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기베르는 프리드리히의 이론에서 벗어나 곧 발발하게 될 세계대전의 구상을 다뤘다. 그는 요새와 탄약고를 크게 평가하지 않았다. 군대는 점령지역에서 필수품을 징발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로마가 치른 전쟁들과 같이 전쟁이 전쟁을 지원해야 하고 병사들은 검소해야 하며 생필품은 적게하여 개인 물품의 휴대를 줄이고 고초가 따르더라도 불평없이 참아야 한다. 민간인이 군의 통제상태를 감시하기 위해서 종군하는 현 프랑스 제도(136쪽)는 유해하다고 그는 말했다. 왜나하면 군의 결정이 적과 싸우는 데 대해서보다는 보급품의 확보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민간관리의 의사에 의존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경장비로 행군하고 들에서 기거하는 군대는 참신한 기동력과 넓은 전투범위, 그리고 의지력을 갖게 될 것이었다.31
보방 이래 축성술의 가치가 너무 과대평가되어 왓다고 기베르는 생각했다. 요새가 방호할 임무를 지고 있던 거대한 보급창이 없어짐에 따라 요새도 불필요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요새구축 때문에 전쟁의 비요이 필요 이상으로 맣이 들었었다. 부대를 각지의 요새에 부산시킴으로써 군대는 필요이상으로 퍼졌고 군사작전이 포위점으로 바뀜으로써 전쟁이 장기전화하였었다. 기베르는 또한 제 아무리 견고하게 축성된 진지라도 그가 생각하고 있는 고도의 기동성을 가진 군대의 공격 앞에서는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말하기를 "마치 도시 주위의 보루만으로도 도시를 벙어할 수 있고, 이 도시의 운명이 이를 방어하는 부대의 질과 활기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닌 듯이, 그리고 요새가 빈약한 부대에 의해 방어되더라도 그 때문에 점령당하며 한때 요새의 축성자이며, 주인이었던 국민들이 멸망하거나 굴욕을 당하거나 노예가 되는 사태가 발생하지는 않으리라는 듯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리하여 그는 결론에서 말하기를 요새는 매우 견고하며 전략적 이동에 전적으로 도움이 되는 소수의 것으로 국한해야 한다고 했다.32
기동이론발전에 있어 기베르는 최근에 채책된 사단을 이용할 수 있었다. 1772년경에는 이 사단의 원리가 그다지 깊이 개발되지 않아서 기베르는 프랑스군의 새로운 사단과 프리드리히 대제가 실시한 잠정적인 야전군의 구분을 명확히 판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프리드리히의 것보다 훨씬 진보된 것으로 명백하였다. 프리드리히가 통상 채택한 것은 전선에 도착하는 즉시 사전에 계획한 전투선에 배치하기 용이하도록 군을 분할 전진시키는 것이었다. 군대는 전투계획에 맞게 행군하였다. 그러나 기베르는 행군대형을 전투계획에 의존하진는 않았다. 기베르의 개념에 의하면 각 사단은 행군시 하나의 독립된(157쪽) 단위부대로서 더 넓은 장소에서 급속히 기동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적의 전환을 강요하며, 전투시는 각 사단이 결정적 지점에 결집하여 단일군으로서 고도의 전투력을 발휘한다는 것이었다. 군 사령관은 선행하여 전투가 벌어질 장소를 관찰하고, 그 관찰한 바에 입각해서 전술을 결정하며, 사단이 도착하는 대로 배치한다. 이렇게 하면 전투는 어느 때도다도 융통성이 있게 되고 좀 더 정확히 지형지물에 적응하게 되며 부대투입 이후 사령관의 지휘가 보다 용이할 것이다. 기베르는 프리드리히가 호헨프리드베르크(Hohenfriedberg) 전투에서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으나 사실에 있어서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으나 사실에 있어서 이 방법은 프리드리히적이라기 보다는 나폴레옹적인 것이었다.33
『전술의 일반원칙』의 전체 내용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새로운 종류의 군대, 즉 이상적인 국민의 군대를 제창했다는 것이다. 이 군대는 현지에서 자급자족함으로써 보다 기동성이 있고 요새에서 벗어나는 까닭에 자유로이 행군할 수 있고, 사단으로 편성되어 있기 때문에 보다 쉽게 기동할 수 있는 군대였던 것이다. 이러한 군대 때문에 이전의 진지전은 이동전으로 바뀌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가 점차 이동전으로 전환하게 됨에 배열하여 우리는 현재의 관습에서 탈피하여 규모가 작고 인원이 적은 군대로 후퇴하여 '진지' 운운하는 것은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기동성이 있고 지휘가 잘 되 있는 군대에게는 진지라는 것이 최종적인 수단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군대가 기동 방법을 알고 전투욕구를 갖고 있는 한, 그 군대는 어떠한 진지라도 후방공격을 할 수 있고 적으로 하여금 진지를 포기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진지란 한마디로 말해서 전투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는 경우에만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보나파르트가 실시하게 될 전격전을 개설하고 명장은 구식 진지를 무시할 것이라고 했다. "명장은 적을 놀라게 하고 간담을 서늘케 하며 숨을 쉴 여유도 주지 않고 억지로 싸우게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계속 후퇴만 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군에게는 오늘날 우리의 군대와는 좀 다른 군대, 다시 말하면 그 장군 스스로가 편성하여 자기가 하고자 하는 새로운 작전을 준비한 군(158쪽)대가 필요할 것이다."34 프랑스 혁명이 바로 이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 냈다.
예언가로서의 그의 명성에는 불행하게도, 그는 1779년에 출판한 군사학에 관한 두번째 중요한 작품인 『근대전 제도의 변호』(Defense du systeme de guerre moderne)에서 『전술의 일반원칙』의 주요사상을 완전히 철회해버렸다. 기베르는 그 책에서 "내가 그 책을 쓴 것은 지금부터 10년전이다. 근대철학의 안개가 나의 머리를 뒤덮어 나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35고 하였다. 『전술의 일반원칙』 때문에 유명해진 후, 그는 프리드리히를 만났고, 전 독일을 여행했으며, 사회에 뛰어들어가 전문가로서 칭송을 받았으며, 현실 세계에 대해서 더욱 만족하게 되었다.
『근대전 제도의 변호』가 변호하고자 한 '군대제도'란 고대전쟁과 대조적인 당시의 전쟁양상으로 1779년의 보수적인 군사수법이었다. 이 책이 취급하고 있는 것은 '근대'전의 일면, 즉 수십년간 논의되어 오던 보병전술에서의 종대와 횡대의 상대적인 가치판단에 불과하다. 기베르는 보수적인 면을 취하여 종대, 즉 충격의 원리를 반대하고 횡대, 즉 화력의 원리를 변호하였다. 이 주장에 이어 기베르는 "정치와 행정에 관할시켜 시험된 현대전 제도"라는 종장을 추가했다. 여기서 그는 종전의 자기주장을 완전히 철회하였다.
이제 그에게는 시민군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기베르가 집필하고 있는 동안에 시민군은 미국에서 영국 및 헤센 직업군대와 싸우고 있었다. 유럽의 많은 장교들은 이 광경을 흥미있게 주시하였다. 라파예트, 베르티에, 주르당(Jourdan), 그나이제나우는 애국적인 군인과 산개전투 대형에 관한 좋은 아이디어를 미국에서 가져오게 된다. 기베르는 민간인 출신은 결코 직업군인에 견디지 못하고 미군의 성공은 전적으로 영국군의 무능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시민군을 사용하는 위험을 감수할 근대국가는 하나도 없을 것이며, 시민군은 기동이 간단하고 화기가 알려져 있지 않던 고대에는 적합했지만 근대 유럽의 모든 국가는 시민군을 쓰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이말 가운데서 '시민'이라는 말은 '주민'이(158쪽)라는 의미에 불과한 것이었다.36
기베르는 온건하고 무해하기까지 한 '근대'전쟁, 즉 직업전쟁을 『전술의 일반원칙』에서는 맹렬히 반대했지만, 여기서는 이를 지지하고 있다. 오늘날 피점령국가는 복수와 파괴의 공포를 면하고 있지만 "주민이 방어하는 국가는 이 쓰라린 재앙의 경험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민들로 하역므 전쟁 같은 폭행을 방관케 하는 것이 오히려 인도적이다. 교묘히 공식화된 기동을 수반하는 진지전에 치중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중략) 국민의 안정과 제국의 안전에는 확실히 유리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였다. 훈련, 군기, 자원 및 기능이 모든 군사열강간에 비등할 때에 건전한 균형이 조성될 것이다. 그리고 정복가능성이 적어질 것이며 야심적인 지배자를 미혹하는 대상이 적어지며, 제국들의 판도에 변화가 적어질 것이다. 이와같은 사상으로 『근대전 제도의 변호』는 끝을 맺고 있는데 이는 프리드리히 대제의 사상과 구별하기가 힘들다.37
기베르는 그의 두 저작에서 제한전과 비제한전과의 차이, 직업군인간의 충돌과 국민군간의 파괴적인 투쟁과의 차이에 대해서 잠깐 언급했따. 그는 전쟁과 정부기관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무정견은 논리상의 것이 아니라 도의상의 것이었으며, 분절상의 무정견이 아니라 태도상의 것이었다. 29세에 그는 국민군과 전격전략에 대한 사상에 호감을 가졌으며, 35세때에는 이러한 사상을 부정했다. 이상의 어느 경우에도 요행이 들어맞은 세칙을 제외하고는 실제적인 예견을 한 바가 없었고, 1772년에 구상했다가 1779년에 반대한 그 사상이 바로 그 세대의 현실이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근대전 제도의 변호』에서 결론을 맺기 전에 기베르는 당시 평화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거나 또는 적어도 정부가 전쟁을 하는 것을 반대한 철학자들에 대해서 일침을 가했다. "전쟁을 비난하는 것은 (중략) 허공에 대고 외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야심적이고 불공정하거나, 강력한 집권자는 그러한 외침에 결(160쪽)코 구애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 때문에 상무정신이 사라져자고, 정부는 이 중대한 정부부분을 소홀히 여기게 되고, 그 결과 무장해제로 약화된 나라를-무장이 좋지 않고 무기의 사용법을 몰라도 마찬가지지만-문명화되지는 않았지만 판단력과 분별력은 더 강한 호전국에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말 것이라"라고 하였다.38 이것 또한 프랑스에 대한 예언이었지만 당시의 철학자들이 계몽하고자 한 것은 평화주의가 아니었으므로 이는 18세기에서는 필요치 않은 경고였다.
31. Ibid., 2:254-307.
32. Ibid., 2:208-20.
33. Ibid., 2:15-88.
34. Ibid., 2:249-54.
35. Defense du systeme de guerre moderne, in Oeuvres militaires du comte de Gubert, 4:212.
36. Ibid., 4:219-31.
37. Ibid., 4:263-275.
38. Ibid., 4: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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