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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라노 갑옷'의 전형적인 예시.


중세 말, 전 유럽에서 제일가는 갑옷 생산지는 이탈리아 밀라노였다. 물론 각국에 갑옷장이들이 있었고, 이들도 활발히 각 나라의 양식대로 판금갑을 생산할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잉글랜드부터 프랑스, 스페인, 독일에 이르기까지, '밀라노산 갑주'의 사용은 유럽 전국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다.


밀라노의 갑옷 생산력은 현대 공장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 1427년 마클로디오 전투의 전후를 들 수 있다. 베네치아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밀라노군은 지휘관을 포함해 무려 8천 명이 포로로 잡혔다. 포로들은 베네치아군 지휘관의 관용적 제스처로 석방되었지만, 이들의 갑주는 모조리 전리품으로 압수되었다.


놀랍게도, 밀라노군은 단 두 명의 갑옷장이와 계약해 단 며칠만에 4천 벌의 기병 갑옷, 2천 벌의 보병 갑옷을 공급받는다. 물론 그 짧은 기간에 판금갑을 전부 새로 찍어낸 건 아니고 재고품을 판매한 것이지만, 밀라노 갑옷산업의 규모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다.


왜 하필 밀라노의 갑옷공업만 이렇게 발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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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형적인 밀라노식 갑주이자, 현존하는 유물 중 가장 오래된 완전 판금갑인 'AVANT' 갑주. 남독일 쿠어부르크 성의 마치 가문 가주를 위해 만들어진 갑옷으로, 흉갑에 AVANT(전진!)가 작은 글씨로 반복되어 세공되어 있다. 거의 완전하게 보존된 밀라노식 갑주이지만, 태싯이 사라졌고 투구는 사실 다른 갑주의 투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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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VANT' 갑주의 복원 예상도. 원래 투구는 쿠어부르크 무기고에 굴러다니던 다른 아멧으로 추정된다.



1. 밀라노의 지리적 이점들.


밀라노는 지리적 여건이 좋았다.


바로 북쪽에 있는 알프스에는 철광이 풍부했다. 11세기 중반,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3세의 권리허가장은 롬바르디아 계곡민들에게 '선조 때부터 그들의 권리였던' 철 교역권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연간 철 500kg의 세금을 받기로 약정했다. 밀라노 북쪽의 계곡에 사는 이 광부들은 수도원 교구에 예속된 신분이었지만 이렇게 반자유민적 행보를 보이며 남쪽의 도시에 철광석을 판매했고, 도시들에서 구매한 철재와 완제품들을 제노바, 베네치아 등 해안 무역항들에 내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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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라노와 주변 철광들. 삼각형이 철광이고 원이 제철 도시들이다.


롬바르디아산 강철은 이러한 경로를 통해 이슬람 세계에까지 판매되었다. 1179년, 3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이교도에게의 군수물자 판매를 금지했지만 롬바르디아 철의 해외시장 규모는 축소되지 않았다. 기실 라테라노 공의회 자체가 별 의미없는 탁상공론이었을뿐더러, 어차피 독실한 기독교도인 레반트의 십자군 국가들에게 팔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알프스 철광 남쪽의 거점도시들인 밀라노, 베르가모, 브레치아 등들 중에서 밀라노만이 교외지역(contado)을 효과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다. 제철에 있어서 경쟁자인 베르가모, 브레치아에서는 지역 철광업자들이 도시 유력자의 반열로 진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면, 밀라노의 경우엔 거꾸로 도시 유력가들이 광산을 장악했다. 일례로, 미살리아 가문은 칸초 인근의 철광들을 직접 소유하고 있었다.


밀라노는 교통 또한 유리했다. 람브로, 아다, 티치노강에 이어진 수로와 운하는 도시 안까지 흘렀다. 본래 12세기에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를 막기 위해 판 운하(fossato)는 도시 외곽을 빙 두르는 주요 수운 경로로 기능했다. 운하는 수송뿐만 아니라 수차의 동력원으로도 활용되었다. 밀라노의 대장간들은 수력 풀무와 수력 망치를 사용해 인력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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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라노의 운하들.


수운 말고도 육상교통 역시 유리했다. 프랑스, 독일에서 알프스 고갯길들이 이어지는 포 계곡의 길목에 위치한 밀라노는 롬바르디아 동맹의 주권이 보장된 코스탄차 화약(1183) 이후 그 지리적 이점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다. 밀라노산 철과 갑옷, 무구들은 매년 제네바 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요 품목이었다.


종합하면, 밀라노는 (1) 튼튼한 경제력, (2) 풍부한 광물자원, (3) 수월한 교통사정을 바탕으로 열강으로 자리매김했고, 그 중에서도 철 자원이 풍족했기에 일찍이 철강산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2. 밀라노 갑옷의 양산 - 대기업의 등장.


밀라노의 경제정책은 친(親)대기업적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중세 길드들은 대개 한 명의 개업장인 아래에 둘 수 있는 저니맨, 도제의 수를 조합내 규율로 제약했다. 한 예로, 뉘른베르크 갑옷장이 장인들은 최대 4명의 저니맨, 최대 2명의 도제를 허락받았다.


하지만 밀라노 장인들은 달랐다. 모든 장인들이 길드에 소속된 일종의 자영업자였던 여타 도시들과는 달리, 밀라노의 갑옷장이들은 16세기 밀라노의 쇠락 이전까진 이렇다할 길드가 없었고, 무제한적으로 부하 직원들을 고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고용된 저니맨들은 저마다 한 벌의 갑옷을 만들지 않고 특정 업무에만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15세기 중반에 밀라노의 한 갑옷장이 조반니 데 데비치스는 잔코미노 다 트로카차노의 사업장에 '투구 제작'만을 하청준 기록이 남아있다. 'AVANT' 갑주의 생산에서도 코리오 가문이 조반니 다 가라발레의 사업장에 다리갑옷 제작을 하청준 걸 확인할 수 있다. '갑옷장이 거리(Contrada degli Armorari)'에 주루룩 늘어선 사업장들 중 한 벌의 완제품 갑주를 생산하는 곳은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분업의 증거는 완성된 갑주에 잘 드러난다. 일례로, 위의 'AVANT' 갑주는 총책임자인 코리오 가문의 갑옷장이 4명을 포함해 총 51명의 다른 갑옷장이들의 인장이 부위별로 찍혀 있다. 이렇게 전담 공정들을 따로따로 하청준 다음에 결과물들을 전부 수합하고, 품질관리를 책임지는 기업체 체계의 구축은 밀라노의 갑옷 생산능률을 독보적으로 증가시켰다.


하청 계약의 기간은 대개 2년이었고, 이는 '갑옷 기업체'들이 시장상황에 따라 규모를 유연하게 축소하거나 확장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기업체에서 '승진'은 고전적인 도제-저니맨-장인 순서가 아니었다. 장인 칭호를 달지 못하고 저니맨 갑옷장이로 남아도 기업체의 관리인, 사업파트너 지위를 누리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1474년의 밀라노 시에 장인급 갑옷장이들은 72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각자의 사업장에는 수많은 도제, 저니맨, 그리고 단순 노동자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1452년, 세 명의 갑옷장이들을 대표해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공작에게 자신들의 생산속도를 광고한 치코 시모네타는 3개의 사업장이 '각자' '하루에' 여섯 명의 중장병을 무장시킬 수 있다고 호언했다. 이 속도를 유지하며 갑옷을 양산한다고 가정하면 일일 18벌의 전신갑주, 연간 4500벌 이상의 어마어마한 수량이다. 1427년 마클로디오 참패 이후의 빠른 수습이 단순히 일회성 허세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앞서 말한 고용유연성 때문에 장인 대 조수의 비율을 정확하게 추정하긴 어렵지만, 단편적인 기록들에서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일례로,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밀라노의 장인 자코비노 아이롤도를 전속으로 고용하며 '저니맨 12명'을 고용계약에 함께 명시했다. 다만 이게 장인 대 조수의 평균적인 비율인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독일이나 다른 나라들의 갑옷장이들이라고 분업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길드 규율 등의 제약으로 인해, 밀라노처럼 대규모 기업체의 형태로 발전하지 못했고, 갑옷장이가 원자재 수급이나 상품 유통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정도도 제약되어 있었다.



3. 밀라노 갑옷의 수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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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세기 밀라노식 갑주의 판로. 지도에 표시된 허브들 이외에도 갑주 판매는 개인 단위로 활발히 이루어졌다.


밀라노 갑옷장이들은 양산형 '밀라노 양식' 갑주를 가장 많이 생산했지만, 밀라노식만 만들진 않았다. 고객의 니즈에 맞춰서 갑옷을 생산할 수 있었다. 토마소 미살리아가 아들 안토니오를 포함해 이노센초 다 파에르노, 안토니오 세로니 등 3명의 갑옷장이를 지휘해 만든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갑주가 대표적인 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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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의 갑주.


분명히 미살리아제 밀라노산 갑주다. 하지만 비대칭적인 왼편 견갑, 사슬 발등 등, '밀라노 양식'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몇몇 특징들이 보이지 않는다. 바르부타, 아멧 등 구체적인 투구 종류는 어느 특정 양식이라고 하기엔 좀 거리가 있고, 밀라노식 갑주에서도 샐릿을 사용하긴 했지만, 어깨판까지 리벳으로 고정된 그레이트 배서닛의 사용 역시 당시의 밀라노 양식과는 꽤 차이나는 점이다. 왜 이럴까?


이 갑주는 프랑스 갑주가 취향이던 팔츠 선제후가 'alla francese', 즉 '프랑스 양식'으로 발주한 맞춤형 갑주이기 때문이다. 밀라노 갑옷장이들이 받는 주문에는 이렇게 판매자의 국가 양식에 맞추어 '밀라노식' 갑주를 개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라에 맞춘 개조는 팔츠 선제후쯤 되는 고위 귀족만이 거금을 들여야만 의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1473년,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 공작에게 올라온 보고서 중에는 '바젤에서 온 독일 상인이 'a la todescha'로 만든 무구를 대량 구매해 포장, 배송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렇게 양산품을 개조했을 경우, 보통 한 개조는 가죽 버클로 연결되어 어느 정도 가동되던 흉갑과 플래카트를 리벳 가동식으로 고정하고, 왼편의 거대한 비대칭 견갑 대신 독일에서 더 선호하던 가벼운 견갑, 부유판 등으로 대체하는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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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식(alla tedesca)' 밀라노 갑주. 샐릿 투구를 사용하고, 밀라노 갑주의 흉갑에 특징적으로 보이는 가죽띠와 버클이 안 보이고, 견갑이 대칭형이다.


이러한 개조들은 물론 미적인 이유도 컸지만, 실전적인 이유도 컸다. 일례로, 이탈리아 갑주들이 비대칭적으로 왼편 견갑을 키우는 건 이탈리아에서 기창돌격을 하는 중장병들 사이의 기마전투가 잦았기 때문이다. 기마전투도 물론 벌였지만, 하마전투 때 양손무기를 든 팔의 가동범위 역시 고려해야 하는 독일 중장병들은 어깨 방어를 조금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더 가벼운, 오른편과 대칭적인 방어구를 원했다.


물론 개조하지 않고 수출된 갑주들도 많았고, 이쪽이 다수를 차지했다. 잉글랜드의 1440년대 이후 기사들의 초상(effigy)을 봐도 전형적인 밀라노식 갑주를 착용한 경우가 많다. 대부분은 본국에서 맞춤형으로 한 벌 맞추기엔 돈이 부족해서 해외 양산형을 사오는 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갑옷 맞추는 데에 돈이 딱히 부족하지는 않았을 워릭 백작도 밀라노식 전신갑주를 입은 것으로 묘사되는 걸 보면 갑옷을 구매한 중장병 개인의 호불호 영역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양산'은 분업체계라 그런 거지 딱히 개별적인 갑주 부위들을 날림으로 만든다던지 해서 완성도가 저하되는 건 아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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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릭 백작 리처드 보챔프(1382-1439)의 초상. 전형적인 밀라노식 갑주를 입었는데, 위의 'AVANT' 갑옷이랑 거의 똑같을 정도다. 밀라노 본래의 사슬 발등덮개를 잉글랜드 양식 특유의 관절 사바톤으로 대체한 게 특징적.


여담으로 잉글랜드의 개조 없는, 비대칭 견갑 수입갑주 등장 역시 위의 '실전적인 이유' 맥락에서 나름 흥미로운데, 이때가 백년전쟁이 끝나고 일명 '장미 전쟁'이라 불리우는 내전이 시작될 때이기 때문이다. 1차 세인트알반스 전투(1455) 때 하나같이 말에서 내려서 싸우던 잉글랜드 기사들이,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보스워스 전투(1485) 때엔 결정적인 기마돌격을 가했단 것과 수입갑주의 증가 간에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찾는 건 지나친 논리비약이겠지만, 아예 상관이 없다고 단정내리기도 어려울 수 있다.


또한, 갑옷 그 자체뿐만 아니라 '갑옷장이'들도 수출되었다. 밀라노의 거대 사업체가 해외에 판매루트를 구축하는 경우도, 밀라노 출신 갑옷장이들이 외국에서 한몫 잡아보려고 이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궁정 전속 갑옷장이가 되면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 등도 밀라노 출신의 갑옷장이를 고용해 갑주제작소를 세웠다.



4. 밀라노의 유명한 갑옷장이 가문들.


미살리아 가문은 1430년경부터 활동을 시작한 토마소 미살리아(fl.1430-1450)와 아들 안토니오 미살리아(fl.1441-1496)대에 번영했다. 칸초 철광의 임대-소유와 공작가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한 미살리아 기업은 밀라노에서만 6곳의 사업장을 운영했고, 로마, 나폴리, 바르셀로나, 투르에 직영판매장을 두는 국제적 대기업이었다.


미살리아 가문은 1470년 칸초 숲과 세그리노 호수 부근의 철광 임대권을 불하받았고, 1472년 코르티 디 카살레 영지란 이름으로 아예 구매해 소유했다. 이 가문기업은 밀라노 갑옷 공업에서 1위를 차지하는 단계를 지나서 밀라노 공작들에게 후대받는 명문가로 자리매김했다. 1435년, 토마소 미살리아는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공작에게 기사작위를 받았고, 이후 집권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겐 전속 갑옷장인으로 임명받았다. 스포르차 공작가는 막대한 금액의 갑주들을 미살리아에 발주했다.


16세기 초, 알 수 없는 이유로 쇠락기를 맞이한 미살리아 기업을 인수한 네그롤리 가문은 본래 미살리아의 하청업체 중 하나의 운영자들이었다. 이들은 미살리아의 국제적 판매망을 지속시켰고, 개중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갑주를 판매한 '고전 양식(all'antica) 갑옷'의 선도자 필리포 네그롤리(fl.1530-1550)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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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포 네그롤리의 대표작인 버고닛. '고전 양식'은 옛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티프로 한 세밀한 조각들을 갑옷 전체에 새겨넣었다. 당연히 가격은 슈퍼카급...


재미있게도 이런 정교한 갑옷을 맞춤 제작하던 필리포보다 양산형 갑주를 찍어내는 사업체를 운영한 필리포의 사촌이 훨씬 더 부유했고, 필리포는 빈곤 속에 죽었다. 그의 사후에도 네그롤리 가문은 한동안 점차 하향기이던 갑옷 사업을 지속하다가, 2대 밑인 체사레 네그롤리의 대에 가문의 부를 매각하고 은행업으로 전향했다.



번외. 밀라노 갑옷 vs 고딕 갑옷?


먼저 '고딕 갑옷'은 당대 표현이 아니다. '고딕' 미술사조란 표현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건 16세기로, '플루팅과 잘록한 허리선 강조를 특징으로 하는 아우구스부르크제 전신 판금갑'이 유행한 15세기 중후반과는 꽤 격차가 있다. 아우구스부르크 등에서 소량 생산된 '고딕' 갑옷이 신성로마제국 밖으로 수출된 사례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밀접하게 연관된) 동유럽이나 중부유럽 등지로 국한되어 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고딕 갑옷의 중요성이 부각된 건 '온전한 실제의 전신 유물'이 보존된 몇 안되는 사례 중 고딕 갑옷이 많이 있어서이다. '독일 양식'은 물론 존재했지만, '영국 양식', '프랑스 양식', '스페인 양식' 등등 역시 똑같이 존재했고, 샐릿이나 허리 등의 영향은 오히려 '고딕' 갑옷이 부르고뉴 양식에서 받아온 쪽이다. 다만 현존 실물이 없어서 '고딕 양식'이 더 유명할 뿐이다.


또한, 이 양식을 독일 전역에서 생산한 것도 아니었다. 인스브루크의 황실 갑주제작소를 운영한 조이젠호퍼 형제가 만든 갑옷은 고딕 갑옷보단 오히려 밀라노 갑옷과 더 닮아있고, 제국 내의 다른 주요 생산지들인 뉘른베르크(로크너) 등에서도 '고딕 양식'의 갑옷을 찍어내는 일은 없었다. 란츠후트(그로셰델)에선 생산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아우구스부르크를 중심으로 남독일에서 생산되어 합스부르크 영토 내 위주로만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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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이젠호퍼제, 폴란드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의 갑옷(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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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쿤츠 로크너제, 작센 대공 요한 에른스트의 갑옷. 위나 아래나 역시 '고딕 갑옷'은 아니지만 '독일 갑옷'은 맞다.


때문에 실제로는 밀라노제 갑옷과 '고딕 갑옷'이 시장에서 경쟁하거나 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렇다고 '고딕 갑옷'이 성능에서 밀려서 도태됐다거나, 헬름슈미트보다 미살리아가 갑옷 제작실력이 우월했다거나, 그 반대였다거나 한 건 아니다. 두 갑옷 모두 의뢰자의 요구에 충분히 맞추어 제작한 우수한 판금갑이었다.


그냥 수고로운 플루팅이 많이 들어가고 대기업 하청체제가 없던 헬름슈미트제 갑옷은 상대적으로 의뢰제작에 치중했고, 기업체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밀라노' 갑옷은 확고히 자리잡힌 양산체계를 통해 많이 팔아먹는 데에 집중하는 차이점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