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共感)의 뜻은 '함께 느낀다'
대상과 동일한 감정에 몰입하는 것.
나거한에서 흔히 오용하는 '공감'이란, 단순한 입력에 따라 단순한 출력이 나오는 구조다.
"나 살쪘어"
"아냐, 예뻐."
이건 공감이 아니다. 내면의 감정은 결코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형식적인 연기에 불과하다. 이런 행태를 보이는 계집들은 속으로 음흉한 기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 공감에 해당한다. 흔히 말하는 '공감 능력이 없는 인간'이 보이는 양상이다.
감정적 전이가 있더라도 결코 대상과 동일한 감정이 나오지 않으므로, 그것은 공감이 아니라 동상이몽에 가깝다. 보통 이런 방식으로 나온 감정은 투사가 된다.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과 전혀 다른 것을 형성하고는, 그것이 자신이 만들어 낸 감정인 줄도 모르고 타인의 것이라 여기는 방식이다.
상대방이 진지하게 슬픔과 서러움을 느끼며 '나 살쪘어'라 했더라도, 투사의 결과는 '여우 같은 년'이라며 질투와 혐오의 감정을 만드는 것이다. 거기다 상대가 원인이라 판단하므로 부정적 감정의 책임조차 상대방에게 전가한다. 이 공동체에 널린 방식이며, 오히려 이쪽이 보편적이다. 이런 피드백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므로 여초가 지옥인 것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각자가 실제로 그렇게 믿으며, 그게 사실관계다.
진정한 공감은 정성스러운 관찰과 이해, 수용에서 시작된다.
상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걸 정성스럽게 관찰하고, 이윽고 이해하게 되고, 비로소 그 사람의 입장에 몰입하여 최대한 비슷한 상황과 사고방식을 구성하여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전두엽, 논리, 이성은 공감의 충분조건이다.
MBTI에 관심이 없지만 크게 유행하므로... 굳이 이해를 돕기 위해 예시를 들자면...
순수한 T는 선택적으로 F의 기능을 수행 가능하지만, 순수한 F는 T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이 아무리 이성에 매몰된 극단적인 T일 경우라도, 작은 미물이나 어린 아이들과 놀아주는 상황이라면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동일한 감정을 유추하며 상호작용 가능할 것이다.
수학자 페렐만이 어린 아이나 노모와 상호작용 하면서 논리와 이성을 따지겠는가?
오히려 그들의 수준에 맞춰 순박하고 온화한 미소를 보여줄 것이다. 이것이 공감이며, 상대와 같은 수준에서 같은 방식으로 감정을 시뮬레이션 하는 능력이다.
반대로 어린 아이나 배움이 없는 노인이 페렐만과 상호작용 하는 관계는 어떨까?
아무리 공감을 하고 싶어도 이성적인 부분에서 페렐만의 인지와 사고를 구성하지 못한다. 그래서 감정적 전이는 가능하지만, 결코 동일한 시뮬레이션을 돌리지 못하고, 그래서 동일한 감정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이 나거한에서 온갖 복잡한 부조리를 겪고 양가감정을 느낄 때, 그것을 3개월 된 치와와가 완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차라리 치와와는 순수하고 단순한 형태의 감정을 당신에게 전달해서 위로를 주겠지.
순수한 T는 선택적으로 F의 기능을 수행 가능하지만, 순수한 F는 T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성과 논리의 기능이 충분히 강력함에도 '선천적'으로 그래픽 카드가 없어서 F의 기능을 시뮬레이션 하지 못하는 경우가 소위 말하는 '사이코패스'다. 이들은 그래픽 카드가 없기에 분명히 데이터도 존재하고, 알고리즘도 정확하지만 '동일한' 출력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표현 방식의 차이일 뿐, 이진법이나 코드로 들어가면 이들 또한 동일한 구조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호환이 가능하며, 단지 적절한 쓰임에 따라 연산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이코패스와 같은 선천적인 기질은 선악의 분류 대상이 아니다. 단지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방법으로 상호작용 하면 되는 것이다.
당신이 그래픽 카드가 없는 PC에 대해서 악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런 공감의 성질을 고려하면 한국에서 '공감 능력이 없다'고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은 사실 엄청나게 공감 능력이 뛰어난 부류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손가락질 당하는 자들이 공감 능력이 뛰어나며, 인품이 뛰어난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에 대해 제대로 알려 하지도 않고, 그래서 정확히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에도 쉽게 무엇이다 단정하고, 이후에 자신과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 판단하며, 결국 그런 판단을 외부로 표출까지 하는 과정은 엄청난 무지와 폭력성, 비 공감의 형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전부 이해하고 있음에도 조용히 침묵으로 수용하는 자들이야말로 지적으로 뛰어나고, 인격적으로 훌륭하며, 상대방 수준에서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뛰어난 '공감 능력'이 전제 되기 때문이다.
이상에 가까운 부모, 성자, 신의 속성이다.
그런 아름다운 존재를 핍박하고 억압하는 공동체 구조라면 당연히 그 반대로 돌아간다. 여러분은 그런 공동체를 잘 알고 있으며,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바를 '공감'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공동체에서는 무조건적인, 무차별적인 '공감'을 권장하고, 미화한다.
공감은 무조건 하면 좋은 속성이 아니다.
공감(共感)의 뜻은 '함께 느낀다', 대상과 동일한 감정에 몰입하는 것이다.
니체는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당신을 주시한다'라 말했다.
(난 독일어를 모르므로 원문은 모른다. 대충 주장을 이어가기 위한 예문임을 '공감'하기 바란다)
공감은 대상과 근접한 환경과 사고 구조를 시뮬레이션 하여, 동일한 연산값(감정)을 구하는 것이다.
당신을 이루는 구조의 리소스를 많이 사용하면, 그걸 오래 해서 비율이 증가하게 된다면, 점차 당신의 사고 구조도 대상과 닮아가게 된다.
중추신경(뇌) 또한 물리적 실체가 있다. 연결이 반복되면 강화가 일어난다. 최적화되고, 점차 그 경로를 따라 디폴트 신호가 발생한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된다.
복지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들... 혹은 임상 심리, 상담 직종의 사람들... 정신과 의사... 화재와 싸우는 자... 강력계 형사...
이들이 매일 마주하는 구조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들은 점차 마주하는 것에 침식 당한다. 혹은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천사의 영혼을 악마의 지옥불로 지지는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고, 내면의 깊은 연결을 차단하며, 쉽사리 마음을 내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건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무공감'에 가깝고, 공감 능력이 없는 '사이코 패스'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과 세상을 분리하여 지키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을 잃어버리고 침식 당한다.
이성적인 규칙을 나침반 삼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대상과 닮아가게 된다.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 강력계 형사는 모든 사람이 범죄자로 보이고, 모든 행위가 범죄 의도를 가진 사악한 것으로 보인다.
의사는 모든 사람이 환자로 보이거나, 혹은 그런 기질이나 증상을 발견하게 된다.
상담사는 세상의 모든 아픔과 괴로움이 연결되어 쏟아지며, 화재와 싸우는 자는 안전한 장소에서 잠드는 순간마저 화재와 죽음의 가능성이 넘치는 가능성의 세계로 전환된다.
원래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관심과 공감은 아무 대상에게 한다고 무조건 좋은 속성이 아니다.
그 대상을 선악으로 구분하지 말라.
단지 당신과 맞는가, 아닌가로 구분하라.
당신이 조화롭다 생각하는지, 아름답고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자문하라.
그것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가 아름답다 여기지 않는 것에 관심을 쏟고, 침식 당하며, 결국 닮고 싶지 않던 무언가에 영향을 받아 닮아가게 된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건 끔찍한 비극이다.
용서하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당신이 그렇게 되고 싶은 대상도 아닌데, 미워함으로 인해 관심을 쏟게 된다. 이윽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침식이 이루어지며 닮아가게 된다. 뇌에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작용이 일어나는 부위는 동일하다.
당신이 싫어하는 존재를 좋아하라는 뜻이 아니다.
단지 미워할 가치조차 없으며, 감정적인 미움을 버리고 이성적인 판단만 남겨야 타산지석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신 입장에서 나쁜 것을 인식했는데, 그 나쁜 것을 당신의 유용으로 전환하라는, 오로지 당신의 이익 관점만 고려하는 승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일단 감정적인 용서가 필요하며, 당신이 싫어하는 대상의 수준에서는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건 이미 인과에 따라 일어난 사실관계이므로, 당신의 기분과 별개로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개념을 '후회'로 설명하고 싶다.
후회는 지나간 것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다. 기초 과학만 알더라도 인과를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므로 돌이킬 수 없으며,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것에 대해 갈망하는 경향은 '구부득고'의 속성을 가진다. 바라지만 이루지 못하므로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후회는 항상 늦는다. 빠르면 후회를 남기지 않으니까.
그래서 과거의 일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감정적 불편을 겪는 사람들, 후회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저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에 매몰되어, 지금 현재의 기회를 모두 날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날리고 있는 현재는 자연스럽게 또 과거가 되며, 다시 후회의 대상으로 남는다. 매우 단순한 형태의 피드백 구조고, 매우 단순한 구조의 루프인 셈이다. 괴로움이 반복해서 발생하는 순환이다.
이 구조를 직시하고, 당연한 인과의 사실관계를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으며, 나에게 남은 것은 현재고, 그래서 과거가 남긴 후회와 감정을 용서하여 버리고, 비로소 자신이 붙잡고 있던 고통을 놓아주고 매 순간 펼쳐져 있던 현재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정말로 싫어하고, 닮고 싶지 않고, 미워하며, 잘못된 것이라 판단하는 것이 있는가?
그것이 당신의 감정과 정말로 조화롭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감정적으로 멀어지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 아닌가?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고 여김에도, 그것에 집착하여 번뇌하는 과정에서 감정적 동기화, 공감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미워할 가치도 없는, 당신의 관심을 받을 자격조차 없는 대상에게 연결하고 있지 않은가?
차라리 그 시간에 아주 사소하더라도, 세상이 무시하고 가치 없다 여기는 것일지라도...
당신이 아름답다 여기고, 당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무언가에 대해...
그런 조화로운 것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은 어떨까?
무슨 가치 창출이나 생산적인 구분을 버리고, 그냥 재밌고 즐거운 것을 누리는 것은 어떨까?
괴로움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란다.
사이코패스하니까 제임스 팰런이 생각나네요. 유전적인 이유로 사이코패스 기질을 타고났고 본인도 그런 특성인 약속이나 자잘한 규칙을 어기고도 미안하단 감정이 안 들었다고도 했을 정도였지만 적절한 환경과 양육으로 결핍된 'F'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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