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얼어붙었다.

대략 500여년 전 쯤에, 이유는 모른다. 도시에서 가장 큰 도서관을 뒤져봐도, 나이 좀 먹었다는 도시의 원로들에게 물어봐도 세상이 이 꼬라지가 된 이유는 모른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대한파에서 살아남은 인류가 얼마 없다는 사실 뿐이다.

그리고 이 말을 중얼거리는 나는 눈 덮인 대지를 마치 동상에 걸린 것 마냥 힘겹게 주행하는 이동 도시의 갑판에 서 있었다.

전신을 덮는 넝마 같은 방한복을 입고, 팔 위에 감아놓은 회중시계형 온도계를 슬쩍 들여다보니 '영하 46.1도'라는 글자가 보였다.

"오늘은 그럭저럭 따뜻한 날씨네."

대한파 이후 문명이 없어진 북반구의 평균 기온은 대략 영하 51.3도 정도, 지금의 기온과 비교해보면 무려 5.2도 가량이 높아진 셈이다. 본래 여름이나 되어야 이런 기온이 나오는데 최근에 이런 기온이 자주 측정된다.

"이제 와서 대한파 끝이라는 건가.."

눈폭풍이 몰아치는 소리에 묻혀 사라질 작은 한탄을 전면형의 방한 마스크 너머로 내뱉은 나는 조잡하게 만들어진 소총을 쥐고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간 나는 먼저 동파를 방지하기 위해 열선 재킷이 감아져 있는 단발 소총에서 옛 시대에 만들어진 유물 납 전지와의 전선을 분리해 거치대에 올려두었고, 전지는 신줏단지 모시듯 천천히 옮겨 철제 상자 안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갑판 아래의 기온은 급격히 올라가 대략 영하 1~2도 정도, 물론 이것도 꽤 춥지만 바깥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다. 안에 있는 난로에 불을 피우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그렇다고 도시 안에서 장작으로 지핀 모닥불을 피우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영감님."

총기 거치대 앞에는 제리캔의 윗 부분을 뜯어 장작불을 지펴놓은 채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파이프로 맛깔나게 피우는 '영감님'이 앉아 있었다. 본명은 모른다, 하지만 그가 갑판 경비대의 병사 중 최고참이라는 사실만 다들 알고 있었다.

"헹, 도시가 모닥불에 불타든 말든 내 알바 아니네. 그나저나 빨리 돌아왔군, 오늘 무슨 일이라도 생긴겐가?"

"기온이 또 올랐습니다, 지난 주에는 영하 50도 정도였는데 일주일 사이에 5도 가량 올랐어요."

"허.. 내 나이 70줄에 이런 일은 처음인데, 하긴 대한파도 5세기 동안 너무 우려먹긴 했지. 슬슬 신이라는 작자도 재미없을테야."

"그럼 신의 다음 놀잇거리는 무엇일지 예상이 가십니까?"

"인류 문명의 재건을 관음하는 것이면 좋겠다만.. 솔직히 예상은 안 가네. 내가 신병 시절부터 본 건 영하 60도니 70도니 하는 온도계의 무지막지한 숫자 뿐이었으니 말일세."

"그렇군요."

"그렇지."

...

영감님과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나는 내 집으로 돌아갔다. 집 안에 가족은 없었다, 나를 반겨주는 것은 지난번에 주워온 흰색 강아지와.. 다른 이동 도시와의 전쟁에서 사라진 가족들의 사진 뿐. 매일 보는 것이지만 항상 입맛이 쓰다.

아무튼, 얼굴을 두텁게 감싸고 있던 8안식 방한 마스크를 벗고 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아무리 우박 섞인 칼바람을 막기 위해서라 해도 이 거지같은 착용감은 내 기분을 더럽게 만든다.

"이리 온."

주머니에서 배급용 압착 콩고기 블럭을 꺼내 들이밀자 이불 속에 파묻혀 있던 강아지가 추위를 뒤로한 채 멍멍 소리를 내며 부리나케 달려오더니 내 손에서 잽싸게 가로채 조그만한 이빨로 아작아작 갉아먹는다.

"하여튼 이름도 안 지어준게 먹는 거라면 무지하게 밝혀요. 좀 남겨둬라, 그거 내일 아침이야."

도시에서 매일 아침 배급해주는 끊는 물에 콩고기 블럭을 넣고 약간의 문샤인을 첨가하면 완성되는 아침 식사, 태어나서 먹어본 것이라고는 그것 밖에 없다.

아니, 문샤인이 섞인 건 성인식 이후부터 먹었었지. 엄밀히 말하자면 태어나서 먹어본 것은 문샤인이 섞이지 않은 수프와 섞인 수프, 2가지일 것이다.

도시의 사냥 부대에 들어간다면 갓 잡은 진짜 생고기를 먹을 수도 있다지만 아무래도 무리다. 지면에서의 사냥은 갑판과는 비교도 안되게 열량 소모가 많고, 추워서 아무리 방한복을 껴입어도 얼어죽는 사람이 속출한다. 잠깐의 식욕으로 인생을 그르칠 수는 없는 일이지, 암.

그렇게 덧없는 생각을 허공에 흩뿌리던 나는 간단하게 끓인 물 한 잔을 마시고 침대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이불 더미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

"..이다! ..이 온다! 다들 문 걸어 잠가!"

잠에서 깨어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처음 바라본 것은 유리창 너머에서 도시를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백색의 무리, 감각이 몽롱한 귀로 처음 들은 것은 각자 문을 걸어 잠그라는 어느 남성의 절규.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는 깨달았다.

'폭풍이 다가온다.'

곤히 잠들어 있는 강아지를 서둘러 이불더미 속에 쳐박고, 방한 마스크를 뒤집어 쓴 뒤. 방한복과의 결합을 확인하고선 망치와 못을 꺼내 유리창에 나무 판자와 넝마들을 겹겹이 덧댄다. 문도 걸어 잠그고 틈새에 지난번에 주운 접착력 좋은 초록색 테이프를 붙여서 막는다.

"제발.. 좀.. 붙어라...!"

폭풍이 다가오기까지 어림잡아 5분 정도, 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늦게 깨어났건만 설상가상으로 문의 틈새를 메울 테이프도 잘 붙지 않는다.

"에라이."

-쾅! 콰쾅!

결국 발로 걷어차 틈새에 붙은 테이프를 눌러 붙인다. 이제 남은 건 집 안의 난방기구를 전부 켜는 일 뿐, 어차피 난로 하나가 끝이라 시간이 오래 걸릴 것도 없다.

-탁, 타닥.

대략 100년 전 즈음에 지상에서 나뒹굴던 부품들을 주워 모아 수공업으로 만들어졌을 전기 난로의 전원을 키기 위해 전선 사이의 접촉면에 스파크를 부딪히자 불꽃이 튄다. 신호음이 나고 난로 전면의 다이오드에 초록 빛이 감돌면 성공이다.

- 띵!

"됐다."

작동을 확인한 나는 즉시 강아지를 쳐박아둔 이불더미 속으로 들어갔고, 바깥에서 울려퍼지는 비명과 고함소리. 절규와 다가오는 폭풍의 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밖을 보면 제정신을 차릴 수 없다. 그러니 눈을 감는다. 정신만 똑바로 차린다면 폭풍은 지나가 있으리라, 물론 나와 이 강아지가 폭풍이 끝난 뒤에도 살아 있을지는 둘째 치고 말이다.






빙하기 마렵다길래 짧게 써서 가져와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