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뒤집혔다. 대공황, 전쟁, 전염병, 무정부 상태, 쿠데타가 동시에 다발했다. TV와 라디오에서는 연일 개전을 떠들어댔고 거리에는 선전물 찌라시가 함박눈보다 많이 쌓였으며 보름 사이에 정권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모두 군사정권이었다.
남의 나라 이야기인 줄 알았던 총기 난사 사태가 하루에도 수백 번이나 일어났다. 양민만 죽어 나가는 아비규환 속에서 경찰과 군인은 도망치고 없었다. 이제 아무도 정부를 믿지 않았다. 시민들은 각자 지도자를 받들고 총칼을 들어 스스로를 지키기 시작했다.
반쪽짜리 나라 대한민국은 곧 삼국지처럼 세 개로 갈라지더니 5호 16국 시대처럼 수십 개로 분열되다가 결국 수백 조각으로 토막살인 당했다. 바야흐로 군웅이 할거하는 시대가 21세기 대한민국에 벌어졌다. 하지만 역사책에 보았던 것처럼 대서사시의 장대한 서막 같은 것은 아니었다. 영웅의 시대라기보단 광기의 시대, 유언비어의 시대, 악인들의 전성시대였으므로···.
[서울에서는 15초마다 한 명꼴로 시민들이 죽는다고 합니다. 1초···. 2초···. 8초···. 14초···. 15초. 방금 또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탕! 총성까지는 라디오 방송에서 낸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바깥, 회색 건물 사이에서 났다. 하지만 이어지는 소란은 없었다. 환청인 걸까? 창가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응급의료팀 부교수 이시현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어딜 보나? 이제 건배나 하지.”
말소리에 그는 눈을 부릅뜨고 위스키 잔을 들었다. 테이블에 동석한 중년인은 부산 민족대학병원의 병원장 김학수. 감정이 죽은 잿빛 눈동자와 턱 끝까지 내려오는 다크서클, 볏가리처럼 푸석푸석한 머리털, 그리고 기다란 코를 보면 구 러시아 제국의 요승인 라스푸틴이 떠오른다.
얼굴만 닮은 게 아니라 실제로 하는 짓도 비슷하다. 황제와 황후의 총애를 받고서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고 신민을 고통받게 했던 그 악인처럼, 김학수는 대통령과 정부 관료 앞에서는 고려말 최영 장군보다 충신인 척하지만, 실상은 부하들이 일선에서 피땀 흘려 희생하는 동안 자기는 테라스에서 나쵸나 처먹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금수 같은 인간이다.
이 무정한 인간쓰레기를 보스로 두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벌써 다섯 명의 의료인이 업무 스트레스로 자살했다. 하지만 시현은 끝까지 버텨냈고, 젊은 나이에 응급의료팀 부교수의 자리에까지 올라섰다.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일은 없었다. 세기말에서는 죽지 않고 사는 것 자체가 치열한 경쟁이다.
피의 축하주가 한 잔 돌아갔다. 꺾어 마시는 시현과는 달리 김학수는 독한 스카치위스키를 냉수 마시듯 벌컥벌컥 삼켰다. 저 술고래가 유리잔을 소리 나게 놓고 입술을 닦으면 입방정이 시작되었다.
“서울로 가게 되면 항상 바쁜 일만 생길 거야. 자네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는 거지.”
“예···.”
“혹시 날 원망하나?”
“무엇을···. 말입니까?”
“서울 파견으로 자넬 추천한 거.”
“아닙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 그럼 잘 하고 돌아와. 더도 않고 덜도 않고 일 년만 고생하라고.”
김학수가 시현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시현은 목덜미에서 소름이 돋았다. 저 악마 새끼, 기어코 나를 사지로 몰아넣는구나. 하며 어금니로 칼을 가는 소릴 냈다.
서울이 어떤 곳이던가. 아직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임시 수도 부산과는 달리, 범죄와 총성이 끊이지 않는 시체 구렁텅이다. 그곳으로 파견을 나가라는 말은 둘 중 하나의 의도를 숨기고 있다. 과로로 뒤져라. 혹은 총 맞고 뒤져라.
거역할 수는 없다. 이는 국가의 명령이고 따라야 하는 건 병원과 의료인의 의무다. 안전하고 따뜻한 부산에서 오래 살고 싶다면, 의무라고 불리는 협박에 입 닥치고 따르는 법을 알아야 한다. 시현처럼.
“예···. 원장님. 무사히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돌아오면 또 한 잔 더 하자고. 잘 하면 내가 각하께 잘 말해두지. 그땐 자네가 교수가 될지도 모르겠는걸.”
“···.”
시현은 ‘씨발놈.’이 목청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울적해서 그런지 그 씨발놈을 눈앞에 두고도 술이 쭉쭉 넘어갔다. 막 취기가 돌기 시작했을 때 술자리가 끝났다. 영혼 없는 안부 인사를 나누고 둘은 헤어졌다.
비틀, 비틀···. 시현은 몽유병 환자처럼 복도를 걸어갔다. 곧 서울, 그 죽음의 도시로 간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그곳에서는 비둘기나 쥐새끼는 물론이고 사람까지 잡아먹는다던데···. 참치 통조림 하나면 남자건 여자건 몸을 판다던데···.
“씨발놈···.”
시현은 당직실의 문고리를 비틀었다. 안은 시체 안치실처럼 어두컴컴하고 음산했다. 가운을 벗어 던지고 구석진 침대 위에 첨벙 빠져서 피곤한 잠을 잤다. 이제 좀 숙면하나 싶었는데 전화가 왔다.
한 번 벨이 울리면 베개를 뒤집어쓰고 무시했다. 두 번 벨이 울리면 이불을 당겨서 귀를 막았다. 세 번째까지는 버틸 수 없었다. 시현은 점차 얼굴이 구겨져 들어가며 몸을 일으켰다. 당장 전화선을 뽑아버리려고 했지만, 충동을 꾹 눌러 참고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바깥에서 구급대원이 조급하게 말을 떠들어 댔다. 시현은 두 눈을 절반쯤 감으며 권태로이 듣기만 했다. 목과 복부에 총상을 입은 10대의 여성. 그러니까 또 응급환자구나···. 싶어 귀찮음이 확 돌았는데, 순간 물벼락을 맞은 듯 비몽사몽 간의 정신이 바짝 드는 것이다.
-환자분 성함이 이시은입니다···. 혹시 교수님의 동생분이 아닙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시현은 당장 의사가운을 입고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비상계단으로 내려가는 길은 너무나도 길어 초조했다. 창문을 부수고 뛰어내리고 싶어 애가 탔다.
이시은은 시현의 하나 남은 가족이었다. 이 세상이 정상적이었다면 막 고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였다. 웃는 미소가 그리운 어머니를 닮아 슬프게 아름다웠고, 성심이 고와 그렇게 오빠를 챙겨주고도 더 못 해줘서 미안했다던 그녀. 비참한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
그랬던 그녀가···.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바쁜 응급실에 들어오자마자 시현은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의 상태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근육이 보이도록 찢어진 목에서 핏물이 튀었으며 입가에 피거품이 보글보글 끓었다. 총알은 복강의 중요 장기를 관통해 그녀가 입기 좋아했던 백합 같은 중학교 교복을 장미처럼 검붉게 물들였다.
상처를 닦는 손이 벌벌 떨렸다. 옆구리를 꿰뚫고도 순순히 지나가지 않은 총알은 뱃속에 긴 곡선의 공동을 만들었고, 구멍 내벽에 모래알 같은 탄자 파편을 남기었다. 그야말로 치명상이었다. 더군다나 충격파로 압축된 기관들이 대부분 영구적으로 훼손되어 당장 수술이 필요했다.
시현은 당직들에게 콜하는 대로 총상 안에 포셉과 디섹터를 집어넣어서 이물질을 꺼냈다. 핏덩이와 함께 드러난 것은 소총 탄환의 한 조각. 길거리에 민간인이 소총을 들고 다닐 수는 없으므로, 그녀는 저격당한 것이 확실했다. 누군가가 그녀를 가축이나 짐승처럼 사냥해버린 것이다.
“···.”
시현은 현기증이 도져 눈앞이 흐려졌다. 어째서 저 어린 걸 장난으로 죽인 걸까. 굳이 그래야 했을까. 가엾은 시은, 얼마나 아프고 무서웠을까···.
콜록! 그녀가 각혈하자 멎은 줄 알았던 출혈이 다시 시작되었다. 구멍 난 총상에 시뻘건 핏물이 금세 차올라 배드 아래로 장맛비처럼 투둑투둑 쏟아져 내렸다. 시현은 조급해졌다.
“뭐해! 출혈부터 막아야 할 거 아니야!”
그는 거의 광기를 질러 의료진들을 채찍질했다. 하나뿐인 가족을 어떻게든 살려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
“야 이 씨발새끼야!”
수술이 끝나자마자 주먹이 날아왔다. 시현은 면상에 통증이 작렬했다. 뒤로 엎어진 그는 코부터 잡았다. 뼈는 이미 부러져 있었다. 퍽!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무섭게 발길질이 들어왔다.
“이! 쓸모없는! 씨발놈아!”
머리가 축구공처럼 차이니 시현은 두개골 안에서 괘종이 울렸다. 숨쉬기가 힘든 탓에 살려주세요, 이 한마디가 잘 나오지 않았다. 주변 동료 의료진들은 겁에 질려 구경만 했다.
“씨발. 식염수나 조금 써서 구색이나 맞출 것이지 병원에 있는 혈장이고 수액이고 다 쓰려고! 네가 뭔데 이 씨발놈아!”
“하지만 환자가···.”
퍽! 시현은 한 대를 더 맞아 별이 보였다.
“개새끼! 상대를 봐가면서 써야 할 거 아니야! 그냥 뒤져가는 년인데 그 많은 걸 왜 쓰냐고! 이 멍청한 새끼야!”
“···.”
상대를 봐가면서···. 시현은 그 말을 곱씹어보았다. 상대는 다름 아닌 하나뿐인 가족이자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다. 그녀가 총상을 입고 사경을 헤맸을 때, 시현은 수술을 집도하면서 죽은 신에게 기도했다. 과학적인 방법이고 비과학적인 방법이고 모두 총동원해서 어떻게든 그녀를 살려야 했다.
그러나 저 인간쓰레기는 그녀를 그냥 뒤져가는 년으로 본 것이다. 죽어가는 걸 내버려 두고 유가족의 돈을 뜯어먹을 용도의 가축으로 본 것이다. 시현은 뇌압이 치밀어 올랐다.
“···환자가 제 여동생이었습니다.”
“...!”
김학수는 당황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를 보아 그에게도 아직 인간적인 감정이 남아있는 건지, 싶었지만, 그럴 리 없다. 곧 적반하장으로 노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기적인 새끼···. 가족이면 병원 재산 다 퍼부어도 되는 거냐? 다른 사람은 사람도 아니야?”
“정확히 정량을 썼습니다. 절대 남용하지 않았습니다.”
“뭐어···?”
소름 끼치는 정적이 돌았다. 김학수뿐만 아니라 주변의 의료인들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말대답, 혹은 반항···. 이 하극상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그것도 이곳 부산 민족대학병원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김학수에게는 더더욱.
“이 새끼가 어디서 말대꾸야 지금!”
“원장님,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그런데 시현은 벌떡 일어나 왕의 면전에 반박하고 나서는 것이다. 김학수가 시현의 눈높이 아래에 있어 키 차이가 분명했다. 권위가 무시된 순간 김학수는 누군가의 위에 있지 않았다.
“사람에게 쓸 것을 사람에게 쓴 게 잘못입니까? 아무리 세상이 요지경이라지만 살려야 하는 사람은 살려야 하는 게 아닙니까? 전 환자를 치료할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제 죄가 있다면 단지 그뿐입니다.”
여기에서 그만해야 했다. 더 밀어붙이다간 무시무시한 형벌이 내려질 것이다. 그러나 시현은 억지로 참아왔던 울분을 이참에 다 터뜨리려 했다. 뒷감당은···, 모르겠다.
죽 정색하고 듣던 김학수는 시현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뱀이 혓바닥으로 먹이를 핥아 먹듯이. 시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 인간이 무슨 일이 벌일 것만 같았다. 막 섬뜩한 긴장감이 돋았을 때.
“푸흐흐!”
김학수는 웃음부터 터뜨렸다. 껄떡대는 소리가 갈까마귀 소리처럼 음산했다.
“그래···. 잘 해봐. 유능한 친구야.”
“...?”
그 말이 끝이었다. 김학수는 킬킬 웃더니 시현의 뺨을 가볍게 토닥였다. 시현은 털끝이 곤두섰다. “무슨 말씀을···!” 이라며 입을 벙끗댄 순간, 김학수는 등을 보이며 저편으로 걸어갔다. 시현은 정신이 멍해졌다. 왜 저 양반이 미친 사람처럼 화내지 않는 걸까.
소란은 어설프게 끝났다. 무서운 의문만을 남겨두며. 의료인들은 봉변을 당할까 뿔뿔이 흩어졌고 시현은 화장실로 달려나가 세면대에 얼굴을 쑤셔 박았다. 숨구멍이 찬물에 젖어 들었다. 질식의 고통이 목을 조여들자 고개를 들었다. 물귀신과 눈이 마주쳤다. 공포에 젖은 눈빛이 너무나도 비참해 보였다.
“씨발놈. 대체 어쩌려는 거야···.”
물귀신도 시현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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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세계와 판타지세계를 오가는 주인공 이야기인데, 포아갤이니 현실세계 장면만 짜깁기해서 올려보겠읍니다.
아니 그냥 다 올려 다 갖고와 다 -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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