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이 수많은 독일인과 슈바벤인 지원군이 포함된 이탈리아의 대군을 이끌고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르만인들은 가능한 한 많은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그를 맞으러 갔다. 적의 병력이 너무 많았기에 훌륭한 무훈으로 유명한 노르만인들조차 이에 맞서 싸우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사절을 보내서 평화 협정을 요청했고, 항복을 받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들은 이전에 얻은 것들의 소유권을 유지하기만 하면 교황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며 그에게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기꺼이 자신들의 주군이 되어 자신들을 신하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


긴 머리카락과 잘생긴 외모와 큰 키로 유명한 독일인들은 자기들보다 키가 작은 노르만인들을 조롱했고, 숫자에서나 힘에서나 자기들의 아래라고 생각하는 상대의 부탁을 비웃었다. 그들은 교황을 에워싸고 거만한 태도로 이렇게 요구했다. "저 노르만인들에게 무기를 버리고 이탈리아 땅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시오. 저들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하께서는 다른 어떤 요청도 받아줘서는 안 되오. 우리도 그런 화평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오. 저들은 아직 독일의 검을 겪어보지 못했소. 저들이 자진해서 떠나지 않으면 그러도록 강요해야 할 것이고, 끝까지 버틸 경우 칼로 쳐서 죽일 것이오."





교황은 이 거만한 사람들의 의견에 여러 가지 반론을 제기하며 반대했지만, 결국 이들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교황은 또한 이탈리아 잡것들에게도 의지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가장 가치 없는 사람들, 즉 이탈리아인들 사이에서 무시당하는 변경령 사람들이었다.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대담한 척하며 허세를 보였지만 비겁함은 그들의 본성이었다. 독일인 지원군의 숫자가 기대한 것보다 적었기 때문에 그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노르만인들은 자신들의 화평 요청이 거부당하자 화가 난 채 돌아가서, 독일인들의 오만한 답변을 보고했다.


이때는 수확철을 앞둔 시기였다. 그러나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노르만인들은 아직 여물지 않은 푸른 곡물을 불에 구웠고, 검게 탄 낱알을 먹었다. 이탈리아의 반란군이 도처에서 독일군을 지원하며 노르만인들에게 식량이나 다른 물자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죽은 드로공(Drogon de Hauteville)의 살아남은 형제인 옹프루아(Onfroi de Hauteville)가 노르만 군대의 지휘관 중 하나였고, 얼마 전 아베르사 시의 백작으로 임명된 리샤르도 있었다.


형제들을 능가하는 뛰어난 용기를 가진 로베르(Robert de Hauteville) 역시 전투에 참가했다. 그의 교활함은 저 유명한 키케로나 꾀많은 오디세우스보다 더했기 때문에 그는 기스카르(guiscard:여우 같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로베르 기스카르



[나머지 지휘관 생략] 이 지휘관들 뒤로 약 3,000명의 기병과 적은 수의 보병들이 뒤따랐다.


사흘 동안 굶주렸기에 그들은 이제 무기에 의지했고, 모두 이대로 비참하게 굶어 죽기보다는 차라리 전투에서 명예롭게 죽기로 결심했다.


독일인들은 많은 수의 동맹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어리석게도 겁쟁이 롬바르드인들을 신뢰했기 때문에, 전투가 시작되면 적수인 노르만인들이 첫 번째 맹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등을 돌려서 도망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전투에서의 승리는 머릿수, 말, 사람 또는 무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 있는 것이다.


독일군과 노르만군 사이에는 작은 언덕이 하나 있었고, 아풀리아, 발바, 캄파냐, 마르시아, 키에티 등 온갖 지역 사람들이 독일군을 도우러 왔다. 그러나 독일군 지휘관인 베르너와 알베르트는 슈바벤인 700명만을 데려왔을 뿐이었다.


슈바벤인들은 대단히 용감하지만 기마술에는 서툰 거만한 사람들로, 창보다는 검을 들고 싸우는 것을 선호했다. 이들은 손으로 말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 없었기에 마상창으로 적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대신 검술에 매우 뛰어났다. 이들의 칼은 매우 길고 날카로웠고, 이걸로 종종 사람의 몸을 세로로 두 동강 낼 수 있었다!


이들은 말에서 내린 채 두 발로 서서 싸우는 것을 선호했고, 후퇴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이들의 용기가 그 정도로 대단했으므로 말에 탔을 때보다 내려서 싸울 때 훨씬 더 강했다.




이탈리아 동맹군 지휘관들은 [생략] 그밖에 내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로마, 삼늄, 카푸아에서도 병력을 보냈고, 안코나 역시 부유함에 걸맞은 많은 병력을 보냈다. 스폴레토, 사비나, 페르모 사람들도 여기에 합류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적들이 프랑크족을 해치기 위해 모여들었는지 여기서 정확하게 계산할 수 없다.


이 모든 군사들이 포르토레 강변에서 독일인들과 함께 숙영했다. 근처에는 시민들로부터 그 이름을 딴 도시[San Paolo di Civitate]가 하나 있었다.


노르만인들은 이제 평화 협정에 대한 기대를 버렸으며, 도망치려 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그들이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언덕에 올라가서 적진을 관찰했고, 그런 다음 무장을 갖추고 전투를 준비했다.





아베르사의 리샤르 백작은 특별히 선발된 정예 기사대와 함께, 롬바르드인들을 마주 보는 우익에 배치되었다.


옹프루아는 중군의 지휘관으로서 호전적인 슈바벤인들에게 대적했다.


로베르는 칼라브리아인들과 함께 좌익에 배치되었고, 스스로 판단해서 필요할 때 아군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탈리아군 우익의 독일인들은 노르만군 중앙과 좌익에 맞섰고, 좌익의 이탈리아인들은 제대로 된 방식으로 전열을 이루지 않았기에 모두 아무렇게나 뭉쳐서 서 있었다.





리샤르가 이탈리아인들에 맞서 처음으로 전투를 시작했다. 그는 용감하게 돌격했고, 이탈리아인들은 이에 저항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채 등을 보이며 언덕과 계곡을 가로질러 달아났다.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노르만 기사들의 돌진의 추진력에 의해 바닥에 쓰러졌고, 창과 검에 맞아 죽었다.


그들은 매한테 쫓기는 비둘기들처럼 바위투성이 산 정상으로 달아났지만, 리샤르와 동료 기사들에게 따라잡힌 자들은 더는 도망칠 수 없었다. 대다수의 이탈리아군이 도망쳤지만 기사들은 아주 많은 이탈리아인을 추격해서 죽일 수 있었다.


한편 슈바벤인들은 용감한 옹프루아의 부대에 대항해서 전열을 이루었다.


옹프루아는 우선 원거리에서 활로 공격했고, 독일군도 화살로 반격했다. 마침내 양쪽 모두 손에 검을 들었고, 서로에게 믿을 수 없이 강한 타격을 가했다. 반으로 갈라진 시신들이 바닥에 굴러다녔고 말과 사람이 함께 죽어 누워있었다.





형이 두려움 없는 적들에게 사납게 공격당하는 것을 본 로베르는, 자신이 지휘하는 칼라브리아인들을 이끌고 제라르 백작의 부대의 지원하에 적들 가운데로 맹렬하고 당당하게 돌격했다.


그는 힘센 두 팔로 무시무시한 공격을 가했고, 적들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칼로 목을 베었다. 그는 두 손으로 싸웠고, 그가 휘두르는 창과 검이 모두 정확하게 목표를 맞혔다.


그는 세 번이나 낙마했고, 세 번 모두 힘을 회복하고 전보다 더 사납게 전투로 돌아왔다. 사자가 자기보다 약한 동물들에게 포효하고 맹렬하게 공격하다가, 저항에 부딪히면 더 사나워지고 더 큰 분노에 불타는 것처럼 위기를 겪을수록 그의 분노는 오직 늘어날 뿐이었다. 사자는 무자비하게 먹이를 끌고 가서 잡아먹고 남은 잔해를 흩어놓는다. 그런 식으로 로베르는 자기에게 대적하는 슈바벤인들에게 계속해서 죽음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그는 발과 손을 잘라내고, 머리를 목에서 분리하고, 가슴을 가르고 몸을 꿰뚫었다. 이 커다란 사람들의 머리를 잘라냄으로써 그는 그들을 더 작은 사람들과 같은 크기로 만들었고, 최고의 용기는 키가 큰 사람들만의 특권이 아니라 키가 작은 사람들의 권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나중에 전투가 끝난 후, 양측 군대에서 로베르만큼 강한 타격을 가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탈리아군을 추격했던 리샤르가 끔찍한 학살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탈리아인들 중 일부는 도망쳤고, 나머지는 칼이나 창에 맞아 죽었다. 그는 독일인들이 여전히 아군에게 저항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저런. 우리가 전투에서 이긴 줄 알았는데 아직은 아니었군."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적들 가운데로 돌진했다.


독일인들은 도주하거나 살아날 가망 없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반격을 가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적들에게 포위당했기 때문에 이 저항은 무의미했고, 승리자 리샤르의 영광스러운 군대가 결정적으로 이들을 파멸시켰다. 이 불행한 독일인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고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슈바벤 기사들의 마지막 저항



이 전투의 결과는 교황을 매우 슬프게 했고, 그는 크게 탄식하며 도시로 피신했다. 그러나 승리한 노르만인들의 분노를 두려워한 시민들은 그를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다.


노르만인들이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교황은 그의 앞에 엎드린 사람들을 친절하게 맞이했고, 노르만인들이 교황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교황은 경건하게 타이른 다음 그들을 축복했고, 노르만인들의 화평 제안을 거절한 것을 크게 후회하면서, 죽은 형제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노르만인들의 기세를 드높였다. 풀리아에서 그들에게 저항하는 도시는 이제 남아 있지 않았고, 모두 복종하고 공물을 바쳤다.


그 후 옹프루아 백작은 형의 죽음에 대해 복수했다. 그는 모든 관련자들을 잔인하게 처벌했다. 몇몇 사람들을 불구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을 참수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교수형에 처했다.





아풀리아의 기욤, <로베르 기스카르의 업적>

William of Apulia, The Deeds of Robert Guiscard, (trans. Graham Loud)

http://richardjohnbr.blogspot.com/2009/11/deeds-of-robert-guiscard-book-ii-lines_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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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기병이 강하고 독일인이 큰 칼을 잘 다룬다는 이야기는 다른데서도 언급됨.




100년 뒤인 12세기 비잔틴 역사가 요안니스 킨나모스의 2차 십자군에 대한 기록


프랑스 기사는 말타고 창질 잘 함.

독일 기사는 하마전투에서 큰 칼로 뚝배기 잘 깸.


프랑스와 독일이 전쟁하면 독일 기사들은 기병전으로 맞붙으면 쳐발릴거 아니까 일부러 말에서 내려서 싸움.

그렇게 특기를 잘 살려서... 전투에서 이기지는 못하고 기병이든 보병이든 예외없이 쳐발림.


그래서 프랑스 기사들은 독일 기사들을 병신 뚜벅이라고 놀린다는 훈훈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