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트 아이즈는 전쟁 당시에는 임신된 망아지였습니다.
그녀를 품은 말은 핵무기가 하늘에서 떨어질 때 마주와 함께 경마공원역으로 대피했죠.
그러나 마주는 더 많은 말을 돌볼 자원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의 눈에, 고아인듯 혼자 울고 있는 소녀가 눈에 띄었습니다. 타국에서 온 듯한 노란 금발과 하얀 피부. 그녀가 바로 멜이었습니다. 마주는 멜에게 다가가, 잠들어있는 망아지를 건네줍니다.
"혼자 외로운 모양이구나, 이 망아지도 그런데… 네가 키워볼 수 있겠니?"
멜은 귀여운 망아지를 보고 함박웃음을 짓고서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습니다.
"그래, 좋구나. 이 친구 이름은 뭐라 하면 좋겠니?"
그녀가 잠깐 고민하던 사이, 망아지는 눈을 뜨고 영롱한 녹색 빛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립니다.
멜은 망아지를 잠깐 바라보더니, 웃음을 지으며 답합니다.
"브라이트 아이즈(Bright eyes, 맑은 눈)로 할게요."
그렇게 마주는 그 망아지를 멜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멜은 브라이트의 이름은 연신 부르며 키워줍니다. 비록 마을 사람들은 브라이트의 머리에 난 하나의 뿔 때문에 '도깨비'라 부르고는 했지만요.

브라이트 아이즈는 모든 말보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보다 뛰어난 학습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일반적 망아지처럼 행동했지만, 천천히 자라나면서 사람처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사람의 말을 이해했고, 자신의 의견도 피력할 줄 알았습니다. 멜은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을 연신 알려주었고, 심심할까봐 책도 읽어주었습니다. 그녀를 위해 멜은 강해졌고, 어느새 이름 높은 피커가 되었죠.
브라이트가 여덟, 멜이 열여섯이 되던 해, 여느 날처럼 멜은 역으로 돌아와 브라이트를 위한 건초와 통조림 캔, 오래된 책들, 그리고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창고에 박혀있던 초콜렛을 챙겨 돌아왔습니다. 그리고서는 소총을 걸치고 의자에 풀썩 앉아 브라이트를 부르죠, 브라이트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자리에 앉습니다. 이제 브라이트도 어엿한 암말로 자라나, 다리를 접혀 자리에 앉더라도 멜과 눈을 평행히 마주볼 수 있었습니다.
"브라이트. 오늘 내 생일인 거 기억하지?"
브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멜은 히죽 웃더니, 초콜릿을 자리에서 까 먹습니다.
"참, 브라이트. 넌 나를 뭐로 생각해?"
브라이트는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브라이트는 너는 나랑 너를 어떤 관계로 생각하냐고."
브라이트는 한참동안 고민하는 듯, 고개를 천장으로 들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던 멜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하긴, 브라이트 넌 말을 못 하니까… 난 너를 내 여동생처럼 좋아해."
멜은 브라이트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푹 내쉽니다.
브라이트는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더니, 결심을 하고, 용기를 내어 힘겹게 입을 엽니다.
"…니."
"어?"
멜은 갈기를 쓰다듬는 걸 멈추었습니다.
"언…니…"
멜은 우두커니 브라이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이내 그녀의 얼굴에 따뜻한 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브라이트, 너…"
물방울은 흐르는 물결이 되었고, 멜은 브라이트를 껴안았습니다. 브라이트도 머리에 난 뿔을 내려 그녀의 머리와 맞대었죠. 경마공원역 4호선 플랫폼 끝자락의 형광등이 그들을 축하하는 듯 오랜만에 환한 빛을 내뿜었습니다.

어느덧 브라이트가 12살이 되자, 그녀의 언어실력은 왠만한 사람 수준으로 향상되었습니다. 멜은 이제 브라이트와 함께 밖으로 나가 피커로써 일하였죠. 이번에는 멜은 인근 역인 대공원역으로 향하여 물건을 채집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준비됐지 브라이트?"
멜은 가방을 매고, 그녀의 등에 올라탔습니다.
"당연하지!"
브라이트는 멜을 등에 태우고 어둑어둑한 터널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어두운 터널 앞에 굶주린 멧돼지 때가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멜은 익숙하다는 듯, 간단하게 권총으로 그들을 제압했죠.
브라이트는 멜이 떨어지지 않도록, 그렇지만 조급하게 몸을 세우더니, 그녀에게 고개를 돌립니다.
"귀 아파… 최소한 터널 속에서 총을 쏠 때에는 소음기라도 달고 하면 안돼?"
멜은 뿔을 자신의 얼굴로 겨누는 브라이트를 보고서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 미안… 귀마개든 소음기든 나중에 구해놓는다 해놓고 또 까먹었네…"
브라이트는 푸르륵(브라이트 기준으로는 한숨) 소리를 내었습니다.
"뭐… 괜찮아… 다음에 사올때까지 기다리면 돼지 뭐…"
브라이트는 다시 발굽을 달려 대공원역으로 향했습니다.


브라이트와 동행하여 향한 서울대공원은 여느 동네와 다름없이 처참한 폐허로 변해있었죠.
멜은 브라이트를 주차장 근처까지 데려왔습니다.
"오케이, 여기서 내리면 되겠다."
그녀는 오래된 자동차 천장에 내려서는, 걸어서 바닥으로 내려왔습니다. 주차장 아스팔트에 자라난 잔디들이 기분좋은 서걱 소리를 내었습니다.
"브라이트, 내가 다녀올 동안 여기에 잘 있는 예쁜 동생이 되어줄 수 있지? 저번처럼 뭐 쫒는다고 도망가지 말고, 어?"
브라이트는 눈을 굴렸습니다.
"그래, 그래… 말 잘 듣는 착한 말이 되어 줄게…"
"그래, 그래야 내 동생이지!"
멜은 그녀에게 다정한 입맞춤을 해주고서는, 오래되어 녹슬어버린 입구의 철골을 치우고 사라졌습니다.
브라이트는 그녀가 사라질때까지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그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는 주차장 전역을 마음껏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확연히 좁은 역 내부에선 사뿐사뿐 걸어야 했지만, 이렇게 꽃이 핀 주차장 풀밭과 높다란 천장의 하늘에서(핵겨울 탓에 아직 흐리뭉텅한 날씨가 좀처럼 갤 줄을 모르나 봅니다.) 언니가 없는 동안에는 그녀의 속도감을 주체할 수 없었거든요.
그러나 브라이트는 몰랐습니다. 멜이 들어간 그곳은 여느 장소와 다르다는 것을요.
서울대공원역의 괴물들은 멜이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귀여움과는 거리가 훨씬 멀어보이는 식인앵무새, 옛 역사에나 나올법한 공룡을 연상캐 하는 거대 도마뱀… 멜은 겨우겨우 공원정문까지 다다랐습니다.
브라이트는 멜의 발소리를 알아채고는 재빨리 달려옵니다. 그녀가 뛰어온다는 것은 확실히 좋은 신호는 아니었죠.
"언니! 무슨-"
그녀는 말을 멈춥니다. 세상에나, 멜이 그렇게 엉망진창이 된 걸 브라이트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리를 저는데다, 그녀가 아끼던 소총은 총신이 휘었고, 그녀의 옷가지가 붉게 염색된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멜은 그녀를 보더니 힘이 풀리기라도 한 듯, 그냥 달려오다가 바닥에 맥없이 쓰러졌습니다.
브라이트는 멜에게 달려나갔습니다.
"언니! 일어나 봐!"
브라이트는 발굽으로 멜을 조심히 툭툭 쳐보았지만, 멜은 꿈틀거리기만 할 뿐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어떡해,어떡해…"
브라이트는 발을… 아니 발굽을 동동 구르다, 몰려오는 괴물들로부터 일단 도망가야겠다 생각하고 멜을 입에 물어 등에 옮겼습니다.
저 멀리서 식인 앵무새들이 도마뱀이 대공원 입구를 향해 다가오더니, 육중한 무게로 낡은 건물을 부수기 시작합니다.
브라이트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대공원역사를 향해 달음박질합니다. 멜의 따뜻한 피가 더욱 그녀를 급하게 만들었죠.
어느덧 역사에 거의 다다를 때 즈음, 그녀는 갑자기 몸이 가벼워진 걸 느꼈습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앵무새들이 멜을 낚아채 저 멀리 날아가려는 것이 아닙니까!
브라이트는 멜을 향해 달려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총을 쏘지 않는 이상, 멜을 다시 잡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설령 떨어뜨린다 하더라도 멜을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죠.
브라이트는 달리면서 오직 하나의 생각만 하였습니다. 멜을 잡아야 한다… 멜을 잡아야 한다… 멜을 잡아야 한다… 브라이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오직 그 한 생각만 집중하였습니다.
순간, 그녀는 앵무새들이 더 이상 멀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습니다. 브라이트는 눈을 살짝 떠보았습니다. 세상에나. 기적이 일어난 걸까요. 멜이 하늘에 떠있는 게 아닙니까! 앵무새들은 그녀를 데려가려 애써보았지만, 그녀는 돌부처처럼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순간, 브라이트는 그녀를 자신이 쥐고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브라이트는 천천히 멜을 끌어왔습니다. 그리고서는 다시 그녀의 등에 올려놓았죠. 멜이 다시 자신의 등에 있다는 안도감을 한 번 느끼고, 브라이트는 대공원역 역사로 들어갔습니다.

브라이트는 역사 안에 들어오자마자 멜을 조심스래 내려놓고, 멜의 상태를 확인하였습니다. 멜은 거의 비몽사몽한 상태였지만, 의식은 있었는지 눈을 말똥히 뜨고 있었죠.
"…브라이트…"
브라이트는 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몸을 숙였습니다.
"그래, 언니… 괜찮아?"
멜은 신음을 뒤로 하고 실실 웃음 소리를 냅니다.
"너… 진짜 대단했다…"
브라이트는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지만, 그냥 넘겨버렸죠.
"그건 나중에 하고, 몸부터 괜찮은지 좀 봐."
다행히도 언니는 큰 상처를 입지는 않은 듯 했습니다.

그리고서 어떻게 되었냐고요? 모든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좋겠지만, 메트로의 세상은 돌연변이들에게 환영적인 세상은 아니었습니다. 브라이트의 정체를 알게 된 경마공원의 사람들은 그녀를 멀리 쫓아내라고 목소리를 높였죠.
멜과 브라이트는 서로 떨어져 있기 싫었지만, 둘의 안전을 위해 브라이트는 스스로 역사 밖으로 나갔습니다.

근데 이렇게 끝나면 또 동화가 아니죠! 멜은 며칠간 슬픔에 잠겼지만, 마음을 다잡고 다시 만날 날을 위해 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어린 고아들을 기르는 보육원장으로써의 나날을 보내고 있죠.
브라이트의 행방은 아직 확실한 정보는 없습니다만, 경마공원과 대공원 역의 풀숲에서 종종 하늘을 떠다니는 나무나 건축자재들을 목격했다는 피커들의 보고가 줄을 잇습니다. 멜은 브라이트의 성격상 집을 지을 동생은 아니지만, 그녀도 자신을 만날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는 한답니다.

작가의 한마디:드디어 내가 포아덕이자 포덕으로써의 기질을 드러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