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생일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기록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경험담을 들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옮긴 것임
#1
할아버지는 동네에서도 말썽이 아주 심한 악동이었는데, 한번은 '새우젓을 돼지에게 먹이면 죽는다'는 얘기를 듣고
친구들과 함께 집에서 새우젓을 가져와 학교 축사에서 키우는 돼지에게 먹였는데, 정말 염분 중독으로 돼지가 죽고 말았음
돼지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학교 선생님(일본인)은 누가 이런 짓을 했냐고 무섭게 화를 냈는데,
할아버지는 친구들 대신 나서서 자기 혼자서 한 일이다, 정말 죄송하다며 선생님께 잘못을 고백함.
선생님은 할아버지를 무척 엄하게 꾸짖고 나서는, "그래도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했으니 용서해주마, 이왕 이렇게 된 거 돼지고기 파티나 하자!"라고 웃으셨고
그 날 수업이 끝나고 다같이 돼지고기 파티를 했다고 함.
그 외에도 선생님은 할아버지에게 종종 "너는 충분히 공부를 잘 할수 있는데 왜 사고만 치느냐, 마음 좀 다잡아라"며 나무라기도 했고
한번은 와세다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하셨는데, 놀기 좋아했던 할아버지는 거절하셨다고.
#2
할머니는 고등학교 졸업 후 일정 교육을 받고 선생님이 되셨는데 (당시에는 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특정 과목의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일이 있어서 번화가에 나갔던 할머니는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뒤를 돌아봤는데,
자신을 정신없이 바라보던 말을 탄 일본군 장교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굉장히 수줍어 하며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할머니는 젊었을 때 아주 미인이라고 했는데, 그럼에도 할머니에게 집적거리던 일본남자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나거한의 현대사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씬처럼 여자를 일본군이 강제로 끌고가는 일도 아예 없었다고 말씀하심.
#3
한 번은 할머니가 마당에서 음식을 장만하던 도중에 누가 급하게 대문을 두드려서 나가보니,
유카타 차림의 일본 중년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집에서 닭을 잡고 있었는데 닭이 날아가 도망쳤다, 혹시 이 집으로 오지 않았냐'며 묻더란다.
그것도 일본어가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해 어색한 조선어를 섞어가면서.
"아노, 스미마셍. 호그시 요기 달기가 나라가 요기로 노리하지 않았으므니까?" ← 대충 이런 말투였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가 이 쪽으로 닭이 온 적이 없었다고 대답하니, 집안에 들어와 둘러보려 하지도 않고
정말 죄송하다, 실례가 많았다고 하며 돌아가더란다. 그 때 조선말과 일본말을 섞어가며 열심히 설명하던 모습이 재밌었다고 하심.
#4
할아버지가 당시 오사카, 교토, 나라로 수학여행을 가신 적이 있었는데
나라에는 그 때도 길가에 사슴들이 유유히 돌아다니고 있었고
오사카 거리는 길에 떨어진 밥풀을 주워먹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했고
가로수로 심어진 귤나무의 귤은 아무도 훔쳐먹으려는 사람이 없어서 풍성하게 달려있었다고 한다.
그 때 할아버지는 '일본은 정말 신세계구나, 그에 비하면 조선은....' 하고 문화 충격을 받으심.
그 외에도 조부모님이 겪은 일본인에 대한 공통된 이야기를 간추려보면,
- 일본인 선생님들은 칼을 차고 있어도 절대 학생들에게 상스러운 욕이나 체벌은 하지 않았다. 다만 말로 엄하게 혼냈을 뿐.
정 대화가 안 된다 싶으면 집에 가서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했단다.
- 다소 거만하거나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가끔 있었어도 조선인이라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이 예의바르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 가문 전체에서도 남자든 여자든 일본인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일제가 끝난 후 6.25 때 남자고 여자고 많이 죽어나갔다.
참고로 두 분은 조선게들이 말하는 친일파도 아니었고, 그냥 그 시대를 살아가는 소시민이었다.
두 분의 경험담을 전해 듣지 못했다면 나 역시 나거한의 현대사 가스라이팅에 휩쓸렸을 것이고,
무주탈 이론 역시 너무 늦게 접했거나 아예 접하지 못했을 것이니 두 분께는 항상 감사한 마음이다.
곁다리 이야기지만 #2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당시 일본식 교육과정상 교사를 양성하는 기관은 오늘날의 고등학교-2년제대학 정도의 교육단계로 쳤기에 그럴지도
당시 제도상 고등여학교만 잘 나와도 선생님이 될수 있었을거라고 봄 ㅇㅇ 아예 고등여학교에 사범과가 있었을수도 있고
아버지께 여쭤보니 할머니는 정교사는 아니었고 가사(지금의 가정 과목) 점수가 좋은 편이어서 모교 졸업 후 가사 과목 교사로 임용된 사례라고 하시네. 할아버지도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은행의 직원에서 지점장까지 올라가셨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어지간한 좋은 직업은 전부 취업 가능했다고 하니까 정말 좋은 시절이었다고 생각됨.
내가 늘 192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사람이 생존해있으면 묻고싶던게 있었음. 삼천리 잡지 같은게 여럿 나오고,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신문에 나오던 그 시절과, 중장년을 보냈을 70년대 한국의 경험을 비교했을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흔히 가르쳐지는 일제시대의 이미지는, 당시 일본 본토인들도 삶에 쪼들리던 1940년대의 생활풍경을 주된 이미지로 새기는 감이 있어보임. 1920, 30년대의 풍경은 찾기 쉬운 듯 베일에 싸여있달까.
이 20, 30년대가 가끔 입수하게되는 골동품 도서나 광고물 자료를 보면 이게 100년전이라고? 싶게 근현대적인 조각들이 보이는데, 6.25때 박살나서 소실되었는지 아니면 40년대에 대한 인식으로 의도적으로 덮었는지 몰라도 이 20-30년대에 대한 본격적인 담론 같은게 특히 부재되어있다고 생각됨
지극히 개인적인 가문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본격적인 일제시대부터 일본의 2차대전 패전때까지도 조부모님은 큰 문제없이 생활을 영위하셨다고 하심.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니까 그 시절에 코트를 입고 머리엔 포마드를 발라 멋을 냈고, 축구화를 신고 축구를 했던 사진도 있더라고. 유럽에서 들여온 찻잔 받침이나 일제 바느질 용품도 이삿짐 정리하다 찾은 게 지금까지 남아있고... 그런데 한국 정부의 수립 후 6.25 전쟁때 할아버지는 몇번이나 군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겪으셨고(인민군, 한국군 가릴 것 없이), 군사정권 이후 낙하산 인사에게 하루아침에 지점장 자리를 빼앗기고, 한국인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가문이 기울기 시작함. 그래서 현대로 올 수록 내 조부모님은 정말 힘든 시기를 보내셨을 거야.
그 시대의 컬러로 된 풍경들이나 출판물들을 더 보고싶어지네. 그때 나온 문인들의 작품을 보면 은근히 소소한 생활에 관한 내용이 많더라고. 시 '낙타'에서 동물원 보다가 소학교 선생님을 추억하거나, 다른 수필에서 파초 키우기 도전하거나...
20~30년대 모습은 '별건곤'이나 '삼천리' 같은 그 시절 잡지에서 어느정도 추론할수 있음. 이건 큰 도서관 가면 있을거 이 시절은 조선이 사람 사는꼴 갖추는 시기인데다 조선인들이 일본국적을 무기로 '지나인' 괴롭히고 만주에서 분탕치고 다니던 시절이라 나거한 역사교육에서는 이악물고 은폐하는듯
글쓴이 1910년대에 학교 다닌 세대(구한말 태생)가 조부모인거 보면 되게 늦둥이인 모양? 당시 보통학교 다닐 정도면 상위 5%, 여고보 나왔으면 상위 0.01% 지역유지라서 친일파 드립 거르고라도 교사가 함부로 못대할듯
많이 늦둥이긴 하지. 아버지가 원래 자식을 가질 계획이 없었는데 서른 중반에 반 사고로 태어난게 나라서... 증조할아버지부터가 지주는 아니고 토지가 많았던 자영농였다고 들었는데, 일제 이후 일본인이 저수지를 지어주면서 농사 수확량이 대폭 늘어났고, 그래서 더 큰 부자가 됐다고 함.
어찌보면 글쓴이 조부모 세대는 여기 갤러들 세대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는 나라가 계속 성장하는 모습을 봤는데 정작 취직하고 좀 지나니까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더니 폭삭 망하는 그런 경험 나는 본문 #3에서 말하는 조선거주 내지인들 연구를 좀 하는데 자료가 원체 없어서 힘들다 ㅋㅋ
1910년대 후반~1920년대 후반쯤이 황금기가 아니였을까 싶네. 실제로 그쯤이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이기도 했고. 경제대공황으로 경제가 씹창나지만 않았으면 군부의 폭주도 없었을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