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비변사 낭청이 전하는 도체찰사의 뜻으로 아뢰기를,
“비변사가, 각 고을의 갑주(甲冑)를 보수하는 일을 전교로 인하여 계하받아 통지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원래 은갑(隱甲), 오갑(烏甲), 수은갑(水銀甲)이 있고 혹은 당제(唐制)나 왜제(倭制) 같은 것이 있는데, 양서(兩西)를 제외하면 나머지 6도에 남아 있는 숫자가 거의 4300여 부(部)에 이릅니다만, 각 고을에서 대충 숫자만 채운 채로 비치하고 있어서 형편없을 정도로 파손되어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지금부터 제작해야 하니, 좋은 가죽으로 만든 새로운 견본을 각 도에 나누어 보내어 각 영(營)과 각 읍(邑)으로 하여금 구건(舊件)의 원수(元數) 가운데 쓸 수 있는 것은 그대로 남겨 두고 쓸 수 없는 것은 모두 새로운 견본대로 개조하게 하되, 제비뽑기로 표본을 추출하여 사용 가능 여부를 살펴 상벌(賞罰)을 시행하겠다는 뜻으로 6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인조 5년 승정원일기 기사
황해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지방의 갑주가 대략 4300여부 뿐인데 그나마도 대부분 파손되어 있다는 내용.
아마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갑주 보유량이 상당히 떨어진게 아닌가 싶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광해군이 대포 만드는 김에 갑옷도 좀 만들라고 지시하는 내용도 있고 포수 입힐 엄심갑 마련해두라는 기사도 있긴한데 갑옷이 대량생산 하기 쉬운 물건도 아니고 또 광해군 본인이 나중엔 엄한데 국가재정 고갈시키고 그랬으니 광해군 시기엔 별로 갑옷 수량이 늘어나진 않았을거 같음. 인조 즉위 이후엔 또 이괄의 난이 터지는데, 이괄의 난이 임진왜란급 대사건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조선군끼리 치고박고 한거라 이때 파손된 갑주도 적지 않았을 듯.
여하간 황해도와 평안도엔 갑주가 얼마나 있었는진 알 수 없지만 저 시기 대다수 군사들은 '불멸의 이순신' 속 조선군 마냥 포졸복만 입고 있었을 확률이 높음.
나중에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면서 인조도 나름 갑주 생산에 관심을 기울이긴 함. 그런데 등자 만들 철도 없어서 나무 등자 만드니 마니 하던 형편이고 이시백이 장인들 갑옷 만드는 솜씨가 형편 없다고 까는 기록도 나오는거 보면 순탄치 않았을거임.
어라... 의무적으로 군역을 치르게 하고 병사들에게 온갖 잡일도 시키고 그저 소모품 취급하며 뭔놈의 갑옷이냐 하는게 어찌 오늘날하고 비슷하냐..ㅋㅋㅋㅋ - dc App
솔직히 임진왜란때도 죄다 갑옷 입혀줄만큼 충분하지는 않았을거 같음 그나마 여진족들하고 싸우는 북쪽에 몰려있었을것 같고 그외엔... 그래도 전쟁 난다 만다 했을때 준비했을것 같기도한데 지갑 피갑이면 몰라도 철갑같은건 만들기도 어렵고 재료도 재료인지라 많이 구비 못했을듯. 내 뇌피셜임 - dc App
나도 임란 때라고 딱히 갑주가 넉넉했을 것 같진 않음. 그래도 임란 직전 하삼도에 한해서 전쟁준비를 하긴 했으니 인조 때처럼 남은 갑옷마저 다 부서진 수준은 아니지 않겠느냐 정도? 사족인데 동래성 찰갑이 무른 철로 만들어진 이유도 임란 직전 급하게 전쟁 준비한다고 급하게 대충 만들어서 그런거려나?
총이 보급되면 갑옷은 쇠퇴하기 마련이지.. 전쟁 영향도 클거고
근데 조선전기엔 군역지는애가 갑옷 구해오는거 아니었나? 중후기부턴 나라에서 지급함?
나도 잘모르는데 임진왜란이후 직업군인들은 나라서 지급해주고 지방 속오군 애들은 스스로 구했었다고 알고있음 전기때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실록보면 엄심이랑 갑주랑 따로 카운트하던데 흉부만 보호하는 엄심은 갑옷 보조정도로 생각해선지 갑옷으로 안치고 제대로 포형으로 되있는 찰갑이나 두정갑정돈 되야 갑주라 치는거 같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