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까다, 바둑이란 무엇이냐
사까다의 바둑.
언젠가 한 번은 쓰고 싶었던 주제. 그러나 참으로 기회가 오지 않았던 글.
그것을 오늘 써본다.
사까다.
소년 시절엔, 청년 시대엔 우린 사까다를 판전(坂田)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제, 판전은 어디로 갔는지? 판전이라 부르기에는 이젠 사까다에 익숙해져버렸다. 때론 뒤섞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과거는 어색하다. 몸에 맞지 않는 옷만 같다. 지난 밤 일기가 그렇듯이, 빛바랜 사진 속 유행이 촌스럽듯이.
바둑도 그렇다. 그렇게나 감동했던 그 대국이, 그렇게나 예리하고 신선했던 그 승부가, 1년 2년만 지나 돌아보면 힘은 약하고 생기는 오간데 없다. 수준도 낮은 것만 같다. 명인 국수들의 바둑이라 해서 예외가 아니다. 실로 감수성 낮은 이 몸이 문제건만, 그럼에도 문제는 세상 속 사람들의 수준인 것만 같다.
그런데 왜 굳이 사까다를 보려하는가.
형상, 감성, 언어, 그런 것을 통해서 반상을 추적했던 이 글이, 왜 철 지난 바닷가에 다시금 서려하는가. 왜 새삼스레 덧없는 현상으로 돌아가는가.
1. 「坂田の碁」
「사까다의 바둑」(「坂田の碁」).
1964년 평범사(平凡社)에서 출판한 책. 5년 후인 69년에 7판 인쇄.
한국에서는?
육민사와 천우사에서 출판한 것을 기억하는데, 조금 전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하서출판사에서만 이미 1969년에 13판을 찍었다고 한다. 다음 글이 알려주었다. “사까다 「사석의 묘」 사까다의 묘(하서출판사) 시리 중 한권입니다. 이 책의 발행연도가 1969년으로 되어있고. 초판 발행이 1967년 2월로 되어있는걸 보니. 2년여 만에 벌써13版까지 발행한 것이 되네요.” (hkikim123 님 bolg. naver.com. 2008. 10. 5.)
1960년대 70년대의 한국 바둑의 붐을 알겠다.
일본 바둑의 흥왕이 바로 그 앞을 달리고 있었음을 알겠다.
이 책은 – 이글이 알기로 - 그가 직접 쓴 것은 아니다. 그가 구술한 것을 작가가 쓴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직접 해설한 것은 틀림이 없다. 이름만 올린 것이 아닌 것이며, 그건 그의 「귀수묘수(鬼手妙手)」도 다름이 없다 그 책은 자신의 하이라이트를 직접 뽑아 신문에 해설 연재한 것을 모은 것이다.
내용의 신랄함은 보아도 알 수 있고 내용의 깊이와 기략(機略)에 가득찬 사고의 내용을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대신 해설할 수 없는 신랄함이 가득차 있다.
이 책은 대단히 중요한 책이다. 내용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바둑의 세계에 끼친 영향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무엇보다 한국의 바둑계에 끼친 영향이 그러하다. 단순히 70년대 한국 바둑의 성장기에 청년들의 바둑에 힘을 불어넣은 것 이상이다.
2. 바둑은 싸움이다
여기 이 책, 「坂田の碁」는 묘한 책이다.
왜 그런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둑과는 다른 방식으로 책을 편집했기 때문이다.
「坂田の碁」는 전체 6권. 순서는 다음과 같다. 한글은 우리나라에서 번역본에 붙인 이름이다.
(표1) 「坂田の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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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坂田の碁 1 石の攻め方」 「공격의 묘」
「坂田の碁 2 石のシノギ方」 「행마의 묘」
「坂田の碁 3 石の構れ方」 「포석의 묘」
「坂田の碁 4 石の戰い方」 「전략의 묘」
「坂田の碁 5 石の捨て方」 「사석의 묘」
「坂田の碁 6 石の數れ方」 「끝내기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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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이 무엇인가.
공격을 다루고 있다. 포석을 다루고 있지 않다. 포석은 제3권에서 다루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가치를 말해준다.
전체 6권 1질에서 제1권을 공격에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생각하기로는 당연히 제1권엔 포석을 다루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 전집은 공격을 제1권에 두고 있다.
뿐만 아니다. 「행마의 묘」 「사석의 묘」 「전략의 묘」가 따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보면 다들 비슷비슷하다. 싸우고, 역경에서 벗어나고, 노림을 가지고, 쉽게 떠올릴 수 없는 두 점의 배붙임과 같은 맥을 구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반을 다루는데 있어 「공격의 묘」 외에 따로 세권이나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차이가 없지는 않다. 「행마의 묘」는 행마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수법에 보다 치중하고 있다. 그러나 그 행마도 일반적인 행마법이 아니다. 매우 난해하고 수준 높은, 프로도 한 눈에 잡히지 않는, 그러나 두고 나면 무릎을 치게 되는 그런 수준.
이 책은 “싸움”이라고 붙일만한 장면을 4권으로 나눈 것이다. 공격 외엔 행마와 사석, 전략으로 나누었다. 짐작컨대 분량이 많아서 그런 거 아닐까 싶다. 포석과 종반 끝내기 외엔 모두가 중반. 그 중반이 곧 싸움. 싸움을 바둑의 본질로 인식하면 그 중반에 관한 자료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이다. 책 내용을 보기도 전에 바둑이 뭔가를 알 수 있게끔 하고 있다.
우리가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많은 경우에 책 표지만 보고도 - 책을 손에 든다면 더욱 더 그러한데 - 그 책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지로도 알 수 있고 기운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인데, 실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편집이나 목차를 보면 더욱더 그 책의 수준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내용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바둑도 그러하다. 그래, 그렇다면 알 수 있다.
사까다가 보기에 바둑이란 싸움인 것이다.
바둑의 본질이란 것은 싸움인 것이다.
3. 하나냐, 여섯이냐
싸움이라 하니 먼저 그의 싸움 한 판 아니 보고 갈 수 없겠다.
(기보1)이 그것이다. 서로가 얽히고 설킨 장면. 그렇지만, 상변에도 흑의 곤마가 하나 있어 흑이 일견 곤란한 듯하다. 그러나 타개의 맥점이 있다. 흑의 다음 한 수는?
(기보1) 1962년 제1기 명인전 리그. 사까다 9단(흑) 오청원 9단(백)
(기보2) 흑1이 사까다 스스로 “고심의 1착”이라고 자평한 맥점. 실로 예리했다. 백A는 흑B가 또 연이은 맥점. 이후 백C는 흑D로 타개한다. 만약 백이 흑1에 대해 백A 흑B 백D로 반발하면? 그 때는 흑C 백E 흑F로 타개한다.
(기보2) 흑1이 고심의 맥점
어떠신지? 마치 이세돌의 바둑만 같다. 하하. 그렇다.
초반마저도 그렇다. (기보3)을 보자. 박영훈과 둔 것인데, 저 치열한 초반의 변화 적극성을 보시라. 백2는 3에 두어 안정하는 것이 보통의 착상. 백2 흑3의 교환은 백도 몰리는 기분이 들어서 기사들은 저어한다. 몰린다? 그렇다. 그런 기분 드는데, 다시 역습으로 협공하는 것을 보라. 이렇게도 두는구나! 참으로 적극적인 진행이다. 백6 이후 흑A에는 다시 백B로 째나가는 수도 놀라운 착상. 일반적으로 밭전자(田) 행마를 가운데 갈라가는 수법은 평이 좋지 못하다.
(기보3) 제41기 하이원리조트배 4강. 2013. 박영훈 9단(흑) 이세돌 9단(백)
사까다의 초반은 오늘 아니 보여드리지만 거의 비슷하다.
바둑은 싸움이야.
그래, 바둑의 본질이 싸움이라 보자. 그렇다면 그것이 전부인가. 아니, 모든 것이 그것으로 귀일될까. 그렇다면 쓸 것이 매우 간략할 것이니, 그것도 좋다. 약간 고민했다. 이 책을 다루는데 글을 하나만 쓸까, 아니면 권당 하나씩 6개를 써야 할까. 6개를 다루면 다시 3개를 더 다루어야 하는데?
1982년 평범사(平凡社)에서 「續坂田の碁」를 한 질 펴냈다. 3권을 한 질로 했다.
(표2) 「續坂田の碁」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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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續坂田の碁1」
「續坂田の碁2」
「續坂田の碁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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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작은 타이틀은 붙이지 않았다. 다만 1, 2, 3으로 구별만 했을 뿐이다.
물론 내용엔 앞의 6권 중에서 4권이 - 끝내기와 사석을 제외하고 – 들어가 있다.
글을 9개나 써야 하나? 그렇게는 쓸 수 없었다. 쓸 필요도 없었다. 하나로만 다루어야 하나, 아니면 셋 정도로 나누는 것이 타당한가.
살펴보면서 사까다의 고민을 다음 셋으로 구별할 수 있었다.
1) 바둑이란 무엇인가.
2) 승부란 무엇인가.
3) 재능과 승부사란 무엇인가.
그래, 그러자. 미언대의微言大義에야 못 미치지만, 그러나 흉내는 내야 아니 되겠나. 사까다는 수법에만 머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승부, 그 승부의 본질도 이야기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또, 승부를 다투는 기사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을 6권 1질 「坂田の碁」에 담았을 것이다. 그것을 단순하게 수법에만 국한한다면 그의 자신감을 좁게 만들 것이다. 그는 일본 바둑 성황기에, 하시모토, 기타니, 오청원 등 선배들이 바둑을 한껏 넓혀놓은 시절에 살면서 자신이 이해한 것을 자신만의 안목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 그것을 폭넓게 다루어야 하겠다, 그리 싶었다.
4. 바둑이란 무엇이냐
바둑이란 무엇이냐.
여기서 물음표(?)는 붙일 수 없었다. “바둑이란 무엇이냐?”라고 쓴다면, 그리 쓴다면 해석의 여지를 좁게 만들 듯했다. 질문이 아니라 답을 폭넓게 허용하는 태도, 그것이 필요할 것이다.
바둑이란 무엇이냐.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사까다와 일본 바둑계를 약간 돌아봄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1868년 바쿠후(幕府)제도가 무너지고 근대 일본이 시장 경제로 돌아선 것은 바둑계에 큰 충격이었다. 생존의 근거가 다 사라진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둑계는 다시 일어섰는데, 새로운 세상에 맞추어 변화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표1은 그 간략한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기사 개인이 자구책을 마련하는 과정이 – 바쿠후 제도가 공식적으로 1868년에 무너졌으니 - 약 60년에 걸쳤는데, 마침내 일본기원으로 통합되어 시장경제에 직접 뛰어드는 것이 그 핵심이자 귀결이다. 중간 중간에 잡지를 발행한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바둑의 공급. 그것은 매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이후 신문에 바둑을 싣게 된 것은 그 중요한 전환점. 바둑은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표1) 바쿠후 제도 몰락 이후 바둑계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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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 어성기 폐지
1879 方円社 발족. 사장은 秀甫
1905 秀榮 八段 日本"MS Mincho";mso-bidi-font-family:"MS Mincho"">囲碁會 창설
1911 뒷날의 秀哉 명인을 중심으로 연구회 月曜會 시작
秀榮全集 간행
1908 關西"MS Mincho";mso-bidi-font-family:"MS Mincho"">囲碁硏究會 잡지 碁 창간
1909 mso-bidi-font-family:"MS Mincho"">囲碁同志會 잡지 mso-bidi-font-family:"MS Mincho"">囲碁世界 창간
1911 中京碁界 창간
1914 본인방 秀哉 명인에 오르다
1923 方円社와 본인방家 일본기원 창립에 합의
1924 일본기원 창립. 일본기원 기관지 棋道 창간.
雁金準一 중심으로 棋正社 조직, 일본기원 탈퇴
1925 일본기원 잡지 爛柯를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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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일본기원의 창립인데, 중요한 것은 다음 두 가지다.
1) 승단대회를 만들었다. 이는 과거 바쿠후 시대의 관례 - 명인의 인정, 또는 개인의 쟁기(爭碁)나 가문 사이의 담합 등에 의해 단위가 결정되던 것 -를 무너뜨린 것으로, 개인의 시대라는 근대성의 지표라 할 만하다.
2) 원생제도를 만들었다. 바둑의 전문가인 기사를 사회적으로 제도화한 것.
일본기원은 바둑의 발전과 전문성, 그것을 별개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일본 경제의 꾸준한 성장에 힘입어 점차 사회적으로 크게 지지를 얻어갔다. 승단대회 기보를 신문에 실은 것은 좋은 기회. 그 클라이맥스는 1930년대의 신포석 혁명.
일본 사회의 경제적 여건도 간단하게 메모하자. 바둑은 사회가 성장할 때 성장하는 법이다. 바둑은 놀이. 놀이는 경제가 어려울 때에는 성장하기 힘들다. 물론 요즘도 이런 이해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까다가 태어난 1920년대는 메이지 유신 후 50년이 지나 사회 경제가 착실히 발전하던 때.
그가 가장 전성기였던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일본 경제가 전후의 황폐함을 딛고 전전(戰前)의 수준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매년 10%에 가까운 성장을 기록한 시기. 70년대도 일본 경제의 황금기. 2차 산업에서 전기, 전자 산업으로 성장의 동력을 성공적으로 전환한 시기.
그 중간은?
1930년대도 착실한 성장을 이룬 시기. 그러나 40년대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패배는 험난한 시절이었다. 중년의 사까다가 바둑에 전념했을 때에는 세상도 힘들었었다. 역설적으로 공부하기 좋았겠다 싶기도 하다. 이판사판일 테니 말이다.
그런 시대에 살았던 사까다. 그의 시간을 아래 간단히 요약했다.
(표2) 사까다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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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출생.
1928 增淵辰子三 3단에게 입문.
1935 입단.
1947 前田 7단 등과 함께 圍棋新社 창설. 일본기원 제명.
1950 제6기 본인방 도전권 획득.
1951 제1기 일본기원 최고단자 우승. 본인방 도전 실패.
1953 오청원과의 6번기 4승 1패 1빅.
1954 오청원과의 10번기 2승 6패로 치수 선으로 고쳐짐.
1955 9단 승단. 제2기 일본기원 선수권전 우승 이후 7연패.
...
1963 제2기 명인전 우승. 제19기 본인방 타이틀 획득.
1965 제4기 명인전 임해봉에게 패배, 타이틀 상실.
1967 제22기 본인방전 임해봉에게 4승1패 7연패.
1968 제24기 본인방전 임해봉에게 져 타이틀 상실.
...
1975 제30기 본인방전 도전했으나 패배.
제22기 일본기원 선수권전에서 조치훈에게 2승 후 3연승.
...
1983 제4기 NEC배 우승. 타이틀 획득 64개.
...
2010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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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성적 위주로 봤는데, 사실 그가 활동했던 시절은 매우 역동적인 시기였다, 신포석의 충격, 동료와 함께 일본기원 탈퇴와 회귀. 관서기원의 창립. 승부방식의 변화 – 번기 승부(10번기, 6번기, 3번기 등)의 성장과 쇠퇴 – 에 따른 도전기, 신문기전의 전개 등.
이런 시대이니, 당연히 바둑의 다양성은 불을 보듯 했다.
그 다양성을 기사 개인을 기준으로 아래 (표3)으로 요약했다.
(표3) 사까다 활동 시절의 주변 기사들의 기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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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사이(秀哉). 싸움 바둑, 중앙 중시.
오청원. 고정된 바가 없지만, 발 빠르고 명료했다.
기타니. 초기엔 세력, 후기엔 실리 기풍.
후지사와 슈코. 스케일이 크고 두텁다.
하시모토. 변화무쌍. 변환자재.
다까가와. 평명류(平明流)라는 말 그래도 계산에 밝은 유연한 바둑.
임해봉. 두텁되 계산에 밝은 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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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저 모두가 – 다까가와와 후배인 임해봉을 제외하고는 – 적극적인 바둑을 두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다까가와나 임해봉이 소극적인 바둑을 두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도적으로 반상을 변화시켜가는 태도는 다른 기사에 비해 부족했다.
둘째, 서로가 전혀 다른 기풍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당대의 일류 기사들이었는데, 서로가 기풍이 닮은 점이 없었다.
이런 기풍 저런 기풍, 그 다양성 속에서 사까다는 무엇을 강조했던가?
1924년 일본기원이 창립되어 과거 바쿠후 시대의 권위에 힘입은 바둑계를 넘어서서 시장경제로 접어들었지만, 그러나 일본기원의 원로들은 여전히 과거 4대 가문의 인맥에 닿아 있었다. 굳이 일본사회 전체의 권위에 약한 문화를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그랬다.
그것이 긴장.
일본 바둑계의 긴장.
예와 승부의 세계가 갖는 차이, 간격.
바둑의 승부는, 앞서 원생제도와 승단대회의 채택이 보여주었듯이, 30년대 40년대 10번기의 시대와 그리고 50년대 60년대의 도전기제도가 보여주었듯이, 실력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바둑에 대한 일본 기사들의 태도는 여전히 권위에 약한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바둑의 본질로 예(藝)를 강조했다. 비록 승부를 다투더라도 예의 자세를 잊으면 아니 되며, 예로서 바둑을 공경해야 한다고 배웠던 것이다. 그것이 사회에 던진 바둑계의 이미지였다. 바둑을 예(藝)로 인식하는 것은 굳이 바둑이 아니어도 일본사회에서 그러했지만, 그러나 그런 태도를 기사들이 갖고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러므로 어렵다.
바둑이란 무엇이냐.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렵다. 기사들에게는 난감한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이 문제는 바둑의 정체성이기에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정체성은 사회적 가치를 결정하는데 핵심이 되는 기준. 사회적 가치가 낮아지면, 곧 일본 바둑계의 성장이 정체된다. 바둑을 도락이라고 치부하면 곧 바둑에 대해 예의 가치를 주었던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대중은 바둑 시장에서 떠나간다.
그러니, 이 문제는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기사라면 누구나 약간의 내면적 갈등을 가질 수밖에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 긴장과 현실적인 이해, 숙제 등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있다.
1968년 일본 바둑 「위기백년(圍碁百年)」(1968. 平凡社)이란 책에서 사까다가 맡은 것은 부제가 이리 붙어 있었다. 제3권 「실력주의의 시대」.
서언(序言)의 일부를 보자. 당시 바둑의 현실, 바둑계의 숙제, 자세 등을 볼 수 있다.
(표4) 서언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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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제한으로 2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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