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가강전투는 정말로 키예프공국과 이후 러시아의 민족성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 비록 칼가강전투에서 러시아는 패배하지만 이전까지의 키예프공국내의 공국과 키예프공국은 산발적인 국지전이 발생하거나 노브고로드 공국을 주축으로한 구루스계의 공국들과 키예프공국을 주축으로한 신루스계열의 공국들은 서로를 끊임없이 침입하고 공국내의 도시들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의 상황을 깨버리고 몽골이라는 거대한 적앞에서 키예프공국의 영향권에 포함되며 또는 노브고로드 공국의 주축으로한 공국들은 러시아라는 기치앞에서 수많은 공국의 자발적인 병력 지원과 칼가강 주위의 공국들의 막대한 보급등으로 키예프공국내의 대부분의 공국들이 이 칼가강 전투에 힘을 실었고 이때 러시아라는 이름아래에서 그들은 뭉쳤다 . 그러나 그들에게는 러시아라는 기치만이 앞섰을뿐 그들에게는 유리 프세볼로도비치라는 지휘관이 아닌 각 공국의 공후나 공후를 대신한 장군들이 지휘관이였다 , 또한 이들에게는 여러 타민족의 병력까지 모여있었다 . 그런 그들을 상대하는 몽골군에겐 그저 그들은 많은 수의 잔챙이에 불과하다고 할수있었다 , 몽골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양방으로 나뉜 연합군을 보았으며 그들은 상대적으로 조직력이 약한 타민족의 병력들을 공격하였고 그들은 몽골군에게 밀리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키예프공국군은 몽골군을 직면하게되었고 러시아군은 결국 패배를 걷게된다 . 칼가강전투 패배이후 칼가강 유역의 공국들은 차례로 무너지며

 모스크바,코르므나도,블라디미르,수즈달리 등의 공국에 직접적으로 몽골군이 유입됨으로써

이들 공국은 자연스럽게 철저히 파괴되었고 이후 몽고는 다시 로스토프,야로슬라불리,트베리,유리예프,드미트로프와
 같은 도시를 파괴함으로써 수공기능을 마비시키고 유리 프세볼로도비치를 1238년 3월 초에 살해함으로써
완전히 기세를 꺾었지만 유리 프세볼로도비치 한명때문에 시작된 원정인지라
본래 공격목표인 노브고로드 공략을 포기하고 이후 바투의 원정군은 회군하였지만 퇴각로 인근의  스몰렌스크,체르니코프 공국을 파괴하였으며 이들의 저항이 완고하였기에 바투의 원정군 또한 4천명의 군사가 희생되었으며 부상자또한 지속적으로 증가하는사태가 발생하였고 이에 겹쳐서 전염병 또한 돌았다 . 그러나 그들에게 대항한 도시들 또한 철저히 폐허가 되었다 . 이후 1239년 다시 잔여 키예프 러시아공국들에 대한 영향권을 위하여 원정을 시도하여 볼가강 연안의 모르도바,무롬 지역을
폐허로 만들고 드네프르강 유역의 체르니고프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후 드미트리 장군의 필사적 저항으로 잠시 주춤하지만 다시 한번 역공함으로써 키예프의 대부분에 달하는 영토와 러시아에 걸쳐져있던 대부분의 공국을 점령하였다 .
그러나 이후 바투는 포로로 잡은 드미트리 장군의 넘치는 애국심에 죽음만은 면하게 해주었다 , 키예프 공국이 무너진 이후
 키예프공국과 기타공국은 폴란드,헝가리,체코로 까지 가는 루트로 이용되었으며 병력보급소로 활용되었다.

키예프러시아 멸망이후 백러시아 / 대러시아 / 소러시아로 분해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