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군이 1만 6천이란 소리를 믿을수없는 이유



"○ 난리 초에 대가가 해서(海西)에 머물면서, “하삼도(下三道 경상ㆍ전라ㆍ충청도)의 감사(監司)들은 자기 경내 군사를 모두 데리고 와서 서울에 있는 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충청도에서는, 중원(中原)ㆍ서원(西原)ㆍ황간(黃澗) 등지가 패한 뒤에 백성들이 산골짜기에 흩어져 있었으므로 겨우 군사 8천여 명을 모을 수 있었다. 사무(士武 이광(李洸))도 금강(錦江)에서 군사를 파한 뒤에 간신히 만 명을 얻었고, 자앙(子昻 김수(金睟))은 군사가 없어서 다만 아병(牙兵)과 군관(軍官) 백여 명만을 거느리고 5월 20일 후에 온양(溫陽)에 모여 4~5일을 머물다가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났다.

내 관하(管下)는 충청 병사 신익(申翌)과 방어사 유옥(兪沃)에게 8천 명을 나누어 소속시켰다. 진위(振威)에 이르러 우리 3인이 모든 장수들과 의논한 다음 먼저 수원(水原)에 있는 적을 쳐서 길을 개통하고 이어서 위쪽으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마침 수원에 있던 적이 공격하기도 전에 저절로 달아났다. 나는 생각하기를, ‘대군이 한 번 진위를 떠나면 경기와 충청 사이에는 군사를 주둔할 곳이 하나도 없으니, 용인(龍仁)과 죽산(竹山)에 있는 적이 와서 보급로를 끊는다면 위태로울 것이다. 마땅히 한 진(陣)을 진위에 머물러 두어 괴산(槐山)에 주둔해 있는 조방장(助防長) 이세호(李世灝)의 군사와 서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으면 뒤를 엄습당할 근심이 없을 것이다…….’ 했으나, 이 계교는 마침내 쓰이지 못했다. 수원부 안에 이르러 진을 쳤는데, 호남 방백(湖南方伯)이 방어사 곽영(郭嶸)과 조방장 이지시(李之詩)ㆍ백광언(白光彦)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용인과 수원 사이에서 분탕질하는 적들을 치게 하므로, 나도 방어사와 병사(兵使)를 거느리고 함께 힘을 다하여 쳤으니 이때는 6월 5일이었다.

이지시와 백광언은 모두 이 싸움에서 패해 죽었고, 나머지는 겨우 죽음을 면하고 퇴군하여 중도에 주둔했으니, 곧 광교산(光校山) 옆이었다. 이 싸움에서 패했다는 보고가 가기도 전에 사무는 진을 옮겨서 진격하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교전한 곳이 얼마 떨어지지 않았는데, 더 앞으로 나간다면 적과의 거리가 가장 가깝게 되므로 설령 불행한 일이 생기더라도 군사들이 물러가 주둔할 곳이 없고, 광교산 근처는 지형이 험하고 평이한지도 탐지해 보지 않았으니, 경솔히 나갔다가는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이곳을 굳게 지키고 계속하여 군사를 더해서 성원하도록 하는 것이 나으니, 그렇게 하면 군사들의 마음도 후원이 있는 줄 알고 두려워하지 않을 터이므로 이것이 상책일 것이다.”

했으나, 사무는 고집하고 듣지 않았다. 자앙은 군사가 없는 장수로 사무에게 빌붙어 있는 터였으므로 전혀 왈가왈부함이 없었다. 그래서 내 계교는 마침내 쓰이지 못했다.

신시(申時)에 산림이 우거져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 광교산 근처로 진을 옮겼으니, 지형이 매우 좋지 못한 곳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적이 코앞에 이르자 모든 진이 다 무너지니, 우리 진과 사무의 진도 모두 지탱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우리들은 백면 서생으로 병가의 일을 알지 못하여 규모와 계획이 몹시 졸렬해서 마침내 이런 실패를 당했으니, 지금도 생각하면 원통하나 어찌하랴."-문소만록(聞韶漫錄) 문소만록(聞韶漫錄)

판서 윤국형(尹國馨) 저




위 기록의 저자 윤국형은 용인전투에 참가했음.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모두 용인전투 충청군 전라군을 도합 8만으로 적고있음.

(김수는 0명 혹은 수십,백명임.)


근데 윤국형은 용인전투 당시는 탄금대전투로 인해 충청도 군사를 잃고 백성들이 흩어져서 그후 충청도에선 겨우 8천을 모으고 

이광은 겨우 만명을 얻었다구함.


당시 조선 장수들은 군사와 백성을 나누어 생각했음. 용인전투에서 조선군은 8만이지만 그중에서 진짜 군사는 18000 밖에 안됐음.



그래서 패배한 장수들은 그 당시를 회고할때 항상 '우리군은 겨우 수천이었다.' 라고 하면서 패배에 정당한 이유를 부여하려고 애씀.



애초에 신립군이 1만 6천이란 소리는 선조실록에 안나오고 선조수정실록이라는 광해군 때인 그러니까 한참 후대에 적힌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