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에 처음 문헌 기록에 나타난 bazineto, 즉 배서닛은 14세기 중반이면 서유럽 전역에서 중장병의 표준적인 장비로 자리매김하였다. 기존의 단순한 반구형 머리골무(cervelliere)에서 첨단이 더 뾰족하게 솟아올라 아래로 내려치는 공격을 경사진 곡면에 흘리기 위해 발전한 형태가 특징적인 배서닛은 cervelliere와 유사하게 단독으로도 사용되었고, 그레이트 헬름과 함께 사용되기도 했다. 거추장스러운 이탈방지끈이 연결된 그레이트 헬름을 쓰고 벗는 것보다 고정핀 한두개로 바이저를 직접 배서닛에 연결해 여닫는 것이 더 간편했기에, 그레이트 헬름의 전장 사용은 점점 줄었고, 배서닛의 단독 사용이 주류가 되었다.
- 배서닛 위에 그레이트 헬름을 착용한 방식. 후기 그레이트 헬름은 배서닛의 모양에 맞추어 첨단부가 기존보다 높고 좁게 솟아올라 있는 경우도 많았다.
배서닛의 이마는 대개 가운데가 높은 아치형이었는데, 바이저를 제거하였을 때나 올렸을 때 넓은 시야를 제공하였다. 때문에 아예 바이저를 달지 않은 open-faced 배서닛도 많이 사용되었지만, 화살 등 투사체의 위협은 무시할 게 못 되었다. 개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아마 아직 왕세자이던 시절,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얼굴에 화살을 맞은 헨리 5세일 것이다. 헨리는 왕실 주치의 존 브래드모어의 시의적절한 치료로 목숨을 건졌지만, 얼굴에 화살이 박힌다는 건 대개의 경우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 에드워드 흑태자(1330-1376)의 초상. 베고 누운 그레이트 헬름과 바이저가 없는 배서닛을 확인 가능하다.
- 1403년 슈루즈버리 전투의 상상도. 우측의 화살을 맞은 기사가 헨리 왕자. 당시 왕자가 쓴 구체적인 투구 형태는 전해지지 않지만, 그림처럼 바이저가 있는 투구를 썼다면 시야확보를 위해 바이저를 올렸을 때 화살을 맞았을 것이다.
시야가 탁 트인 – 그래서 얼굴 보호가 위험한 배서닛의 안면을 보호하려는 시도는 다양했다. 이전 시대의 투구들처럼 콧잔등만을 보호하는 방식도 독일 등지에서 시도되었는데, 최초엔 사슬 드리움을 삼각형 모양으로 연장시키다가 아예 철로 된 코 보호대를 더했다. 19세기 역사가 Boeheim은 이를 ‘bretèche’라고 칭했지만, 당시 문헌에서 이 명칭이 사용된 근거는 전무하다. 1350년 무훈시에 ‘Ende cloofde hem helm ende nesebant’라는 구절로 미뤄 짐작하면 이 보호대의 이름은 ‘nesebant’였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런 단순한 보호대는 1370년 경까지 바이저와 공존하다가 쇠퇴했다.
- 호헨베르크 공작 루돌프 1세(1272-1336)의 초상. 턱 쪽에 늘어진 삼각형 조각을 이마 중간에 고정시켜 입과 코를 추가로 보호했을 것이다.
- 독일의 대립왕 귄터 폰 슈바르츠부르크(1304-1409)의 초상. 위의 보호대가 통짜 금속으로 바뀌었음을 볼 수 있다.
보다 널리 사용된 건 안면 전체를 덮는 면갑(바이저)이었다. 이는 이마의 단일 경첩으로 연결되느냐, 양쪽 관자놀이 부근의 경첩 한 쌍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klappvisier과 side-pivot으로 나뉘었는데, 후자가 무게 지탱점 수가 증가했으므로 klappvisier보다 더 대형 바이저를 지탱할 수 있었다. 두 바이저의 형태는 대동소이했는데, 극초기엔 납작한 가면 형태였지만 통기성, 방어성을 감안하여 부리처럼 튀어나온 특유의 형태로 발달하였다. 이를 독일어로 ‘개 아가리(hundsgugel)’, 즉 hounskull 배서닛이라고 불렀으며, 근대 분류에선 ‘pig-faced’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는 당대 사용된 표현은 아니다.
- klappvisier hounskull 배서닛(c.1420).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이마에 달린 경첩으로 바이저를 위로 열고 닫았다.
- side-pivot hounskull 배서닛(c.1400).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두 개의 경첩을 사용해 보다 대형화된 바이저를 지탱할 수 있었다.
또한, 투구 아래의 사슬층도 크게 변하였다. 초기엔 기존의 투구들처럼 사슬두건(coif) 위에 쓰던 배서닛은 통짜 투구만으로 충분한 방어력을 확보하게 되자 철판이 가리지 않는 부분만 가리는 드리움(camail, aventail)로 바뀌었다. 14-15세기, 통짜 철판 흉갑을 위에 껴입게 되며 점차 부차적이게 된 haubergeon과 달리, aventail은 목과 어깨 방어의 전부였다. 때문에 몸통의 사슬갑옷보다 더 작은 사슬고리들로 촘촘하고 무겁게 짜인 경우가 흔했다. 대부분의 현존 aventail은 재현품이거나 다른 투구 것을 갖다 붙인 유물이지만, 안감까지 보존된 경우도 드물게 존재한다.
- 쿠어부르크 ‘Lyle’ 배서닛( 1371-1399). 로열 아머리 소장. Aventail과 안감(lining)이 보존된 유물이다.
Aventail은 거의 항상 누비 안감이 덧대어져 있었는데, 이는 착용감을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사슬과 몸 사이 한 겹의 방어를 더해주었다. 촘촘히 짜인 사슬과 여러 겹의 천, 누비솜으로 구성된 aventail은 화살이나 창 등 찌르는 공격뿐만 아니라, 아래로 내리치는 육중한 폴암을 상대로도 충분한 방어를 제공할 수 있었다.
Aventail은 배서닛 가장자리에 딱 맞게 재단된 가죽 띠에 꿰매어졌고, 허리띠처럼 구멍 여러 개가 뚫린 이 가죽띠는 고정핀(vervelle)들에 꿰어졌다. 고정핀의 머리는 바늘처럼 구멍이 뚫려 있어 철사를 꿸 수 있었고, 이 철사가 가죽띠가 흘러서 빠지는 걸 막았다. 철사를 빼면 aventail 전체를 간편하게 분리하여 정비할 수 있었다.
- 같은 ‘Lyle’ 투구. Aventail을 제거해서 vervelle들을 더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다.
- 다른 쿠어부르크 배서닛(c.1410). 가죽띠-vervelle-철사의 고정방식을 잘 보여준다.
간혹 전투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이 가죽띠를 금속으로 만들거나, 위에 금속테를 하나 더 덧대는 경우도 있었다. 위에 금속테를 덧대는 경우 테에 갖은 치장을 하기도 했다.
- 토마스 마큰필드 경(-1398)의 초상. Vervelle들을 가리는 금속 장식테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장식테와 함께 크게 유행한 장식은 orle였다. 그레이트헬름 시대에도 유사품이 존재했던 orle는 실전적인 의도보단 순수하게 미적 장식의 역할이 컸다. 그 밖에도 왕족의 경우 orle의 자리에 왕관을 얹어 스스로의 신분을 자랑한 경우가 많았다.
- 윌리엄 드 로스 경(1370-1414)의 초상. 투구에 두른 orle와 aventail 위에 걸친 livery collar를 확인할 수 있다.
- 프랑스왕 샤를 6세(1368-1422)의 배서닛. 왕관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있다.
15세기 초, 그전까지는 거의 모든 무기를 상대로 효과적이던 배서닛과 사슬 드리움 조합에 호적수가 등장했다. 취약점은 사슬로 가려진 목, 그 중에서도 정면 목젖 부위였다. 이곳의 취약함을 안 중장병들은 aventail 아래에 pisan, standard 등으로 불리는 사슬 목도리를 더해 추가 방어를 노렸지만, 1380년대부터 등장한 ‘arret de la cuirasse’, 즉 ‘랜스 걸이’로 기창돌격의 위력이 급증하면서 이런 조치들도 허사가 되었다. 랜스 걸이는 기창의 무게 일부를 지지해서 훨씬 길고 무거운 기창을 가능하게 했고, 기창돌격의 충격을 한쪽 상반신이 아닌 몸통 전체로 뒷받침하도록 하며 위력을 증대시켰다.
- Standard/pisane E1. 대영박물관 소장. 이러한 사슬 목도리를 더해도 15세기 초의 카우치드 랜스는 막기 어려웠다.
- 험프리 스태퍼드(-1450)의 초상. Pisan은 15세기까지도 착용되었으나, 흉갑 위로 내보이는 14세기-15세기 초 유행에서 흉갑 아래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경향으로 넘어갔다.
목젖은 본래 취약부위로, 기창돌격 시에 눈 다음으로 노려지는 고위험 표적이었다. Rogerius Salernitanus(b.1140-c.1195)는 ‘Practica Chirurgia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갑옷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기사가 전장에 나아가 목을 다쳤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할 때에 숨이 상처로 새어나올 경우 치명상이다. 죽는 게 확정이니 치료하지 말고 가만히 두어라.”
Aventail로 가려진 배서닛 착용자가 목의 상처로 죽을 수 있다는 건 당시 기사들에게도 주지의 사실이었다. 존 리드게이트(c.1370-c.1451)은 장편 영문 서사시 ‘Troy Book’에서 파플라고니아 왕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Se smet hym up thorugh his aventail, in-to the gorge that the strok gan glide…”
- 원탁의 기사들(Romans de la Table Ronde)의 삽화(c.1410). 빈 국립도서관 소장. Aventail만으로 목을 보호한 기사가 창에 맞아 전사하고 있다. 배경 동료 기사들의 목 보호구에 주목.
중장병들은 그림처럼 목에 보호대를 한겹 더 껴입는 식으로 이 위험에 대처하려 시도했다. 이 보호대가 배서닛에 부착되고, 어깨까지 감싸며 점점 아래로 늘어지며 점차 중후장대해진 배서닛은 다음 단계로 진화하게 된다.
- ‘그레이트’ 배서닛(c. 1410-1420). 대영박물관 소장. 턱과 목을 보호하는 보호대가 따로 만들어진 후 투구에 이어진 걸 볼 수 있다.
철판을 아예 이어버린 그레이트 배서닛의 단점은 명백했다. 어깨까지 통짜 철판으로 고정되어 있으니 투구를 좌우로 돌릴 수 없던 것이다. 갑옷장이들은 이 문제를 투구 크기를 키워서 그냥 고정된 투구 안에서 고개만 돌리는 식으로 해결했고, 때문에 투구의 크기가 이전 배서닛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 안에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돌릴 수 있는 여윳공간 마련을 위해서였다.
- 그레이트 배서닛(c.1410-1430). 파리 육군박물관 소장. 바이저는 다양한 시야각을 확보하기 위해 구멍이 늘어났고, 기존의 ‘개 주둥아리’보다 전체적인 투구 곡선에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는 둥근 형태가 되었다.
그레이트 배서닛은 성공작이었다. 적어도 1450년대까지 도보전투/마상전투 실전에서도 널리 쓰였고, 시합용으로도 애용되었다. 1430년대 중반으로 가면 그레이트 배서닛의 앞쪽, 목 보호대가 더 날렵해지고 턱의 곡선에 꼭 맞는 각진 모양으로 발달하며, 동시기에 출현하기 시작한 더 가벼운 투구들의 목 보호대와 유사해진다.
- 존 마버리 경(-1437)의 초상. 바이저가 없는 ‘그레이트 배서닛’에서 더 날렵해진 목 보호구의 형태를 볼 수 있다.
- 솔즈버리 백작부인 마거릿의 기도서(c.1444). 피츠윌리엄 박물관 소장. 그레이트 배서닛과 아멧의 중간 단계.
- 부르고뉴식 샐릿과 비버(c.1430). 파리 육군박물관 소장. 목 보호구(bevor)만 놓고 보면 위의 보호구와 유사하다.
이후 전장에서 배서닛은 아멧, 샐릿 등에 점차 밀려났지만, 개폐식 바이저, 목 방어구 등 그레이트 배서닛의 요소들은 이후 투구들의 설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closed helmet’까지 이어지게 된다.
유익추
그저 개추
베서닛 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