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에서 많이 하는 말이 있는데, "누가 칼들고 XX 하라고 협박했냐?"이다. 이것은 책임회피를 위해서 많이 한국에서 쓰이는 말인데, 이것이 정말 적용되는 사례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정말 억울한 사람에게도 이런 말을 남발하는 문제점이 한국에 있다. 그리고 이런 말들을 계속하면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의 신뢰가 붕괴되어 정말로 '칼들고 협박'하는 사례가 한국에서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간단한 예시를 먼저 설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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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의 딜레마'는 많이 알려진 게임이론에서의 상황인데, 두 범죄자가 각각 다른 취조실에 들어가서 심문을 받는 상황을 가정한다. 만약에 둘 다 범죄를 시인한다면, 둘은 나란히 5년형을 받게 된다. 반면 둘 다 범죄를 부인한다면 둘은 나란히 2년형을 받게 된다. 그런데 만약 한쪽만 범죄를 시인하고 나머지가 부인한다면, 범죄를 시인한 사람은 무죄 방면되고 범죄를 시인한 사람은 10년형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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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두 죄수간 정보 교환을 전혀 할 수 없다면 이 경우에는 어떤 결과가 나올까? 내가 한 죄수가 된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간단하게 우월한 전략을 도출할 수 있다.
경우1: 상대가 범죄를 시인했다면?
-> 내가 범죄를 시인한 경우 나는 5년형을 받고, 내가 부인한다면 나는 10년형을 받는다. 따라서 이 경우에 내가 범죄를 시인하는 것이 우월하다.
경우2: 상대가 범죄를 부인했다면?
-> 내가 범죄를 시인한 경우 나는 무죄 방면되고 내가 부인한다면 나는 2년형을 받는다. 따라서 이 경우에 내가 범죄를 시인하는 것이 우월하다.
따라서, 모든 경우에 내가 범죄를 시인하는 것이 우월한 전략이며, 이것은 두 범죄자 모두에 적용되므로 당연히 두 범죄자는 모두 범죄를 시인하게 되는 것이 내쉬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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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점을 시사한다. 각 개인에게 우월한 전략을 추구하는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손해인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두 범죄자는 각자에게는 범죄를 시인하는 것이 어떠한 경우에도 우월한 전략이지만, 그것은 나란히 5년형을 받게 되어 두 죄수가 모두 범죄를 부인하는 2년형보다 결과적으로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서 각자에게 최선의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손해가 되는 상황이 연출되므로, 죄수의 딜레마는 경제학에서도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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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각자의 판단이 사회 전체적으로 이득이 되게 바꿀 수 있을까? 그것은 경우를 반복적으로 수행하여 상대를 신뢰하는 것이 결국에 이득이 된다는 확신을 만들면 된다. 상대와의 신뢰를 깨는 것이 결국 5년형이라는 손해가 된다는 것을 개인이 확고하게 알고 있다면, 상대의 신뢰를 한 번 배반하는 것이 일시적으로는 이득이 될 수 있지만(나만 죄를 시인하면 무죄 방면되므로), 장기적으로 볼 때 손해가 된다고 각 개인이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서로 신뢰한다는 균형이 유지되는 한, 각 개인은 신뢰로 인해서 서로 이득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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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회가 전체적으로 이렇게 보이지 않는 신뢰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깨지게 된다면 모두가 손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나는 어머니를 컴퓨터 전자상가에 보내서 내 컴퓨터 부품을 절대 바꾸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기를 치더라도 간파할 수 있는 내가 직접 가서 그런 일을 처리하게 된다. 이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상대를 신뢰할 수 없게 되어 손해를 유발한다. 컴퓨터 뿐만 아니라 중고차 시장, 식재료 등에서도 한국에서는 상대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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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뒤에 오는 사람에게 문을 잡아주고, 상대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상대가 나에게도 그렇게 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상대를 그 정도는 신뢰하기 때문이다. 대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금전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상대가 그 반대급부를 주리라는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세상에 완전한 공짜는 없다. 일본이나 미국이 중국과는 달리 가난한 나라에게도 외교적 수사를 동원하여 온건하게 대하는 것도 상대가 마찬가지로 나오리라는 기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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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들은 반드시 보답해주어야 하는 법적인 의무는 없다. 내가 상대에게 문을 잡아주고 친절하게 웃으며 대해주었지만 상대는 나에게 전혀 그러지 않을 수도 있고, 그것이 불법은 아니다. '누가 그렇게 해주래?' 라고 말하며 나에게 불친절하게 대한다 해도 나는 법적으로 그것을 따지고 들 수는 없다. 일본이 한국에게 경제적으로 원조를 하고 과거사에 대해 사죄를 표한다고 해도 한국이 반드시 그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법적인 계약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대도 당연히 그렇게 하리라는 신뢰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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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상대의 신뢰를 깨면서 '누가 그렇게 하래?'라고 말한다면, 앞에서 말한 죄수의 딜레마에서 신뢰를 깨는 것과 같다. 즉, 다음부터는 상대의 호의를 기대할 수 없으므로 신뢰를 깨는 당사자는 일시적으로 이득을 보더라도 그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손해가 되며, 장기적으로 당사자도 손해를 보게 된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런 행위는 법적으로 규제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의 도덕률로 그런 배반행위를 방지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것 대신에 '누가 칼들고 협박했냐?'라면서 책임을 회피하기 급급하다. 과연 이런 야비한 행위를 하고도 사회가 장기 지속될 수 있으리라 보는 것인가? 결국 사회에 남는 합리적 행동은 '진짜로 칼들고 협박하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