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전 이승만의 명령
1. 갑작스런 대규모 인사이동
2. 1950년 6월 11일 발령됐던 군부대 비상경계령이 6.25 하루 전인 24일 0시 갑자기 해제
더구나 병사들에게 외출과 휴가를 허용하였다 이에 따라 전 장병의 절반이 휴가와 외박을 갔고 육군본부 장교들은 전쟁 당일 새벽까지 댄스파티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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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딱! 전쟁 전날 그런걸까 ?
=== 개인증언 사료===========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半世紀가 지나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한 이때 6·25 체험을 기술하려고 펜을 잡고 보니 기억이 혼미해져 올바른 체험담이 기술되어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문장이 될지 두려움이 앞서고 마음마저 얼어붙는 듯 하다.
1950년 6월26일 아침, 필자 나이 19세. 아무 생각 없이 잠자리에서 깨어나니 북쪽의 하늘 아래에서 꽝꽝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라디오를 들어보니 지난밤 0시를 기하여 북한 괴뢰군의 남침으로 우리 국방군이 맞서 싸우고 있으니 국민 여러분은 동요하지 말고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여 주시기 바란다는 對(대) 국민 방송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따라서 휴가 및 외출 중인 국군 장병은 이 방송을 듣는 즉시 원대 복귀하라는 방송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예삿일 같지 않아 동네 이장댁과 내가 속해 있는 청년단(李範奭 將軍이 이끄는 民族靑年團) 단장 댁을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며 수소문해 보아도 그 누구도 나보다 더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3일 지나고 보니 동네 앞 일반국도(청주~영동 간)에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먼지를 일으키며 완전무장한 채 위장한 군용 지프차와 군용트럭만이 먼지 속에 라이트마저 희미하게 가리고 헌병 지프차의 뒤를 따라 분주하게 질주하고 있다.
이때부터는 서울 방면에서 보따리를 이고 지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동리 앞(報恩郡 炭釜面 高仟里) 도로를 꽉 메웠으며 발이 부르트고 기진맥진한 난민들은 하룻밤 쉬어가기를 청하며 동리로 파고들어 집집마다 난민들이 빼곡하게 차 초만원을 이루었다.
.... 이런 와중에 밀려가다 보니 8월8일에 경북 경산이란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어느 학교를 찾아가니 교문에 피난민 수용소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들어가서 교실을 들여다 보니 이미 교실은 꽉 차 있고 우리 일행은 현관에 자리를 잡고 짐을 풀었다. 이날도 우리 일행은 전과 같이 사과밭을 찾아갔다. 예상대로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앞을 가로막는 건장한 젊은 사람들이 있었다.
피난지에서 입대
살펴보니 현역군인은 아닌데 팔에는 모병관이란 완장을 두르고 우리 일행을 보고 따라오라고 명령조로 말한다. 따라가보니 우리 일행이 있는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또다른 학교였다. 여기에는 어디에서 모아왔는지 이미 수백 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주위에는 군용트럭이 수십 대가 서 있고 현역군인과 운전병 등이 모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들이 모두 전방에서 신병 보충을 받으러 온 보충대원들이라 한다. 그러더니 소지품과 사복을 벗기고 군작업복으로 갈아 입히고 장교인 듯한 군인이 단상에 올라서 아주 평온하고 엄숙한 어조로 단독직입적으로 말했다. 『제군들은 지금 이 시각부터 우리 대한민국의 군인이다』란 서두로 일장 훈시를 하고 하단 한다. 곧바로 군인 수명이 달려오더니 즉시 군사훈련으로 돌입한다."- 李 範 雨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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