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120파운드 이상 왕왕 160파운드까지 중세 전투용 활을 사용하는 유튜버임.

위의 영상만 봐도 어지간한 헬창 아구창 왕복으로 후리는 캅틴아메리카급 몸매를 갖춘 사람이 대충 어깨와 상박에 뭐가 얹히는 순간부터 굉장히 버거워하는 걸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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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볼 것도 없이 동서고금 활시위를 당기는 궁수들은 팔과 어깨에 부하가 들어가는 걸 극도로 꺼려했음. 궁시가 주력이던 헤이안 시대 일본 무사들도 팔 방어는 최소한으로만 챙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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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 궁사들을 봐도 대부분 흉갑 수준이 최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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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생각보다 좁은 두정갑의 방호면적도 이해가 됨.

보다시피 두정갑의 찰편이 방호하는 부위는 생각보다 넓지 않음. 조선 초기에도 국조오례의서례에 등장하는 갑주들은 최대 위쪽으로는 상완부와 아래쪽으로는 둔부 혹은 허벅지 정도가 최대임.

두정갑이 보편화되는 조선 중후기로 가면 위와 같이 더 좁아져서 사실상 어깨 일부와 몸통의 주요부위를 방호하는 흉갑 수준에 불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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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이 사람들은 어찌됐건 활을 주무기로 다루는 궁사의 일종이었던 거임.

갑주를 제대로 갖출 정도의 인원이라고 하면 최소 갑사 이상의 인원들이었고 뭘 해도 일단은 갑사취재건 무과응시건 궁시가 장기였던 인원들임.

결국 갑주의 형태와 방호면적도 그 인원들의 필요에 따라 맞춰쳤다고 생각해야 함.

팔의 방호를 챙겼어도 최대한 가벼운 소재로 최소한 만을 챙겼을 것이고 많은 경우에는 걍 무시했을 것.

거기다 조선 중후기로 가면 열병기의 전래로 갑주 자체의 중요성도 급전직하하니 그런 경향의 가속화를 부추겼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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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하면 비교적 중무장이 흔했던 조선 초기에도 북방 병사들이 '활 쏘기에 딱 좋다.'라는 이유와 '그럭저럭 유효한 방호력을 갖추었다.'라는 이유로 한지를 주 재료로 하는 섬유재질 엄심갑을 선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음.

실전을 수시로 뛰는 일선의 의견이 이러했으니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간지나 필요성과 당대인들의 생각이 많이 달랐던 셈.


이극균이 비변(備邊)에 관한 사목(事目)을 치계하기를,

"1. 본도의 군사는 겨울·여름 갑옷을 벗지 못하여 갑옷이 모두 해졌습니다. 신이 벽단진(碧團鎭)에 와서 보니, 군사가 엄심(掩心)419) 을 입은 자가 있으므로 데려다 물어 보니 그의 말이, ‘종이를 소금물에 담갔다가 햇볕에 말리어 가지고 베와 실로 섞어 꿰매며, 또 검은 무명으로 밖을 싸고 흰 베로 안을 받치는데 사이사이에 종이 노끈을 뚫어 맺기를 못대가리같이 하므로 화살이 잘 들어오지 않고, 활을 쏘기에도 편리하며 겸하여 적을 막을 수도 있을 뿐 아니라, 공력도 갑옷 만드는 것처럼 어렵지 않다.’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서울과 외방의 오래 간직한 문서와 지를 본도로 많이 실어다가, 절도사로 하여금 제조하게 하여 방수(防戍)에 나오는 군사 중 무재(武才)가 있는 자에게 먼저 나누어 줌이 어떨까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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