 올 때 망가졌으니 당분간 이 녀석을 들고 다녀야겠군."
무기 기록자는 그렇게 새로 얻은 소총을 점검하고, 빼놓왔던 탄약을 탄창에 다시 재어놓은 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쾅쾅! 쾅! 쾅쾅쾅!-
다음 날, 누군가가 자신의 방 문을 세게 두들기고 있다는 사실을 잠결에 어렴풋이 깨닫고 일어난 무기 기록자는 군말하지 않고 가져온 더플백에서 옛 시대의 기관총을 꺼내 탄띠를 물리고서 노리쇠를 당겨 장전했다.
-철컥!-
그렇게 기관총, MG42를 둘러매고 총구를 앞으로 향한 채 문을 열자 가죽 점퍼와 모히칸을 한 대략 너댓명의 무뢰한들이 보였고, 그는 한번의 하품을 한 뒤. 기관총의 방아쇠를 짧게 당겨 양탄자 찢어지는 소리가 나는 아침 청소를 끝냈다.
-부우우우욱.-
꼭두새벽에 여관 안에서 기관총 소리가 나고 바닥이 피와 살점들로 물들자. 새로운 주인장이 물양동이와 청소 도구를 가지고 부리나케 달려와 귀찮은 표정으로 인간이었던 것들의 잔해를 깨끗하게 치웠다. 그걸 본 무기 기록자는 팁이라며 1칩을 건네주었고, 더플백을 챙겨 식당으로 향했다.
"하아암.. 오늘 아침은 뭐지."
말을 꺼내고 주변을 둘러보니 이번 주의 식사 메뉴판이 보였다. 오늘이 토요일이니.. 감자 스튜와 구운 쥐고기 꼬치일 것이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메뉴에 만족한 그는 능숙한 몸짓으로 파이프를 조잡하게 꼬아 만든 의자에 앉아 호출용 종을 눌렀다.
-땡!-
"예! 아침 식사 곧 들어갑니다!"
이에 답변한 것은 흑색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갈색 돼지 가죽 앞치마를 두른 귀여운 여급사, 무기 기록자와 그녀는 나이가 거의 똑같을 정도의 연령으로 보였지만 그는 어쩐지 흐뭇해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마침내 요리가 도착했다. 무기 기록자는 먼저 쥐고기 꼬치를 들고 한입 크게 뜯은 뒤,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고 곧이어 감자 스튜도 몇 숟가락을 퍼먹더니 아예 들고 마시기 시작해 깨끗히 비워버렸다.
그리고 그는 3개의 칩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여관 밖으로 나가, 자신의 오래된 비틀에 시동을 걸고 다른 장소로 향할 준비를 했다.
-부르릉, 털털털털..-
어제 하와이안 근위 기계화 기병대의 추격을 피해 캘리포니아 제국의 권역에서 벗어나느라 너무 고생했던 탓인지 그의 비틀은 영 힘이 빠져보였다. 탑재된 공랭식 엔진이 냉각수가 떨어졌을리는 없을테고, 아마 엔진 자체가 오래된 탓일 것이다.
조만간 디트로이트의 기계 농장에 들러 새 엔진을 구해야겠다 생각한 그는 비틀을 몰고 황무지의 지평선을 넘어 원래 목표로 해두었던 장소로 향했다.
...
지루하기 짝이 없는 황무지 운전 중 보이는 것은 기껏해야 옛 시대의 전차나 장갑차들이 격파된 뒤 녹슬어버린 잔해들과 몇 없는 건물들의 폐허, 그리고 존나게 많은 선인장들 뿐이었다.
슬슬 하품이 다시 튀어나오려던 찰나, 갑자기 차가 멈추기 시작하더니 보닛 뚜껑에서 푸털털거리며 연기가 삐져나왔다. 그, 무기 기록자는 직감적으로 일이 좆됐음을 파악했지만 정비를 제때 하지 못한 그의 차는 이미 스틱스 강을 건너버렸고.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망가져버린 차를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씨발.."
별 수 없이 목적지까지 걸어가야 하자. 그는 차의 트렁크를 열고 접혀있던 쇼핑 카트에 가지고 있는 무기와 탄악, 식량을 최대한 싣었다. 그러나 공간이 부족한 탓에 싣지 못한 것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셰프 보알디의 스파게티 통조림이었다.
"먹어서 소모하는 수 밖에 없나, 어디 딸만한 물건이..."
"포크 밖에 없군."
그는 날카롭게 세워진 작은 삼지창을 들고 통조림의 주석제 캔 뚜껑을 무작정 쑤시기 시작했다. 대략 2시간 가량 깡깡거리는 소리가 수십 수백 번 나고, 마침내 뚜껑이 뜯기는 까드득 소리가 나자 무기 기록자는 승리했다는 감정을 참으로 오랜만에 느꼈다.
"그럼.. 한번 먹어보자고."
뚜껑 따진 통조림 캔 안에는 퉁퉁 불은 파스타 면과 미지근한 미트 토마토 소스가 담겨져 있었고, 그는 포크를 집어넣어 면이 끊어지지 않도록 살살 감은 뒤. 우물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인스턴트 스파게티의 맛은 옛날에 유통기한이 지난 것 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라 그는 만족했고, 마지막 소스까지 입 안에 흘려넣은 뒤. 다시 출발하기 위해 쇼핑 카트의 손잡이를 잡았다.
"한 1년 6개월 쯤 걸리려나, 꽤 오래 걸리겠는데. 그래도.. 자유의 여신상은 꼭 보고 싶은걸 어쩌겠나. 발을 빨리 옮기는 것이 답이니라."
그렇다, 무기 기록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라 일컬어지는 자유민주주의-광선을 발사하는 병기. 자유의 여신상에 도달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는 과연 자유의 여신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이야기의 끝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졸리당.
- Proletarier aller Länder, vereinigt e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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