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플랑드르, 신성로마제국 연합군과 프랑스군이 야전에서 맞붙은 1214년의 부빈 전투에 대한 기록)
*기병대의 돌격 진형
첫번째 전투 공격은 왕 주위가 아닌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 왕과 그 주변의 병력이 압박을 가하려고 시도하기도 전, 왕도 모르는 사이에 들판 오른편에서 이미 일부 군사가 페르난두와 그 무리를 상대로 전투를 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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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렝 신부는 앞서 같은 대오에 배열시켰던 180명의 샹파뉴인 중 일부를 용기와 전의를 결여한 것으로 느껴 후진으로 배치시키는 한편, 전투욕과 용기가 충만하다고 확신되는 기사들을 최선두에 전진배치하면서 다음과 같은 언질을 주었다. "기사들이여, 이 들판은 아주 넓소. 그러므로 여러분은 일렬로 길게 늘어서 적들이 여러분을 포위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오. 즉, 한 사람이 다른 동료를 앞에서 막아서는 대신 모두가 동시에 싸울 수 있는 대오를 구성해야 하오."
*기병대의 패주
그는 이같이 말하면서 생폴 백작의 조언에 따라 140명의 세르장(서전트. 평민 중장병)을 전진 배치하여 전투를 개시하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실상 위에서 언급된 프랑스의 귀족 전사들이 동요되거나 타격받지 않은 상태로 적과 접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반대편의 전투욕이 충만한 플랑드르인들과 독일인들은 고귀한 기사들이 아닌 세르장들과 먼저 맞닥뜨리게 되자 상대방을 경시하는 태세를 취하였다. 즉 이들은 자리를 이동하지 않은 채 매우 짜증스레 이들을 기다려 맞이하였다.
많은 전마가 죽었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상처를 입어 죽음에 이른 자는 두 사람 뿐이었다. 프랑스 진영의 세르장들은 수아송의 계곡에서 태어나 용감성과 대담성을 충만하게 갖추고 있었으며, 기병으로서만 아니라 보병으로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 주었다.
[=전사자가 140명 중 2명에 불과했던 이유는 우선 글의 맥락상 고귀한 기사들이 천한 평민 기병들을 굳이 열심히 죽이려 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됨. 하지만 보다 현실적인 이유를 생각하면 중간에 덧붙인 설명처럼 서전트 기병들의 돌격이 그저 기사들의 돌격에 앞서 적의 기세를 흔들기 위한 견제공격에 불과했기에 양측 모두 소극적으로 싸운 것일 수도 있고, 나중에 언급되듯이 이 시기의 갑옷이 지나치게 튼튼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난전. 그리고 신형 갑옷의 놀라운 방어력
1.
무훈이 출중한 고티에와 뷔리당은 같은 대열에 선 기사들의 싸움을 독려했으며, 그들에게 마상 시합을 즐길 때 이상의 두려움을 갖지 말고 자신의 친우와 선조의 무훈을 마움속에 새기도록 하였다.
이들(플랑드르와 독일의 기사들)이 앞서 언급된 (수아송의) 세르장 중의 일부를 낙마시켜 살상한 다음 정식 기사들과 대적하기 위해 전장의 다른 편으로 나아갔다. 바로 그때 이들에게 한 무리의 샹파뉴 기사들이 닥쳐와 온 힘을 다하여 싸움을 전개하였다. 기사들은 창이 부러지면 칼을 뽑아들어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 혼전 중 피에르 드 레미와 그의 동료들이 합세하였고, 급기야는 고티에와 장을 힘으로 붙잡아 끌고 갔다. 이때 피에르의 동료 기사 중의 한명인 (플랑드르 기사) 유스타슈가 커다란 목소리로 "죽음을, 프랑스인에게 죽음을!" 이라고 외쳤고, 이에 프랑스인들이 그를 에워싸, 한 사람이 허리와 어깨 사이로 그의 머리를 붙잡은 다음 투구를 벗겨내고, 다른 한 사람이 투구 면갑과 턱 사이로 단검을 찔러 그 칼이 심장에까지 닿게(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며, 그의 고통스러운 죽음은 프랑스인들을 전율케 하였다. 그를 죽이고 고티에와 장을 사로잡음으로써 용기백배해진 프랑스인들은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승리를 전적으로 확신하는 느낌을 안으며 힘을 배가하였다.
2.
전장의 모든곳에서 부대들이 격돌했고 공격자든 방어자든 서로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팔을 멀리 뻗어 무기를 강하게 휘두를 공간이 부족했다. 신원을 식별하기 위해 갑옷 위에 걸친 명주천이 창검과 철퇴에 잘리고 찢겨져 누더기가 되었기 때문에 기사들은 적과 아군을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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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창이 부러졌고 검과 단검이 부딪혔으며 도끼로 머리를 깨트렸다. 기사들은 검을 아래로 뻗어서 말의 배를 갈랐는데, 왜냐면 위에 있는 적들은 철갑옷으로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수를 말과 함께 바닥에 넘어트리면 제압하기가 한결 수월해졌지만 그런 다음에도 갑옷을 벗겨야 제대로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기사들은 모두 전신에 여러 겹의 사슬갑옷을 걸치고 가죽조각 등을 엮어서 만든 흉갑으로 몸통을 가렸으니 하루 동안의 전투에서 수천명씩 죽어나갔다는 고대의 기록들을 생각하면 우리 시대의 군인들은 조상들보다 훨씬 안전을 신경쓰며 싸우는 셈이다.
3.
훌륭한 솜씨를 갖춘 상대 기사들은 프랑스군을 분산시켜 가며 진군해 나아가 프랑스 왕에 근접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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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전사들이 오토 황제 및 독일 기사들과 싸우고 있는 동안 이미 앞서가고 있던 독일군 보병들이 왕을 급작스레 공격하여 창과 쇠갈고리 등으로 왕을 밀어붙여 낙마시켰다. 만약 왕의 용기와 그를 감싸고 있는 특수한 갑옷이 그를 보호해 주지 않았더라면 왕은 이곳에서 전사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왕과 함께 머물러 있었던 약간의 기사들과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국왕기를 빈번히 흔들어 댄 갈롱, 그리고 자신이 애호하는 말에서 내려 왕을 보호하기 위해 적의 창칼 앞에 선 피에르는 접근한 적의 보병 세르장들을 모조리 분쇄하여 살상하였다.
4.
필리프 왕의 친위대가 오토 황제의 친위대와 마주치면서 사람이 죽고 말들이 도살되는 대전투가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필리프 왕의 적들은 일반적인 검과 창 외에도 전에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형태의, 가늘고 긴 칼을 사용했고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기사였던 롱샹의 에티엔이 이 칼로 투구의 눈구멍을 통해 머리를 관통당해서 왕의 앞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프랑스군의 검과 창이 끝내 적들이 가진 사악한 신무기의 위력을 극복해냈다.
5.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장렬하게 싸워 힘으로 오토의 전 대오를 후퇴시켰으며 결국 오토 자신에까지 다가갔는데, 세상사에 대한 지혜뿐 아니라 무예면에서도 출중한 피에르가 팔로 오토를 붙잡고 적진으로부터 그를 끌어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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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었던 지자르로부터 칼을 건네받은 피에르는 -그는 손에 칼을 쥐고 있지 않았다- 오토의 가슴을 찔렀으나 두꺼운 신형 갑옷으로 인해 단칼에 관통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첫번째의 빗나간 타격을 보충하는 두번째의 타격을 가하였다. 그는 말의 오른쪽 눈을 강력히 가격하였는데, 뇌 부분까지 찔린 말은 질겁하여 날뛰기 시작하였다. 말이 이처럼 우왕좌왕 날뛰는 사이 오토는 프랑스 기사들에게 등을 보이며 도망쳤다.
6.
르노는 그와 끝까지 함께하고자 했던 6명의 기사만으로 치열하게 싸웠다. 이 와중에 프랑스군의 한 세르장 -자신의 말이 적의 공격으로 죽게 되자 보병으로서 탁월하고 강력히 싸운 피에르- 이 백작에게 다가와 마갑(가죽과 사슬로 만들어진)을 왼손으로 들어올린 다음 오른손에 든 칼을 말의 아랫배에 찔러넣었다. 백작의 말은 쓰러져 죽고, 백작은 말의 안장 오른쪽 밑으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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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장한 체격의 코르뉘(콤모투스)라는 이름의 한 소년이 오른손에 날카로운 단검을 들고 이곳에 도달하였다. 그는 몸통 갑옷과 허벅지 가리개의 접합부에 칼을 찔러넣어 백작의 신체의 중요한 부분을 절단코자 하였다. 그러나 그 접합 부분이 분리되지 않아 칼을 찔러넣을 수 없었으며, 코르뉘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백작의 주위를 돌며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다른 수단을 강구하였다. 그는 백작의 투구를 벗겨내고 드러난 얼굴 위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하지만 백작은 손으로 이에 저항하며,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오래 죽음을 피하고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말들이 겪은 고통
여기서는 기병이, 저기에서는 보병이 살아서 잡히는 것보다 죽는 것을 더 두려워하여 상대의 칼에 굴복하기도 한다. 또한 말들이 전쟁터의 곳곳에 나뒹굴고 아랫배에 칼을 맞거나 무릎이 잘려 마지막 숨을 내쉬는 경우도 있고, 주인을 잃고 이리저리 날뛰다가 우연히 누군가가 올라타 달아나기도 하였다. 시체가 나뒹굴지 않거나 죽어가는 말이 발견되지 않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기보(騎步) 합동전술
불로뉴 백작 르노는 아무도 그를 꺼꾸러트릴 수 없을 정도의 투혼으로 싸웠다. 그는 새로운 전술을 사용하였는데, 세르장과 중무장 보병의 부대를 밀집시켜 원형을 그리며 뭉쳐있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 원형 대오 안에는 단 하나의 입구만이 있어 기사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적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을 때 이곳을 통해 들어갔으며, 그는 수 차례에 걸쳐 이 방식을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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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검과 단검을 갖춘 아군(프랑스) 기사들은 창으로 무장한 적 보병을 공격하는 데 상당한 두려움을 느꼈다. 단검이나 장검보다 훨씬 긴 창으로 무장되고 게다가 3겹의 수비 대오를 이루어 철벽의 포진을 갖춘 이들은 그 진용이 훌륭하여 이를 깨뜨릴 방법을 강구하기 어려웠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필리프 왕은 창으로 무장시킨 3천 명의 평민 중기병을 파견하여 적진을 뒤흔들어 적들이 가공한 왕의 힘을 인지하고 도망치도록 만들었다. 백작은 말에서 떨어지고 전신에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불로뉴 백작 혼자만으로도 프랑스 전군을 격퇴시킬 수 있다고 헛되이 믿으며, 그와 더불어 싸우기로 맹세한 백작 주변의 모든 전사들은 허망한 전술을 구사한 꼴이 되었고, 수치스레 달아나야 하는 자신의 삶을 저주하며 도망치기에 바빴다.
-기욤 르브르통(1165–1225), Philippide, Gesta Philippi Augusti
번역 출처:
1. 조르주 뒤비 저, 최생열 역, <부빈의 일요일>
2. Georges Duby, Catherine Tihanyi, The Legend of Bouvines: War, Religion and Culture in the Middle 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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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몇 번 언급되는 '신형 갑옷'이란 초기형 코트 오브 플레이트 흉갑을 말함.
너무 재밌게 읽었다 개추
근데 가죽을 엮어 만든 흉갑은 서코트를 착각해서 말한 건가? 아니면 사슬 갑옷 위에 가죽제 흉갑을 또 걸침?
저게 코트 오브 플레이트 말하는거 아님?
아 그런듯
가죽조끼에 철판을 붙인 코트 오브 플레이트 흉갑을 말하는 것으로 보임
코트오브 플레이트가 뭔가 현대 방탄복 닮은거같음
좋은글 고맙다. 혹시 이거 링크 써도 됨?
ㅇㅇ
그러고보니 중세 기사들이 고대 중기병이랑 달리 마갑떡칠을 잘 안 했네
그는 몸통 갑옷과 허벅지 가리개의 접합부에 칼을 찔러넣어 백작의 신체의 '중요한 부분'을 절단코자 하였다. 왜 자르는건데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